문학관련

[스크랩] 선시의 표현방법론에 관한 연구 (2)/송준영

시치 2007. 9. 2. 00:46

시의 표현방법론에 관한 연구 (2)

 

                                                      송준영

 

3. 우리 나라 고전선시의 실증적 고찰

역사상 우리 나라 선시는 어쩔 수 없이 한자로 기록되어 왔다. 이 글의 취지가 ‘우리 나라에 발표된 오늘날의 시와 선시의 표현방법론을 비교 고찰’하므로 우리 시가 나아갈 바를 가름하는 데 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과거에 형성된 선시의 역사적 개관을 통해 우리 나라 고전선시에 나타난 표현방법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금의 선적 경향이 강한 선취시나 당대 시의 수사미학과 선 취향적인 맥락을 살펴보려면 과거에 이룩된 선시의 조류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 나라의 실험적 모더니즘 시의 표현 기법에 나타난 선시적 표현방법을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나비는 꽃 입술 물어 벌겋게 지나가고
푸른 버들눈은 제비가 가져왔나
꽃다이 보드랍고 따스함이 봄 집안일이나
소나무 대나무의 새순인양 싸늘해지네
― 진각 혜심1)

1행과 2행의 대구는 절묘하다. 나비가 봄을 물어가고 제비가 봄을 몰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인식에는 나비가 봄을 물어가고 제비가 늦은 봄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각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달통한 선사에게는 6상(六相)2) 허물어지는 공의 용광로에는 꽃과 나비, 나와 나비, 버들과 제비, 곧 나=꽃=제비=버들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는 까닭에 일체가 동상(同相)으로 융섭된다.

3행과 4행, 전·결에서는 봄날을 연난(軟暖)이라 표현하니 보드라움과 따뜻함이 봄 날씨와 어울리고,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새순이 냉담하다는 표현과도 어울린다.

죽은 시체가 하루저녁 꿈을 꾸니
조소(彫塑)된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
꿈깨어 다시 살아나니
말한 것이 모두 길이었다.
― 백운 경한3)

위의 게송은 압운이나 평측과 같은 형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선사들이 요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치 약을 싸는 약봉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의 게송은 선리시여서 언어도단적(言語道斷的)이다. 시체가 꿈을 꾸고 소조(塑造) 불상이 말을 하고 있다. 다시 살아나니 대화가 모두 길이라는 것이다. 기막힌 초월은유와 끝 간 데 없는 무한상징과 사유의 절연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이 또한 정상을 뒤엎는 상징을 이항대립시킨 모순적 어법, 곧 A=A??표현법이다.

허공을 찢어서 뼉다귀 꺼내들고
번쩍하는 저 빛 속에 낮잠 든다
누가 내 가풍 물어 온다면
이 밖에 다시 별난 것은 없다
― 나옹 혜근4)

앞의 시는 선사의 가풍을 여지없이 드날린 선의 이치를 읊은 선리시이다. 우선 1행부터 숨이 턱에 닿기는 마찬가지다. “허공을 찢어서 뼉다귀 꺼내들고/번쩍하는 저 빛 속에 낮잠 든다.”고한 어법은 1행의 반상(反常)과 2행의 합도를 표현하고 있다. 곧 ‘A는 A가 아니므로 A를 이룰 수 있는’ 모순어법이다. 이 구절을 “뼉다귀 빠개서 허공 만든다.”고 하여도 별다르지 않은 점에서 모순어법성을 느낀다.

주인은 꿈에서 나그네와 말하고
나그네는 꿈 속에서 주인과 말하네
말하는 꿈 속의 두 나그네
역시 꿈 속의 사람들이네
― 청허 휴정5)

꿈과 현실의 세계. 그렇게 걱정되는 건 아니다. 꿈을 꿀 때는 꿈 잘 꾸면 그뿐이고, 현실 역시 꿈꾸듯 살면 그뿐 아니겠는가. 저 공문 깊숙이 좌정한 선사에게는 담담할 뿐이다. 〈삼몽사(三夢詞)〉는 반상합도 되어 A=A??세계를 그리고 있다. A=A??세계에 노니는 선사는 일체가 내외무법(內外無法)임을 노래하고 있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불 속에 옮겨다 심다
새 봄의 비를 가져오지 않아도
난만하게 핀 붉은 꽃.
― 소요 태능6)

앞의 시는 제월 선사에게 준 5수 중의 하나이다. 일종의 염송시이다. 선가에서 전승되어온 서래밀지(西來密旨)7)를 아끼는 제자에게 전한 것이다. ‘무영목(無影木)’이나 ‘화중제(火中裁)’는 정상, 비정상을 떠나서 반정상이다. A=A??진경이다. 이 공의 세계에는 A도 피고 A??핀다 할까. 불 속에서 피는 꽃은 일상에도 핀다 하면 선도리에 깜깜하다 할 것이다.

이상으로 간단하게나마 우리 나라 선시를 표집하여 선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선시가 어떤 표현방법론을 가지고 그 사상을 담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앞장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 고전 선시들에서는 초월은유, 절연, 반동일성의 무한상징, A=A??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반상합도의 표현법이 자유롭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4. 우리 나라의 시의 그 표현방법적 경향

이 장에서는 ‘오늘날의 시’(contemporary)의 표현방법에 있어 선시적 수사법인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상징을 알맞게 구사하며 작시한 시인들을 각 연대별로 2명씩을 예증하고자 한다. 특히 이들 중 동양적이며 전통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우리 시단에 영향을 끼친 한용운, 서정주, 오세영, 조정권과 반면에 서구적인 모더니즘의 수사법을 받아들여 우리 시단에 한 축을 이룬 이상, 김춘수, 이승훈, 황지우의 수사기법을 비교하기로 한다. 특히 이들이 보인 시의 수사법이 선시의 수사법과 어떤 점에서 그 맥을 같이 하는가 살펴보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작시된 이들의 시들이 오늘날 같은 표현방법으로 만나는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1) 한용운과 이상

3, 40년대에 극명하게 대립되는 한용운과 이상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선시의 표현방법론의 특성인 모순어법이 우리 나라 실험적(avant-garde) 현대시의 뿌리인 이상의 시와 어떤 점에서 마주치는가를 예증하고자 한다.

한글로 작품을 쓴, 그러면서도 선관을 투과한 시인은 만해 한용운 한 사람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조지훈은 그를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8)의 어느 한 면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인물이라 지목했다. ‘침묵과 역설의 미학’으로 대변되는9) 그의 시집 《님의 침묵(沈默)》10)의 88수는 ‘우뢰와 같은 유마의 침묵’11)을 역설적 언어로 승화하고 있다는 칭송을 듣고 있다.

님이여 오셔요 오시지 아니하랴면 차라리 가서요. 가랴다 오고, 오랴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죽음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님이여 책망하랴거든, 차라리 큰소리로 말씀하야 주서요. 沈默으로 책망하지 말고, 沈默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아니 보랴거든, 차라리 눈을 돌려서 감으서요. 흐르는 곁눈으로 흘겨보지마서요. 곁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사랑의 보(褓)에 가시의 선물을 싸서 주는 것입니다.
―한용운, 〈차라리〉

위의 시는 3행으로 된 단련시다. 1행에서 ‘가시려면 아주 가시지 올동말동하는 것은 죽음도 주지 않는 야속한 짓’이라 화자는 말하고 있다. 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을 ‘죽음도 주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이 일구로 사모하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고 있다.

다음 2행에서는 ‘떠나시려면 차라리 큰소리로 책망이라도 해주어야지, 아무 말씀 없이 돌아서는 침묵의 책망은 터진 심장을 다시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논리로는 ‘침묵’은 소리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픈 마음을 얼음바늘로 찌르는” 그래서 ‘우뢰 같은 침묵’이라 할 때, 선시적 표현인 반상의 합도의 표현이다. 이것은 선에서 말하는 문자나 ‘말 한 마디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절대평등의 경지에 든다.’는 불이법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도출한 ‘A는 A가 아니므로 A일 수밖에 없다’는 비정상이 정상인 A=A?遮?도식으로 성립된다. 이 시행은 서슬이 푸른 교훈이자, 예리하고 날카로운 사자후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3행은 ‘이별에 슬퍼하는 나를 측은히 보지 말고 떠나라는 간청’이다. 마지막 행에서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님과 나, 사랑과 침묵이 온통 휘감아 도는 안개와 같음이다. 곧 나에게서 떠나려거든 그냥 훌쩍 떠나지 눈물을 보이며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이것은 화자의 애틋한 마음이며 분명 개념과 상징의 모순이다.

화자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노래들은 언제나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 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침묵은 차라리 문자나 언어로 표출되는 그 무엇보다도 웅대하고 장엄한 소리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곳도 때도 없다’한다. 진실한 사랑은 만남의 애틋함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짐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만남/떠남’의 차별상의 부정, 이것이야말로 A=A??도식으로 포함할 수 있는 표현의 방법이다. 이런 공의 세계에서만이 ‘포옹처럼 황홀한 이별’이라는 모순어법의 절묘한 역설의 미학이 성립된다.

한용운 시에서 수사미학은 단연 역설에 의한 모순어법이다. ‘A가 A 아니므로 A’인 이 반상합도의 논리는 일체의 존재물의 존재자를 동질성으로, 물론 견자를 포함하여 보는 사물을 동일시하는 수승된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沈默〉에서

〈님의 침묵(沈默)〉 마지막 연에서도 나타나는 것같이 정상의 논리를 벗어난 A=A?遮?반상합도의 선적 어법의 등식을 펼친다. 그리고 ‘사랑의 노래’는 음성으로 표현되어지는 ‘소리’로서 이 소리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 즉 ‘노래(소리)/침묵(소리 없음)’은 역시 모순적 어법인 반상(反常)의 논리에 의한 합도의 표현이다. 이것은 불교의 공도리인 A=A??통째로 증득해 보이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경지를 언어화해 보이는 선도리의 표현이다.

당신의 소리는 沈默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 그려.
당신의 소리는 沈默이어요.

당신의 얼골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을 때에 당신의 얼골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려.
당신의 얼골은 黑闇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 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이어요
― 한용운, 〈반비례〉

시 〈반비례〉는 3연 9행으로 된 짧은 시이다. 1연은 일관되게 ‘당신의 소리=침묵’이라는 비정상적인 논리를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당신이 노래하지 않을 때 그 노래가락이 역력히 들린다.’고 2행에서 말하고 있다.

또 2연에 있어서는 ‘눈 감음=보임’, 3연에서는 ‘그림자=광명’이라는 모순어법을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다. 또 2연에서 ‘당신의 얼굴이 흑암이고, 3연은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서’,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도 창에 비친다’는 역설은 표현의 절묘한 비법이다.

그의 시집 《님의침묵》 88수에 일관하는 수사논리는 반상의 논리에 의한 합도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색도 공도 아닌 색=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다. 불교에 의하면 색은 환의 세계, 가상의 세계이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세계다. 또 공은 본원의 세계, 본질의 세계다.

가상과 본질이 소통하는 세계가 바로 반상하여 합도하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의 표현법은 상호 모순에 가탁한 어법만이 그 표현이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한용운의 시 전반에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앞의 우리나라 고전 선시에서 나타난 선시적 표현이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모순어법은 시적 긴장과 함께 우리에게는 진리의 눈뜸을 가져오게 하고 ‘황홀한 대자유’로 접인시킨다. 그것은 한용운이 선사로 응시하는 정신적 경지가 옛 선사들과 같이 공유하고 있음의 동일한 보기다.

초기의 우리 나라 모더니즘 시는 이상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보들레르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시는 그 특징을 ‘긴장과 부조화’라 할 수 있다. 이 ‘긴장과 부조화’는 표현방법으로 볼 때는 ‘아이러니와 초자연주의’인데, 이것은 아방가르드 시의 두 가지 특질이다.

아이러니와 초자연주의는 선시의 반상합도나 초월은유와 무한상징의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우리 시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는 30년대의 이상의 시에서 드러난다. 이상의 시는 유기적 예술 작품이라는 전통적 개념 파괴, 실험적 새로움, 우연성, 벤야민적 알레고리 등 네 가지로 요약된다.12)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시는 이항대립적인 우리의 정상화된 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 곧 우리가 떠나온 본성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제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13인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烏瞰圖)〉 - 詩第一號

〈오감도(烏瞰圖)〉13)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연재한 연작시로 연재 도중 독자들의 비난으로 중단된 시의 표제이다. 원래 조감도(鳥瞰圖)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린 그림을 뜻한다. 그러나 〈오감도〉는 이상이 쓴 조어이다.

“13人의兒孩”에 대해서 이승훈은 ‘시 후반부에서 ‘아해(兒孩)’의 의미와 결합되어 불안을 표상한다고 하였고, 이 ‘13인(人)’은 기호와 상징의 중간개념으로 인식된다 하였다.14)

아해(兒孩)는 아이의 낯설기로 봄이 타당하다.
또 “道路로疾走하오.”에 대한 의미는 이규동은 ‘불안의 극단적 형태 혹은 성적 흥분’으로 보았고, 정귀영은 ‘현대의 위기의식’으로, 이어령은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과 역사적 도정을 표시하는 은유’로 보았다. 이승훈은 ‘도로(道路)’는 ‘막다른 골목’이어도 좋고 ‘뚫린 골목’이어도 좋다고 시에서 진술하였으므로, ‘도로’ 자체의 의미보다는 질주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했다.15)

이승훈의 이러한 분석은 의미상 접근일 때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필자는 ‘막다른골목/뚫린골목’은 자/타, 주관/객관의 이항대립적인 오랜 관습에 의해 생긴 인간의 정상성(定相性)를 해체하고 보다 수승한 세계를 펼쳐 보이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표현법이라 생각한다. 곧 앞장에서 살펴본 선시적 수사법인 반상합도(反常合道)와 초월은유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첨가다.

그리고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는 22행의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와 구조적으로 대립되어, 길은 뚫린 골목이든 막다른 골목이든 관계가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런 반어적 의미는 1행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와 23행의 “13인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에서도 구조적으로 대립된다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진다. 따라서 ‘13人의 아해가 왜 도로로 질주하는가’ ‘도로는 막다른 골목인가 뚫린 골목인가’에 대한 대답은 중요치 않게 되고, 시에서 중시되는 것은 ‘아해들의 상태’이다.16)

이런 해석은 시를 읽는데 작가 이상이 무엇을 그리고자 하였는가에 대한 의미상 접근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앞장에서 우리가 보아온 선시의 모순적 어법 중 ‘선시의 반상합도’와 ‘선시의 초월은유’에 의한 수승된 다른 내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수사법으로 읽힌다. 곧 우리의 정상(正常)이라 규정하는 관습화된 일상을 돌이키고 뒤틀므로 정상과 비정상이 융통하고 회감(廻感)하여 수승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서로 다른 것이 합일되어 고차원의 세계로 합도 되는 경지이니,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A라는 시어가 B라는 시어와 서로 상치하는 듯하고 대립하는 듯하나, 보다 큰 차원에서는 서로 융합(融合) 회통(回通)하는 것, 그래서 하나의 통일된 수사적 효과를 거둔다. 곧 A와 A가 아닌 요소인 A??서로 상치하고 대립하는 듯하나, 결국 수승된 세계를 표현하는 바로 우리가 세워온 A=A??상태로 상상력을 넓혀주는 선시의 수사법이다.

결국 위의 시, 2행/23행은 이항대립적인 우리의 정상화된 사고를 해체하므로 둘이 아닌 새로운 세계, 불이(不二)의 세계로 들게 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막다른골목(A)/뚫린골목(A?’에서 ‘막다른골목(A)=뚫린골목(A?’으로 선(禪)의 세계, 우리가 떠나온 환지본처(還至本處)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16행 “제13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도 ‘무서운아해(兒孩)/무서워하는아해(兒孩)’가 ‘무서운아해(兒孩)=무서워하는아해(兒孩)’이니, 선불교에 의하면 우리는 본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기관과 그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경계를 가지고 있는 한 이항대립이 상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화된 삶의 관습일 뿐 본래의 세계는 A/A??세계가 아니라 A=A?湛?선에서는 천명한다. 곧 ‘무서운아해(兒孩)=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본향(本鄕), 본래의 세계를 이상은 〈오감도〉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白紙는찢어졌으리라.그러나내팔은여전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이상, 〈오감도(烏瞰圖)〉 - 詩第十一號

위의 시행에는 두 개의 팔이 나온다. ‘현실적인 팔(A)/환상적인 팔(A?’이다. 곧 ‘사기컵을 손으로 쥐고 있는 팔’과 이 ‘현실적인 팔에서 접목처럼 돋아난 환상의 팔’이 그것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 사기컵을 메어치는 팔은 환상의 팔이 된다. 위의 시에서 “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라는 시행은 ‘손에 컵을 쥐고 있는 현실의 팔(A)과 사기컵을 파괴하는 팔(A?’이 동시에 존재함을 말한다. 이 표현은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현실적인 팔(A)=환상적인 팔(A?’이어서 선시의 모순어법인 A=A??표현법이다. 곧 현실이 환상이고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일 수 있는 우리 존재의 양태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 현실의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이다.”란 시행에서 곧 마룻바닥에 깨어져 흩어진 것은 환상적인 사기컵이며, 이 사기컵이 화자의 뼈와 동일시됨을 말한다. 이것은 1행의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는 전략적인 진술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것은 곧 ‘현실적 사기컵(현실적 팔)/환상적 사기컵(환상적 팔)’으로 상호 대립된다. 이것은 ‘긍정적 관계/부정적 관계’의 대립으로 읽힌다. 특히 이승훈은 화자가 ‘환상적 사기컵’을 ‘화자의 해골’과 동일시함으로써 현실/환상, 의식/무의식의 변증법적 종합을 성취하려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의 전형이 드러난다17)고 갈파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화자는 ‘현실적 사기컵-현실적 팔(A)=환상적 사기컵-환상적 팔(A?’로 전략적 시작을 하고 있다. 곧 선시의 모순적 어법인 ‘선시의 반상합도’, ‘선시의 초월은유’, ‘선시의 무한상징’의 도식인 ‘A는 A가 아니므로 A다’하는 A=A??세계를 그린다. A와 A??두 세계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내적 속성을 초월하며 선시의 모순적 어법으로 결정된 정상(定相)을 깨뜨리고 본래의 세계인 자성본원인 A=A??수승된 세계를 첨가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전혀 다른, 우리나라의 3, 40년대를 대표하며 시적으로 극명하게 대립된다고 느껴지는 두 시인의 시를 살펴보았다.

2) 서정주와 김춘수

서정주는 그의 시집 《동천》의 서문에서 “석가모니 대성의 은유에 힘입은 바 크다.”18)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선적 수사법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그리고 여기에 힘 얻은 육상(六相)을 마음대로 이합집산 시킴으로써 선시의 모순적 어법을 능숙하게 활용한다.19)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위의 시에서는 모든 사물이 시적으로 상호 동화된다. ‘내(생물)/돌(무생물)’, ‘돌/연꽃’, ‘나/호수’ 이렇게 서로 모순적인 대상이 해체되고 회통됨을 선에서는 반상의 합도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즉 서로 다른 각각의 이미지를 이합집산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전체적인 이미지가 바로 반상(反常)에서 도출되는 합도다.

이 시에서 ‘나=돌=연꽃=호수’, 또 ‘나=호수=연꽃=돌’은 앞장에서 살펴본 《잡아함경》의 〈인연경〉에서 고찰하여 본 상호의존성의 연기적 고리다. 사물은 있어도 환(幻), 즉 가상(假相)으로 있고, 본질은 가상으로 현현할 수밖에 없는 공의 세계가 된다. 이 선시의 모순적 어법을 선시의 반상합도, 선시의 초월은유, 선시의 무한상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고 이 도식은 A=A??세계로 예증하였다.

결국 이 시는 ‘나’, ‘돌’, ‘연꽃’, ‘호수’라는 다른 네 개의 현상을 초극한 전체의 현상, 곧 육상의 총상(總相)으로서의 우주의식, 분별하여 얻은 지식의 차원을 뛰어넘는 경지를 읊고 있다. 이는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어법으로 얻어지는 절대세계의 불이법문이다.

이 시의 표현 방법은 선시에서 절대적으로 나타나는 ‘반상합도’의 시이며, A와 A??두 세계를 동시에 아우르며 내적인 속성을 초월하는 비유, 곧 ‘선시의 초월은유’와 자성이 무자성이므로 가능해지는 ‘선시의 무한상징’에 의한 표현방법이다.

서정주의 시는 시화하는 과정에서 선불교적인 초월은유, 무한상징, 반상합도의 표현방법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뺨 비비듯 결국은 그게 그거다
하늬바람 마파람 소소리바람
바람의 떼 못 떠나고 보채쌓는 건
뺨 비비듯 결국은 그게 그거다
― 〈무제〉에서

‘하늬바람=마파람=소소리바람=바람의 떼’는 《반야심경》에서 보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도리의 한 표현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사물은 결국 가상(假相)이니 본질인 공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본질 역시 가상으로 인해 가유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을 이 시는 고도의 무한상징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꿈에서 아조 깨어난 이가
비로서
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
향기의
꽃새벽의
옹달샘 속 금동아줄을
타고 올라 오면서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르네
― 〈고요〉에서

위의 시는 〈고요〉의 4연 중 마지막 연이다. 서정주는 1연과 2연에서 ‘고요만 지키는 이는 고요를 다 보지 못함’을 말하고, ‘고요에 집착하던 마음은 고요에 깔리던 꿈일 뿐이다’라고 진술하며 4연에 가서는 위의 예시와 같이 “이 꿈에서 아주 깨어난 사람만이 임 마중의 노래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른다.”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한계 지어진 갇힌 상황인, 곧 심층의 의식에서 벗어나 합도의 세계로 진입되는 환희심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도시다. 마지막 행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침묵으로 부르네”의 표현기법은 우리가 도식화한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반상합도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빼어난 시라고 불리어지는 〈동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움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

〈동천〉은 불과 다섯 행으로 이루어진 단련시이지만 매우 정교한 구조를 갖춘다. 우선 첫 행과 마지막 행이 음율상 4·4·5조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3행을 중심축으로 의미상 문장 구조상 대칭을 이룬다. 1행과 2행은 화자의 내면의 세계인 현실의 세계이고, 5행 6행은 객관화된 외면, 즉 천상의 세계이다. 1행과 2행의 시어도 ‘나’와 ‘님’, ‘눈섭’ ‘즈문밤’과 같이 현실과 지상의 세계이고 4행과 5행에 나타나는 시어 ‘나르는 새’로 대표되는 하늘의 세계다. 3행 “하늘에다 움기어 심어 놨더니”는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다.20)

이 시 역시 땅(A)/하늘(A?을 소통시키는 땅=하늘의 세계다. 곧 선시의 모순어법적 도식인 A=A??세계다. A와 A??해체와 소통에서 오는 광활한 상상의 실상세계이니 이 실상이야말로 우리의 정상화된 의식, 관습의 한계를 지우게 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미적인 정서에 충동을 준다.

김춘수의 시는 다분히 선적이라 할 수 있고 표현 방법 역시 선시적 수사법이 읽혀진다. 그러나 그는 불교를 한 번도 표방한 적이 없는 당대의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시(modernism) 시인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름해야 할 것은 불교와 선, 선과 불교의 관계다. 광의로는 선이 불교이고 불교가 선이지만, 불교를 떠나 선은 공기나 물과 같아서 어디든지 편재되어 있다. 교조적인 종교시는 현 문단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한 편의 선시는 종교를 떠나 좋은 현대시로 각광받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보아 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편의 좋은 현대시가 선시의 모순적 표현법을 알맞게 수사하는 예를 볼 수 있다.

毛髮을 날리며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고 섰다.
눈보라도 걷히고
저 멀리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人間의 여자가
誕生하는 것을 본다.
― 김춘수, 〈봄바다〉

위의 시는 시인이 ‘눈보라 걷힌 해변에서 모발을 날리며 봄바다를 바라고 서 있는/시인의 눈에는 물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탄생하는 것을 본다.’는 2연의 시로 읽을 수 있다.

1행과 3행에 해당하는 1연은 현실적 상황(A)이고 4행∼6행은 환시적 현상(A?이다. 특히 환시적 현상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바다란 이미지, 그리고 탄생의 여자가 어울려서 우리를 그윽한 환상의 세계로 몰아넣고, 또 1연에서 눈보라가 걷힌 해변, 모발을 날리며 바다를 바라고 서 있는 시인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1연과 2연은 현실을 반상(反常)하여 환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싱싱한 상상의 세계, A=A??세계로 우리를 밀어넣고 있다.

사과나무의 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綠陰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山茶花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 〈시(詩)Ⅲ〉

앞의 시 〈시(詩)Ⅲ〉에서 4행과 5행에서 우리는 충분히 선시의 모순적 어법을 읽을 수 있다. ‘작은 어항을 바다보다 더 큰 것’으로 노래하고 9행과 10행에서는 ‘사랑이 부러진 못이 되는’것은 A=A의 진술이 아니라, A=A??세계이다. 이것은 사물이 상호 회통함으로써 오는 합도의 세계다.

이 시는 일체물물을 낯선 이질물로 기형화함으로 오는 현대시의 난해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차별적 인식을 거부하는 선사상으로 따져 보면 ‘바다는 어항보다 작아서 그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부러진 못을 사랑으로 바꾸기도 하고 길바닥에 나뒹굴 수도 있다.’ 이런 표현은 선에서 말하는 자성(自性)이 무자성(無自性)일 때 가능하다.

하늘이 밍밍하다.
눈썹이 없다.
낯가리고 대낮에 半音 소리 내던
까만 겉눈썹도 젖은 눈시울도 이젠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까치가 다 쪼아 먹고
하늘에는 눈이 없다.
없는 것이 너무 많은 하늘이
남의 집 울타리에 하릴없이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다.
― 〈칸나〉

〈칸나〉의 1행과 2행은 천진한 안목을 가진 시인만이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의 진면목에 대한 표현이다. 정상화된 관습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때, 분명 “하늘이 밍밍하다./눈썹이 없다.”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것은 선시에서 말하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인 표현이다. 이어 3행∼5행에 노래하듯 사실 하늘엔 아무 것도 없다. 찡긋하던 눈썹도 젖은 눈시울도 없는 하늘. 너무나 명명백백한 시인의 응시이고 정상화를 깨뜨리는 두두물물의 본래적 입장(A=A)의 표현이다.

6행∼8행에서는 본래적 입장에서 더욱 심화된 사상적 표현이다. ‘하늘의 눈을 까치가 쪼아먹다.’에서 ‘산은 물이고 물이 산(山是水 水是山)’인 산은 물과 다르지 않고 물은 산과 다르지 않는 사물의 자성이 무자성인 세계, A??사상적 세계의 표현이다.

또 9행∼11행은 체험적 결과이니 ‘산 또한 산이고 물 역시 물(山亦是山 水亦是水)’이어서 ‘없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텅 빈 나는 하릴없이 남의 집 울타리에 다리나 걸친’ 사람, 무사한인(無事閒人). 이것이야말로 A=A??세계다.
결국 이 시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세계를 그리는 선시의 반상합도의 도식인 ‘A는 A가 아니므로 A다.’하는 A와 A??회감 융섭하는 A=A??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H₂O는 화학용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된다.
다섯 살 나던 해
주님 생일날 아침 나는
교회의 첨탑을 보았다.
첨탑에 꽃힌
은빛 커다란 십자가를 보았다.
거꾸로 매달린
종이천사를 보았다.
천사의 하얀 날개를 보고
천사의 오동통한 허벅지를 보았다.
한참 뒤 어느 날 꿈에 나는
교과서 밖으로 나온
H₂O를 보았다.
수소와 산소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잘 생긴 악기 같았다.
모자를 벗고 나는
누구에겐가 절을 했다. 나는 그때
열다섯 살,
중학2학년생이었다.
― 〈제6번 연가(戀歌)〉

이 〈제6번 연가(戀歌)〉는 연작시집 《비가(悲歌)》 중 여섯 번째의 노래이다. 연작시 《비가》는 모두 돌아가신 부인을 동기로 한다. 그러나 단지 개인적인 연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적인 연상의 범위를 벗어난 이 시는 우리들의 상상력에 또 다른 세계를 진입시킨다.

위의 시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지만, H₂O를 모티브로 한다. H₂O는 화학기호다. 이 화학기호는 과학 교재 안에서 존재한다. 이럴 때엔 산소와 수소로 분해되지만 어느 날 그의 꿈에서 화학기호인 H₂O가 산소와 수소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사물인 ‘물’로 존재하는, 분리되지 않는 실체를 본다. 이럴 때엔 꿈은 현실이고 현실 역시 꿈이다. 여기서 현실은 일반적인 현실이 아니라, 본질의 전량(全量)이 그대로 옮겨간 불이(不二)의 현실이니, ‘절대현재의 이 순간’일 때 우리는 이 시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다.

현실적이지 않는 세계의 물, H₂O는 산소와 수소로 분리되고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약속된 것이지만, 우리는 실재(實在)로 간단 단순하게 보이는 하나라는 것, 곧 ‘H₂O는 분리, 이별, 분해이고 고통과 슬픔(A)이며 물은 실제, 하나, 사랑이며 평화와 자유(A?’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7행과 8행에서 ‘거꾸로 매달린 종이천사(A)’는 분리되어 이별할 때를 형상화한 것이고, 16행에서 ‘잘 생긴 악기(A?’는 하나가 될 때, 우리가 함께 있을 때의 시적 형상화이다. 시인은 이별=분해=슬픔을 노래하고 또 그 반대편인 하나=실재=사랑을 시로 형상화하지만 그가 노리는 세계는 이별=하나=분해=실재=슬픔=사랑이 합일되는 A=A??세계다.

교과서 속에서 H₂와 O로 분해 분리되는 세계는 주관/객관으로 양변(兩邊)되어 소통되지 않는 A/A??세계며 불완전한 H₂/O의 세계다. 시인은 A=A??세계가 바로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세계, H₂와 O가 분해되지 않는 자유로운 실재의 세계라고 노래한다. 이런 수사법은 앞장에서 살펴본 선시의 모순적 어법인 반상합도와 초월은유, 무한상징과 상통하는 표현방법이지만 김춘수는 불교와 무관한 시인이다. 그러나 불교의 선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지혜의 비상은, 시인의 끝 닿지 않는 영혼의 상승은 충분히 선의 세계에 닿아 있음이 느껴진다. 이러한 김춘수는 방외(方外) 선사다.

3) 오세영과 이승훈

1960년대 전후하여 우리 시단을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해 보면 질과 양적으로 가장 많은 시인을 배출시킨 시기다. 이들 중 의미나 표현방식 면에서 전통적인 경향을 나타낸 오세영과 서구의 아방가르드적 시 쓰기에 침잠해 온 이승훈은 등단 후 지금까지 자기의 시적 영역을 꾸준히 넓혀온 시인이다.

전통적 기법에 의해 시작을 해온 오세영은 근대 이전의 시적 전통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통의 확대·발전·변용 또는 쇠퇴를 보여 준 우리 전통시의 흐름 속에 있다. 오세영은 김소월이나 청록파의 시 또는 서정주나 그 외 연구 대상이 되었던 낭만주의 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들여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21) 오세영은 전통적인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자연과 시적 교사를 찾고 수사법은 역시 전통적이며, 선적 수사법인 반상(反常)을 돌이켜 존재 근원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승훈은 서구의 모더니즘 수사법에 의한 아방가르드 시를 써왔으며 이상, 김춘수로 이어지는 현대시의 중진이다. 이러한 그는 시집 《인생(人生)》22)을 기점으로 선시의 모순적 어법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선적 사유를 현대화시키고 있다. 위의 시집은 여태까지 우리 시단이 보여준 고전적 전통의 선시와는 다른 새로운 선시의 기미를 읽어 낼 수 있는데, 필자는 이 시를 현대 선시라 명명한 적이 있다.23)

이승훈은 같은 시대인 60년대의 시인들이 전통적인 수사법에 의한 선취가 강한 시들을 발표할 때 꾸준히 서구의 쉬르 계열의 시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12번째 시집 《인생》에서 선적 취향이 짙은 선가풍의 시를 엮는다. 그는 이 시집을 기점으로 고전 선시와는 다른 새로운 선시를 선보인다. 현대시와 현대시 시론가로 잘 알려진 그가 일구어낸 새로운 선시, 곧 현대 선시를 만나보고자 한다.

한 방울의 이슬도
술이다.
그릇에 담겨서 타오르는
물,
한 송이의 꽃도
빵이다.
그릇에 담겨서 타오르는
흙,
지상의 식탁엔 수많은
그릇,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대는
神의 입맛은 쓰다.
닳아 오른 냄비는
열에 떠는데
세상은 화려한 잔칫상인데,
들끓는 그릇들의
꿈꾸는 우주.
들끓는 그릇들의
꿈꾸는 성찬,
― 오세영, 〈그릇·19〉

위의 시는 오세영의 연작시 중 〈그릇·19〉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색과 공의 관계다. 《반야심경》의 명구 “색불이공 공이불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연상되는 두두물물에서 본질을 바라보는, 본질에서 일체의 사물을 성찰하고 시화하고자 한다. 곧 ‘물질적 현상(色)과 본질(空)은 그 자체가 다르지 않고(色不異空)/본질의 순수함(空)이 모든 구체화된 현상(色)과 다르지 않으니(空不異色)/물질적 현상과 본질의 순수함이 바로 같으며(色卽是空)/본질의 순수함, 이것의 활성화가 바로 물질적 현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空卽是色).’라고 형상화하고 있다. 본질인 공의 형상화는 공이 색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본질이 바로 물질적 현상이고 물질적 현상이 바로 본질임을 밝히고 있다.

오세영의 위의 시에서 이슬=술, 꽃=빵, ‘그릇에 담긴 물=그릇이 된 타오르는 흙’은 모두 자성이 무자성일 때 가능한 표현이다. 이것은 앞의 선시의 모순적 어법에서 본 ‘A는 A가 아니므로 A다.’하는 A=A??도식이다. “지상의 식탁엔 수많은/그릇”은 바로 본질인 공을 형상화, 활성화하였을 때 물질적 현상인 색이 된다. 이 색이 그릇으로 상징된다.

위의 10행 “지상의 식탁엔 수많은/그릇,”은 본질의 형상화 활성화는 물질의 현상(그릇)을 말한다. 이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본질(空)은 바로 형상(色)이다.’라는 명구와 딱 포개어진다.

“세상은 화려한 잔칫상인데,/들끊는 그릇들의/꿈꾸는 우주./들끊는 그릇들의/꿈꾸는 성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가득 찬 화려한 잔칫상=들끓는 그릇=꿈꾸는 우주=꿈꾸는 성찬’과 같은 색=형상=그릇의 존재자가 갖는 고요와 하모니를 이룬 들끓고 있는 그릇(색)인 꿈꾸는 우주를 발견하게 된다. 우주는 비어 있으므로 가득 채워지는 그릇. 이런 역설적 구체물의 형상화야말로 시인의 놀라운 성찰이다.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아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 〈설날〉

우리는 앞장에서 선시의 모순적 어법이 사물의 근원인 자성본원에 도달하기 위한 고전 선시들을 예증하여 보았다. 예증된 선시에서 근원적인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선시의 반상합도, 선시의 초월은유, 선시의 무한상징으로 구분하여 그 표현방법을 고찰하여 보았다.

오세영은 선시의 모순적 어법을 통하여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탐구를 시적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의 시 〈설날〉 1연은 ‘텅 비어 있는 원’인 공, 삼라만상의 자성본원을 ‘설날’로 형상화한다.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백지’=설날=공=자성본원이 1연의 의미다. 2연에서는 순수함으로 가득 찬 충만이 백지이며 공이며 설날이다. 이것은 모순이나 진실이다. 앞장에서도 살핀 것과 같이 선시의 모순적 어법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조건을 규명하고자 하는 수사법이다.

8행과 9행에서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충만하다.”고 진술한다. 이 실증을 3연과 4연에서 ‘새해 새벽 눈에 덮힌 산과 들, 그리고 물물들, 저 침묵은 신의 마음이다.’라고 노래하고 이 신의 징표를 ‘새벽 순수의 흰 눈길 위에 우짖는 까치 한 마리’로 노래한다. 눈길(A)과 까치(A?를 배대하여 병치함으로써 서로의 이미지를 상충시켜 또 다른 세계를 첨가시킨다. 우리는 고전 선시의 예증에서 보아온 선시의 모순적 어법과 같음을 느낄 수 있다. 바로 A=A??세계다. ‘백지의 텅 빔’ 자체로 충만하다고 표현한 역설법은 모순을 통해 사물의 현상(충만)과 실재(백지, 본질) 사이에 괴리를 파헤치고 진리 당처를 드러내려 하고 있다. 그는 모순적 어법을 통해 사물의 본질과 인간이 가유함으로써 오는 존재의 불안을 찾고 있다.

연꽃 옆에 물고기 있고 물고기
옆에 게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거북이가 한 세상이네 거북이
옆에 개구리도 있네 바람자면
바람이 그대로 거북이 바람이
그대로 물고기 저 물고기 하늘
을 나는 물고기 연꽃과 연꽃
사이에 한 세상이 있네
― 이승훈, 〈연꽃 옆에〉

이 시는 그의 시집 《인생(人生)》, 자서에서 고백하듯이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를 돌고 돌아 인생 후미에 만난 불교와의 인연을 잔잔히 그려낸 일상사에 대한 깨침을 노래한 시다. 시집 《인생》에 수록된 65수는 모두 선미가 넘치는 선정신의 농축으로 이루어졌다.

위의 시 〈연꽃 옆에〉는 시공이 일탈된 선시의 수사기법인 무한상징으로 이루어진 화엄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 자체가 부분과 통일성 속에 존재해 있음이 아니라 찰나의 움직임, 부분과 부분 사이, 무한한 흐름 속에 흔적으로 존재해 있음을 보여 준다.

불교의 두 기둥은 실상설(實相說)과 연기설(緣起說)이다. 그러나 이 실상설과 연기설은 둘이 아니다. 이것을 선문에서는 불이(不二)라 한다. 이 불이법문에 따른다면, 시는 대상의 세계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시는 일법계(一法界), 공, 통일장, 화엄법계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시 자체는 대상만을 서술함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인은 대상의 총체적인 형상인 실상을 그릴 뿐만 아니라 흐름 속에 있는 상의성(相依性)이 주 내용인 연기설에도 집중해야 함을 알게 된다. 곧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선을 실상에만 둘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되는 상의성에 시선을 모으며 동시에 창망한 흐름 속에 실상을 통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적인 입장임을 앞장에서 살펴봤다.

이러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방적 형식(open form)의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 대상의 본질을 ‘존재’가 아니라 ‘과정’에서 둔다는, 곧 대상의 과정을 추구하며 대상의 총체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총체성이 바로 통일장, 공, 화엄법계이고 이 총체성에서 자발광(自發光)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자연성이며 자율성이고 개성이며 직접성이다. 매 순간 절대현재의 이 찰나에 충실한 삶. 바로 삶 자체가 찰나이고 찰나라는 가득찬 삶의 현실이다. 찰나의 연속은 행위의 연속이다.

그럼 이승훈의 위의 시는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에서 말하듯 절대적인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니 상주할 때는 파악할 수조차 없는 흔적을 노래한다. 일체만물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존재해 있는 물질과 물질, 그 사이의 세계를 시화한다. 저 화엄의 ‘이치가 춤추는 평등의 세계’(理法界), ‘하나와 많음이 부딪치지 않는 원융무애한 세계’(事法界), ‘이치와 사물이 서로 원융무애한 세계’(理事無碍法界), ‘가유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의 세계, 물물 사이의 흔적의 세계’(事事無碍法界)를 형상화하여 보여 주고 있다. 곧 이승훈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화엄법계로 정리되는 사이에 존재하는 ‘나’와 ‘너’라는 가유(假有)된 세계다.

이런 세계를 위의 시에서 “바람이 자면/바람이 그대로 거북이 바람이/그대로 물고기 저 물고기 하늘/을 나는 물고기 연꽃과 연꽃/사이에 한 세상 있네”라고 보여 주고 있다.

4
난 비누를 찾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비누이고 비누가 나이므로 우린 거품 속에 거품 속에 사라지고 사라짐이 존재입니다 시도 인생도 사랑도 사물도 이 책상도 저 책상도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연필도 비누입니다 언제나 사라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라질 때 있습니다 비누는 사라지며 시로 소신공양한다는 한 교수의 말이 좋습니다 그러나 시가 비누이고 시쓰기는 비누처럼 자아를 버리는 수행이고 연습이고 도 닦기입니다 목적도 기원도 없이 흘러가는 시! 과정으로서의 시! 無住의 시! 뿌리도 진리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 오오 마침내 시도 없는 시! 모두가 시인 시! 한 교수는 사라지면서 버리면서 시가 비누를 얻는다고 했지만 시도 언어도 삶도 비누입니다 비누는 공양을 모르고 공양을 합니다 우리는 비누가 되어야 합니다

5
이때부터 시 속의 비누는 시 밖의 비누이고 비누가 나이고 당신이고 비누는 비누가 아니고 비누이고 물이 아니고 물이고 비가 아니고 비이고 눈발이 아니고 눈발이고 배추가 되고 빛이 되고 피마자 씨앗이 되고 오이 열매가 됩니다 비누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습니다 아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비누는 비누가 아니고 비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비누는 空이고 不二입니다 한 교수 언제나 과정이 있고 이 과정은 과정이 아니고 과정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6
그러므로 비누는 손이 되고 물이 되고 싱크대가 되고 거울이 되고 한 교수 말처럼 안되는 것이 돌아서 되고 되는 것이 돌아서 안됩니다 비누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므로 아무 것이나 됩니다 배추가 아니므로 배추가 되고 가을 아침 햇살에 젖고 비누는 스펀지가 되어 비누를 삼키고 비누가 되어 스펀지를 짜준다는 한 교수 말이 좋습니다 그러나 비누는 모자를 잘 벗는 게 아니고 비누는 아첨을 모르고 고집을 모르고 물론 두꺼비도 잡아먹을 만큼 비누의 혓바닥은 미끄럽습니다 그러나 비누가 두꺼비이고 비누의 혓바닥은 미끄럽고 잡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한 교수 말처럼 淨化 儀式입니다 시인도 평론가도 교수도 정치인도 상인도 비누가 되어야 합니다 사라짐이 혁명이고 연꽃이 소멸입니다
― 〈비누에 대하여〉24)에서

위의 시는 이승훈의 최근 작품이다. 7연으로 된 산문시 중 1연, 2연, 3연과 마지막 7연을 생략하였다. 한 후배 문인의 서신에 답한 형식을 취한 시론시인 동시에 메타시(meta-poetry)다.

앞부분 1연은 답시를 쓰게 된 사연과 심정을, 2연에서는 《금강경》의 4구게 ‘무릇 존재하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는 것, 곧 자아에 자아가 없다는 것, 일체 두두물물은 환(幻)으로 있음을 노래했고, 3연에서 찰나에 언어는 존재하고 실재 자신에게 아무 것도 있지 않고 그때 그때 나오는 대로 글을 쓴다고 진술한다.

위의 시 〈비누에 대하여〉 4연 “난 비누를 찾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비누이고 비누가 나이므로 우린 거품 속에 사라지고 사라짐이 존재입니다 시도 인생도 사랑도 사물도 이 책상도 저 책상도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연필도 비누입니다 언제나 사라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라질 때 있습니다”에서 화자는 ‘비누를 찾아 떠난 적이 없다’고 진술한다. 이런 진술은 무아(無我)이고 무주(無住)일 때, 곧 자성이 무자성일 때 가능해진다. 무아이므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머무르지 않을 때 찾아 떠난 적이 없다는 문장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4연에서 ‘나=비누=시=인생=사랑=책상=연필’임을 노래하는 것이나 5연에 ‘나=너=눈발=배추=피마자 씨앗=오이열매’라고 노래하는 것은 일체의 존재가 각자 고유한 자성을 가지지 않았을 때만이 가능해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시 속의 비누는 시 밖의 비누이고 비누가 나이고 당신이고 비누는 비누가 아니고 비누이고 물이 아니고 물이고 비가 아니고 비이고 눈발이 아니고 눈발이고 배추가 되고 빛이 되고 피마자 씨앗이 되고 오이 열매가 됩니다”라고 한 5연의 시구는 바로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A=A?遮?선시의 모순적 어법의 도식이 성립될 때 가능해지는 시행이다. 화자는 일체의 존재물은 상호 의존해서 가유(假有)해 있을 뿐 무엇이라고 고정된 것이 없음을 노래한다.

6연에서는 대긍정의 세계 “비누는 손이 되고 물이 되고 싱크대가 되고 거울이 되고”에서와 같이 ‘있고’(有) ‘없음’(無)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非有非無)을 거쳐 ‘역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亦有亦無) 세계, 대긍정의 세계인 A=A??세계를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6연의 마지막 시구에서 “시인도 평론가도 교수도 정치인도 상인도 비누가 되어야 합니다 사라짐이 혁명이고 연꽃이 소멸입니다”라고 노래한다.

어제는 한양대 후문 한식집 1층에 앉아 술 마시고 오늘은 한양대 정문 일식집 3층 학에 앉아 술 마신다 어제는 국문과 사은회 오늘은 한양대 정문 일식집 3층 학에 앉아 술 마신다 어제는 국문과 사은회 오늘은 국문과 교수 망년회 어제는 비 오고 오늘은 해가 난다 물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왕십리엔 언제나 비가 오고 (그런 생각이고) 젊은 교수들과 술 마시는 겨울 오후 세 시 창가에 앉아 술 마시다 말고 겨울 해 내리는 왕십리를 본다 갑자기 왕십리가 따뜻하다 한양대 정문이 보이고 언덕 위 인문관이 보이고 인문관 4층 내 연구실도 보이네 아무래도 내가 산 속에 앉아 있나보다
― 〈학〉

이 시의 다음 구절 “어제는 국문과 사은회 오늘은 국문과 망년회 어제는 비 오고 오늘은 해가 난다”는 얼핏 ‘나귀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다가온다.’라는 공안이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삶의 단면은 ‘텅 빈 거울’에 비추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온통 유리로 된 구슬이라서 마치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리면 그려지는 동시에 없어지는 풍광이다. 화자는 물론 비가 오지 않았음을 진술하지만 비가 와도 마찬가지다.

화자는 일상을 흘끗 보다가 돌연히 삶을 돌아본다. “겨울 오후 세 시 창가에 앉아 술 마시다 말고 겨울 해 내리는 왕십리를 본다 갑자기 왕십리가 따뜻하다”고 진술한다. 일상에 대한 성찰이 잔잔히 우러나오고 있다. 그럼 그런 일상사의 깨침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한양대 정문이 보이고 언덕 위 인문관이 보이고 인문관 4층 내 연구실도 보이네 아무래도 내가 산 속에 앉아 있나보다”
화자는 ‘학’이 된다. 훨훨 날아만 가는 학이 된다.
이것은 자성이 무자성임을 확연히 깨칠 때만이 다가오는 대자유다.

4) 조정권과 황지우
80년대 전반기에 보수적인 문법을 해체하여 시의 내적 형식까지 실험을 확대한 일군의 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선시의 모순적 어법이 갖고 있는 독특한 수사법과 표현방법에 주목을 하게 된다. 이들 중 황지우는 선시적 모더니티를 보여 주고 조정권은 전통적인 수사법에 의거하여 선적인 세계를 그려 내고 있다.

늦저녁 空山에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밤 깊자 온 산을 울리네.
굵은 밤이슬 어둠 속에 내리는데
귀먹은 당나귀 그 소리 듣고
山으로 가네.
아, 온 山이 불이 붙었네.
― 조정권, 〈송(頌)〉

이 시는 고전선시를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송(頌)〉은 선불교의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하는데 ‘늘지도 줄지도 않는(不增不減)’ 원리를 표출하고 있다.

“공산에 떨어지는 솔방울 소리”가 밤이 깊자 온 산을 진동한다. 이것은 《반야심경》의 도리에 비추어 보면 가유해 있는 현상적 사물과 내재된 무자성의 원질성이 부증불감되어지는 원리와 같다. 본래 사물의 자성은 줄지도 늘지도 않으며 변함이 없고 총체적으로 한결 같다. 위의 시에서 ‘고요’를 노래하는데 얼마나 고요한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 고요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들려 산을 진동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당나귀는 귀먹고 그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산을 가고 얼마나 요란한지 온 산이 불이 붙은 듯하여 물물들이 저마다 깨어나 요동친다. 고요를 시끄러움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靜)/동(動)에서 무엇이 줄고 무엇이 늘었는가. ‘고요’ 전량이 ‘움직임’이고 ‘시끄러움’ 전량이 상호 변환하여 부증불감이다. 곧 정(A)/동(A?이 그대로 소통되어 정=동에서 오는 다른 수승한 세계이니 선시의 모순적 어법의 표현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승화된다. 이런 세계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A=A??세계다.

이끼 젖은 石燈 위로 기어오르는 법당다람쥐들 한가롭고
마당의 꽃 그림자 한가로이 창 앞에서 흔들린다.
모시 발은 앞과 뒤가 모두 공해서
푸른 산빛 맑은 바람 서로 깨친다.
― 〈한하(閑夏)〉

위의 시는 우리 나라 전통 고전 선시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1행은 ‘석등 위로 기어오르는 다람쥐’를 그렸고, 2행은 ‘한가로운 꽃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모두가 한가로움과 고요 속으로 스며든 정경이다. 그리고 3행은 1행과 2행의 정지된 듯한 고요를 “모시발은 앞과 뒤가 모두 공해서”에 읽히듯이 일체 만물의 공함, 곧 자성이 무자성인 선시의 도식 A=A??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4행에서는 시인이 성찰한 지혜를 “푸른 산빛 맑은 바람 서로 깨친다.”로 그려내고 있다. 이 마지막 행은 선시의 반상합도적인 세계의 형상화로 읽혀진다.

게 눈 속에 연꽃이 없었다
보광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연기를 피워 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2〉에서

황지우의 이 시는 메마른 서정과 풍경을 보여 준다. “게 눈 속의 연꽃은 없었다.”는 첫 행부터 역설적인 모순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곧 게 눈 속의 연꽃은 당초부터 없는데 화자는 ‘있다’는 고정된 생각을 깔고 정상화하여 시를 쓰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환영과 가유(假有)를 좇는다. 여기서 게는 현대인을 상징하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연꽃은 게의 눈에 비친 환영의 존재다. 환영의 존재는 가유로 있게 된다. 이것을 화자는 4행에서 “게가 뻐끔뻐끔 담배연기를 피워 올렸다.”로 형상화하고 있고, “눈 속에 들어 갈 수 없는 연꽃을/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로 표현했다. 잡을 수 없지만 볼 수 있는 착각과 환영을 쫓는 허망함, 황지우는 이것을 시화하고 있다.

황지우의 위의 시 역시 A=A??표현되어지는 〈게 눈 속의 연꽃〉은 정상을 벗어나는 선시의 모순적 어법인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황지우의 이러한 선시의 모순어법은 그의 시집 《게 눈 속의 연꽃》25)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꺼내가라
― 〈게 눈 속의 연꽃 1〉에서

알루미늄板 바다에
미끼만 채가는 물고기가 있다
이놈을 어떻게 잡을꼬
― 〈미끼만 채가는 물고기〉에서

자, 이놈을 어떻게 깨워내
사막을 다 건너기 전
낙타에게 한 消息, 전할꼬
― 〈허수아비 - 우체통〉에서

가볍게 뽑아도 많이 표집된다. 위 예시에서 ‘돌 속에 없는 불’을 꺼내고, ‘알루미늄판으로 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듣지 못하는 낙타’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반어적인 모순 어법의 표현은 바로 선시의 초월은유, 무한상징의 수사법에 속한다. 이런 반상(反常)에 의한 합도의 세계는 우리를 선정적 상상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내가 山寺의 저녁 나무를 보고 있을 때
렉싱톤 80번가 신호등 앞에서 로빈슨 부인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아주 먼 耳鳴 소리를 내는 생.
개 줄을 잡고 끌려가는 노인; 목동의 근린공원 숲에는
나무 아래로만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다.
도쿄에서도 주가 폭락이 있었다.
안데스 천문 관측소 망원경은 그때 쯤 열리기 시작했다.
그 모두가 생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自由路 철새 도래지에는 두 번 다시 새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 〈등우량선(等雨量線) 4〉에서

위의 시 〈등우량선(等雨量線)〉은 총 69행이나 되는 비교적 장시이다. 등우량선은 고기압과 저기압이 부딪쳐 장마전선을 형성하는 기상용어다. 시인이 이 시에서 가리키는 ‘등우량선’은 동시다발적인 우리의 생각이 비의 장마전선 같이 전 시간, 전 공간에 형성하고 있음을 그리고자 한다.

“내가 산사의 저녁 나무를 보고 있을 때/렉싱톤 80번가 신호등 앞에서 로빈슨 부인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나 “개 줄을 잡고 끌려가는 노인”이 한국 목동 근린공원 숲에서 같은 시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곧 “나무 아래로 날아다니는 새”가 있고, “도쿄에서도 주가 폭락이 있었다.” 하략된 58행에 이어지는 시행들도 한결같이 같은 사념의 세계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이에 일어나는 실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실재로 일어나는 세계가 바로 사념의 세계이다. 자성이 무자성의 세계, 이것은 선을 형상화 교리화한 화엄의 법계다. 일체의 세계가 거듭거듭 다 함이 없는 동시성이며 무공간적이다. 곧 《화엄경》에서 설하는 화엄무애법계의 소식을 시화하고 있다. 세계는 만각의 프리즘 속에 완두콩 한 알과 같이 서로 마주보는 즉시성(卽時性), 상즉상입(相卽相入) 되어지는 세계에 대한 시화라 생각된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역시 A=A??표현되어지는 세계다.

5. 끝맺는 말

앞장에서 논의하였듯이 선시를 읽는 데 느끼는 우리의 당혹감은 선의 사상을 표현하는 모순적 어법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모든 사물을 정상(定相)으로 보는 분별 간택심을 무너뜨리고, 선사들은 공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으로 예를 들어 실제하고 있는 일체의 존재가 상호 의존되어 있을 뿐 실상은 자성이 없는 무자성을 자성으로 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저 너머 있는 자성과 무자성의 세계를 불이세계, 공의 세계라고 선가에서는 지칭하고 있음도 파악된다. 이런 사상을 근저로 하여 형상화된 시가 선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이런 차별성을 정상으로 보는 고정된 관념을 깨기 위해 선시의 표현 방법은 언어를 비틀고, 기상천외의 반동일성적인 초월은유를 사용하며, 중중무진한 끝없는 상징을 펼치고 있음을 고전 선시로 예증하여 보았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모순적인 어법을 통하여서만 가능함도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의 진각 혜심, 백운 경한, 나옹 혜근과 조선의 청허 휴정, 소요 태능, 청매 인오, 무경 고송, 만경 영안의 선시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그리고 현대를 산 효봉 원명, 서옹 상순의 선시도 아울러 고찰하였다. 우리는 고전 선시를 읽는 동안 위에서 밝힌 모순적 어법으로 나타내어지는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상징 그 외에 절연, 단순, 명징, 당혹과 같은 선시의 특징을 자연히 도출해 낼 수 있다.

특히 수사학상 역설, 은유, 상징의 어법인 ‘A는 A가 아니므로 A다’. 즉 A=A??도식은 거의 고전 선시나 현대 선시에 일관되는 표현법임이 파악된다.

시대의 요청으로 시의 본류가 한글로 쓰여지기 시작되면서, 선사인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沈默)》(1926)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현금까지 많은 평자로부터 군계일학의 평을 듣는다. 우리가 앞장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한용운 역시, 역설적인 기법으로 반상하여 합도한 선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였다. 선의 증도가라는 평자의 주장도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대로 분류되는 이상은 서구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를 발표하여 현대시의 기념비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어지는데, 이 시인 역시 몇 편의 시를 분석해본 결과 도처에서 우리가 연구해온 선시의 모순적 어법이 사용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의 대상이 외경이 아닌 정신 속, 의식 혹은 무의식을 그리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표현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많은 서구의 현대시인이나 시론가도 동양의 선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소화 흡수했다고 본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서정주와 서구적인 기법으로 작시한 무의미 시에 천착했던 김춘수, 그리고 다음 세대에 속하는 이승훈과 오세영의 시적 표현방법과 조정권, 황지우 시에서 선시의 모순적 어법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간추려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전통적인 선시의 표현법 내지 그 사상이 우리 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오늘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시인의 시를 예증하며 이 글의 결론을 맺기로 한다.

우리 육체의 집을 지어도 그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마음의 집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위 마음의 집을 찾아가도 그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가 집이라 머무르는 그곳도 제집을 찾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 이성복, 〈집〉26)

위 작품은 화엄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형상화한 시로 생각된다. 제2연의 “우리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는 모순적 어법인 반상합도의 표현법을 써서 우리를 공(空)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익사자는 북어처럼 금세 뻣뻣해져서 강물 밖으로 끌려나온다. 수영복을 입은 유원지의 마네킹 300여명 가량이 갑자기 물에 예배하는 엄숙한 자세로 서서 번뜩이는 강을 바라보는 지금은 오후 3시 17분 59초. 산중턱 무덤지기 돌말[馬]은 툭 불거진 돌멩이 눈으로 파라솔 색색인 유원지를 굽어보며 벙어리 말울음을 운다. 누가 선그라스를 깨뜨린다. 뜨거운 자갈들이 노른자도 없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품었다.
― 최승호, 〈초현실적인 유원지〉27)

도시주의에 속한다고 분류되는 최승호의 작품에도 “산중턱 무덤지기 돌말은 툭 불거진 돌멩이 눈으로”, “유원지를 굽어보며 벙어리 말울음 운다.”라든지, 마지막 행의 “누가 선그라스를 깨뜨린다.”, “뜨거운 자갈들이 노란자도 없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품었다.”라고 한 시행들은 표현법에서 어딘지 모르게 선시와 많이 닮아 있다. 번뇌와 갈등을 선시와 같이 승화시켜지지 않음은 선의 도리와 거리감이 있으나, 돌발적이고 우연한 것 같은 이미지의 연결로 사회를 비판, 풍자하는 시각은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안겨 주기에 족하다. 이런 모순 어법적 수사는 다분히 선시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표집해 본 결과, 오늘날 현대시를 작시하는 시인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선시 표현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

A=A??상통하는 세계는 자성이 없는 무한 가변성의 세계다. 때문에 선사상과 오늘날의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들과 같은 표현 방법을 공유하게 된다. 사상적으로 선과 관계가 소원한 현금의 시가 선시와 내적으로 은밀히 동행하게 되는 근본은 고정관념이 정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같이 이탈하는 데서 연유한다. 이것은 당대에 살고 있는 시인들이 무자성이란 개념을 어찌 생각하든 현실에서 분별하여 보는 사물이 무자성이라고 보는 공통성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세계를 재창조하지만 동시에 한정되고 갇혀 있는 존재다. 이러한 것에 민감하고 선도적인 시인들은 더욱더 갈망한다. 그것은 자신을 해체하고 재창조하는 시세계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선에서 견성성불이란 말도 결국 해탈을 의미한다.

끝으로 필자가 밝혀 왔듯이 A=A??무한 가변성의 세계다. A=A의 정상논리는 그것을 정상으로 하고 있는 기존세계에 대한 얽매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만, A=A??세계는 무한 설정, 무한 재창조를 할 수 있는 대화합, 대자유의 세계다. 따라서 선적 정신의 세계관의 표현 방법과 서구의 모더니즘 표현방법은 새로운 대륙의 첨가를 지향하는 시인과 선의 원천회귀성과는 같은 세계를 지향하므로, 표현선상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출처 : 굴뚝새 시인
글쓴이 : 심은섭<굴뚝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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