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권혁웅 시인의 시 모음(6편)

시치 2007. 7. 20. 19:24
권혁웅 시인의 시 모음 (6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지문 / 권혁웅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왕십리 / 권혁웅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과금별납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외도가 지나쳤다,라고 목월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발병이 날지도 모르지만

 

 

 

                 

                                                                                      

 

서울시 신림동 산77 성 김복례의 하루 / 권혁웅

 

1

 

 부엌 지붕 새로 스며든 빗물이 판자를 휘어놓았다 식기들이 비스듬히 걸터앉아 아침햇살에 이 빠진 웃음을 웃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구를 계산하는 그릇들도 이 집 식솔들이다

 

2

 

 지나는 곳마다 고개턱이어서 길들도 한숨을 부려놓는 곳 그 길을 091021-2023527 김복례 할머니가 오른다 마을의 수도꼭지들이 할머니를 따라 쇳물을 쿨럭거린다 소리의 음계를 밟으며 할머니 길을 오르신다

 

3

 

 이곳에 시멘트 숲이 얼기설기 솟았을 때 김복례 할머니가 왔다 고려 때도 고려장은 없었다는데 자식들은 끈 떨어진 구슬처럼 흩어졌다 아니 구슬이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저녁마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대고 걸레 잡은 손을 휘휘 젓는다 아무도 못 보게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4

 

 산 아래는 지금 영구 임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포크레인은 술 취한 애비를 닮았다 마구 가산을 부수어 놓는다 레미콘이 임신한 여인네처럼 뒤뚱거리며 뒤를 따라온다 흙발로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뛰어 다니는 트럭들....시끄러운 이웃이다

 

5

 

 

 바람만 따라오던 넌출 가로등 돌아가고 건너편 산등성이 불빛들도 까무룩 조는 초여름 저녁, 김복례 할머니 형광등 값을 아끼려 일찍 자리에 든다 벌써 눕느냐고 칭얼대며 은초롱꽃들이 등을 켜들고 슬레이트 처마 아래를 들여다본다

 

6

 

 야채나 생선차도 이곳엔 들르지 않는다 해서 이곳엔 기다림이 없다 그저 마른 방구들 풀썩이며 노는 먼지들뿐이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에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빛의 고딕 성당 서울시 신림동 산 77번지, 거기 김복례 할머니가 산다

 

     

애마부인 약사(略史) / 권혁웅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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