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4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시치 2024. 1. 31. 18:00

2024,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2024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심사평"세대의 물음,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신춘문예 당선 시에 적용 가능한 불문율이 있다. 지나치게 길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욕이나 비속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불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가 김유수의 'take' 외 4편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불문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유수의 시들은 길고, 욕이 나오고, 삐딱했다. 이른바 '신춘문예용' 시와는 거리가 있었다. 원고를 옆으로 미뤄 뒀다가 앞으로 당겨와 읽기를 반복했다. 정공법으로 튼튼히 지어 올렸으나 창문 하나 열어놓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갑갑한 시들 사이에서 김유수의 시는 시원했다. 펄럭였다.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궁금하게 했다.

마음과 생활이 바닥나서 남의 집 담장이 누울 자리로 보이는 일상의 일대를, 죽음이라는 막연한 일엔 쏟을 힘조차 없으면서도 친구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장례의 한복판을, 시간의 타들어 감을, 실험용 쥐가 머물던 투명한 상자와 같은 기억을 통과해 마침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결론의 발단에 도달하도록 짜인 김유수의 ‘몽타주’는 힘 있고 개성적이었다.

당선작인 'take'는 '그것'이라는 대명사의 활용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넓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것의 자리에 대신 삽입할 수 있는 '그것들'을 생각할수록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는 걸까"라는 세대의 물음이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유수의 시와 함께 마지막까지 거론된 이영서, 최기현의 시들에 관해서도 덧붙인다. 두 분의 시 역시 각자의 개성으로 고유했다. 올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지면에서든 곧 만날 수 있으리라 믿음을 주는 시들이었다. 이영서의 시는 담담했다. 진술과 묘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인상적인 서사를 구축할 줄 알았다. 여름-새-활주로-아스팔트-옥수수-아이들로 스멀스멀 전개되는 최기현의 표제작은 팽팽한 긴장감이 매력적이었다. 시가 뉘앙스만으로도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믿음직했다. 보통 마지막까지 경합하다 낙선하게 된 작품들에는 아쉬운 소리가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적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우리는 '시의 홀가분함'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로 했다는 것을 밝힌다.

더 많은 독자가 김유수의 시들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에 기쁨을 느낀다. 어느 지면에선가 김유수의 '담장과 바닥'을, '친구 없는 삶'을, '쥐 소탕 작전'을, '결론이 구려서'를 만나게 된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신춘문예의 불문율로 시작했으니, 다시 그것과 관련된 말로 끝맺으려 한다. 시인은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심사위원 김현(대표 집필) 박상수 이수명

 

당선소감"덫이 날 빠뜨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벽 앞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뻔한 비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다. 벽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시를 쓸 때 그랬고 아닐 때도 그랬다. 약력에 쓸 것을 남기지 못한 나의 20대는 막다른 길을 거듭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길을 가로막는 벽 앞에 설 때마다 나의 힘은 항상 부족했더랬다. 이를테면 등단과 미등단 사이의 벽이 그랬다. 그럼 나는 지금 힘을 키워 벽 하나를 뛰어넘은 걸까? 정말 기쁘지만 그렇지 않다. 죄송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말을 하나 싶다. 배부른 소리 말라고 혼내실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여전히 벽이 있겠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겠다.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어쩌면 시를 쓸 때마다 그러한 실패의 확인과 응시를 반복할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무력감을 앞으로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을까? 스스로 질문한다. 그리고 변변찮은 대답을 내놓는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겠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꺼내 읽겠다. 거기에 나의 길이 적혀 있겠다. 벽 너머에는 네가 있겠다. 그런 믿음으로 벽을 응시하겠다.

네가 있어 감사하다는 말이 영원히 부족하겠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너라고 불러본다. 금은돌 시인과 김승일 시인. 너라고 불러본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너라고 불러본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것을 자주 상기하는 내가 되겠다. 하지만 내가 없는 곳에 네가 있음을 볼 줄 아는 내가 되겠다.

너는 지금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중이겠지? 하지만 때로는 너를 덫이라 부르고 싶기도 하겠다. 혹여나 덫이 나를 빠트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1998년 경기 안성 출생△양업고등학교 졸업

...............................................................................................................................

 

202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기 있다/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심사평밖으로 내몰린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믿음이여기 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세밑을 지나며 지난 한 해를 가만히 돌아본다.유독 버겁고 힘겨웠던 한 해였음을 신춘문예 시 응모작들을 읽으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와 포스트휴먼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는 작년에 이어 여전히 강세를 보였지만 눈에 띄는 새로운 경향으로는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아졌음을 언급해야겠다.전세사기나 택배 노동,청년 문제 등을 다룬 시의 출현은 현실의 고단함이 여전히 시의 동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시를 읽고 쓰는 시간이 출구 없는 막막한 일상을 견디는 데 작은 버팀목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응모작들 중 눈에 띄는 네 명의 작품을 두고 오랜 토론이 이어졌다.논의의 장에 올라온 시들은해파리와 사랑4, ‘수목4, ‘서빈백사4, ‘여기 있다4편이었다.각자의 시적 개성이 뚜렷하고 장점이 분명한 시들이었다.머지않아 이분들의 시를 지면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해파리와 사랑4편은 목소리의 색깔과 태도가 분명한 점이 매력적이었다.개성적인 목소리라는 점에서 매혹적인 면이 있었으나 응모작들의 결이 유사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수목4편은 마지막까지 거론된 응모작들 중 젊은 감각으로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었다.상실의 경험과 애도의 감각을 그린수목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준도시의 두 블록을 태연히 돌아 나왔다두 편 모두 인상 깊었다. ‘서빈백사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시였다.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고심을 거듭했다.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마지막 두 연이 없었다면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응모작들 간에 편차가 있는 점도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세 분의 시는 당장 지면에 발표되어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들이었다.실망하지 말고 정진해서 조만간 지면에서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작으로 최종 선택된여기 있다는 투명인간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생활의 감각으로 어떻게 변용해 시적인 순간을 발명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사라짐을 노래한 시는 많았지만,당선작은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나는 투명인간이라는 선언을 통해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어디에나 있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음을 담담히 보여주었다.이 시의 고요한 단단함을 심사위원들은 믿어보기로 했다.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처럼 시도 그렇게여기에 있음을 믿어보고 싶게 하는 시였다.함께 보내온 응모작들 중물사람일요일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응모작들이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오래 시를 써온 사람의 내공이 느껴졌다.새로운 시인의 출발을 함께 기뻐하며,시를 읽고 쓰는 고통의 시간에 차오르는 즐거움을 전해준 응모자들에게도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건넨다.


심사위원:송경동 이경수 진은영 황인숙



당선소감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 '일용할 양식'이 되는 그날까지/맹재범


사골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뺍니다. 팔팔 끓는 물에 사골을 담그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불순물들이 올라옵니다. 밑이 넓은 국자로 기름과 불순물들을 건져내며 오래오래 육수를 우려냅니다. 뽀얀 육수가 올라올 때까지 불 앞에 오래 머무릅니다.

제가 그 과정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 따뜻한 한 끼가 되려 합니다. 새벽과 저녁이 익숙한 모든 사람이 제 은인입니다.내 안에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름을 부르기도 미안한 친구들과 선생님, 아버님, 어머님, 가족들 너무 많은 고마움을 떼어먹으며 버텨온 것 같습니다.나의 사랑하는 사람 영희, 우리가 늘 하는 농담처럼 꼭 갚아줄게!엄마,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음을 말하고 싶어.너무 뛰어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데, 천국의 제일 목 좋은 자리에서 길게 늘어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을 아빠, 아빠 옆에는 충무떡볶이 할머니랑 인제약국 아저씨랑 홍어아저씨랑 이모랑 큰아버지랑 대웅이랑 다 있겠지요? 늘 아빠 산소 앞에 가서 서글퍼하다만 와서 죄송해요. 이번엔 아빠 산소에 예쁜 꽃이랑 좋은 술 사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끄러움 말곤 자랑할 게 없는 저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맹재범 / 1978년 출생.

...............................................................................................................................

 

 

2024,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웰빙/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당선소감 - “모두에 감사… 지금보다 나은 모습 보일 것”

 

나는 될 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이 문장까지만 쓰고 많은 문장들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대개의 시 쓰기와 다르지 않다. 최선의 문장을 선택했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문장이 있을 거란 망설임. 어쩌면 위 문장이 이미 완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그것이 등단이든, 인생의 어떤 성취이든, 혹은 말 그대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든 상관없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어떤 기분이든 우리 앞에 나타나는 법이니까.

그러니 할 일을 하자. 글을 쓰고 삶을 살고, 불행과 행복을 반복하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던 것과 달리, 할 일이 있었고, 할 일을 다 마친 다음에는 완만한 기쁨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겠지. 어떤 일은 기쁘고, 어떤 일은 슬플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일들은, 감정은 흐르고 있다. 무엇도 어떤 것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다만 희망과 예감을 노 대신 저어가며 우리는 흐름을 견뎌야겠지.

좋은 시를 쓰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과라고 여기고 싶진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척 불안하다.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내 잘함이 과연 잘한 게 맞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일단은 나아가야 고, 그것이 내게는 시인 것뿐이므로. 그래서 나는 내가 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가족과 친지들, 선생님들, 그리고 모자란 내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분들까지. 감사해야 할 분들이 그득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지금보다 나아진 나여야 할 것이고,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을 박차는 힘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그 힘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겠다. 모두에게 온전한 감사를 담아, 좋은 시를 쓸 것이다.

한백양: 1986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개인 교습.

 

 

◆심사평 - 안도현·유성호 “일상과 불화·화해하는 아이러니 잘 담아내”

시 부문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잘 조직된 언어적 매무새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최종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은유씨의 ‘바깥공상’과 한백양씨의 ‘웰빙’이었다. 결과적으로 시상의 완결성과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참작하여 ‘웰빙’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바깥공상’은 방 안에서 상상해 보는 바깥의 세상을 얼룩과 이불이라는 소재로써 개성적으로 풀어낸 가편이었다. 민활한 심리적 움직임을 단정한 흐름 속에서 명민하게 포착하고 서술한 면이 돋보였다. 선정하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웰빙’은 스스로의 일상과 때로 불화하고 때로 화해하는 심리적 교차점을 잘 그려냈다. 존재론적 확장을 희망하는 마음이 선연하게 형상화되었으며, 그러한 희망을 때로 억압하고 때로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잘 담아냈다. 삶의 아이러니를 긴 호흡으로 구성해 가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웰빙 아닌 웰빙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좀 더 누군가에게 잘하고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면서 진짜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희망앓이를 하는 마음이 잘 나타났다. 앞으로도 서정성과 일상성을 잘 결속하여 구체성 있는 삶의 서사를 잘 온축해 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필치와 시상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드러낸 시편들이 많았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왼편/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당선소감】두렵기 때문에 앞으로도 쓰고 또 쓰며 살아갈 것이다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나는 늘 기대를 저버리는 편이었다. 비록 운 좋게 내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좋은 시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시들이 있다. 심사위원분들의 날카로운 관점과 별도로 응모한 다른 분들의 모든 시 또한 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는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써야 할 것이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늘 두려워하며 살 것이고, 또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 감사한 모든 분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은사님들과 심사위원분들을 호명해야겠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될까봐 무섭다. 그러지 않으려면 결국은 시를 써야 할 것이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시를 쓰면서 살아갈 것이다. 뭔가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일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재주 없는 인간인지라 오랫동안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좋은 일들이 올 수도, 또 나쁜 일이 올 수도 있겠지. 뭐 어떤가. 적어도 나는 그러려고 사는 것이다. 그러려고 쓰는 것이다. 딱 하나 욕심이 있다면 한 가지, 다시 한 번 시를 통해 독자분들과 만나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시를 쓰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한백양/전남 여수시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일상적인 장면을 사유화 이미지로 벼리는 솜씨 탁월

 

전반적으로 올해 신춘문예 투고 편 수가 늘었다는 말이 들린다. 최근 들어 시집 가판대가 부활하고 각급 단위에서 시를 읽고 쓰는 모임이 다시 활성화됐다고도 한다.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시 읽기를 즐기고 시를 쓰는 것에서 어떤 보람을 느끼는 것 역시 노력과 수고를 요청하는 어떤 밀도와 깊이에 기반할 때 좀 더 매혹적으로 삶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사위원들은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밀도가 고르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현상을 꼽을 수 있겠다. 소소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스케치하는 경쾌함은 있지만 부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 그럴듯한 분위기는 조성하고 있지만 알맹이가 없고 장황한 경우, 문장을 만들고 행과 연을 꾸미는기술은 있지만 단 한 줄에도 시적 진술의 맛과 힘이 담기지 않은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런 난맥 가운데서도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네 편이었다. ‘그 이후’의 일부 문장들은 흥미롭게 읽히지만 전체적으로 시가 유기적으로 구성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컨베이어 벨트와 개’는 일상의 고단함속에서 언뜻 발견하는 휴지와 파국을 실감 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 소품으로 보인다. 최종 경쟁작 중 하나였던 ‘수몰’은 삶과 죽음, 시와 현실을 얽는 솜씨가 돋보였고 이미지 구사도 견실했지만 주제를 장악하는 사유의 힘이 아쉬웠다. 심사위원들이 ‘왼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문제적 현장으로 벼리어 내미는 솜씨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핍진하게 전개되는 사려 깊은 성찰이 마지막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더욱이 투고된 다른 시편들도 편차가 적어 신뢰를 더한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악수를 건넨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24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벽/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당선 소감 넌 시인의 이름을 가졌어그 한마디가 나를 지켰다

 

선생님은 나에게 시인의 이름을 가졌다고 했다. 그 기억은 각별하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던 것 같지.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기도 했으나, 시를 쓰는 나를 불안으로부터 지켜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시인이 된 내가 있다. 이게 나의 대답이에요. 그동안 나는 매번 다른 이름이 되어서 다른 시를 썼고, 그 사이에 선생님은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본 적 없는 것 같다.

 

아주 희박한 관성이 나를 움직인다고 느낀다. 21세기에 시를 쓴다는 것. 사랑 없는 세계에서도 아직도 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현실을 호도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시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믿고 싶기도 하다. 세계가 돌아가는 논리. 나의 관성. 그건 가장 가까이 있는 거라고.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지. 애호박을 살지, 상추를 살지. 그 정도에 그치는 거야. 나의 시는 멀지 않은 징조가 좋겠다. 그건 모두의 이름 같은 거다. 나를 지켜준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나의 이름이었으니까. 당선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기쁘고도 충만하다. 이제 나는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해야지.

 

대학 강단에서는 법을 가르치지만, 나에게는 법 대신 사랑을 가르쳐준 아빠. 그리고 나를 믿어주던 우리 엄마. 오빠. 모든 가족.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항상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주는 윤채. 또 금지야, 너와 함께 뜨던 뜨개실이 지금의 나를 완성한 것 같다. 수연, 시현. 언제나 내 고향이 되어주는 친구들. 그리고 승현, 우리, 서윤. 지금 우리 모두 다른 걸 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영원히 문연자의 새벽에 남아 있어. 너희가 있어 글과 함께한 기억은 기쁘고도 애틋해. 기쁜 소식은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소중한 서인, 선민, 정우. 나에게 시인의 이름을 붙여주었던 박정원 선생님. 그리고 이승하 선생님, 김근 선생님, 이수명 선생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드립니다. , 이곳에 다 담지 못한 나의 소중한 이름들에게. 지키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다. 나는 계속 쓸게요.

 

추성은-1999년 출생-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감각·사유·언어를 오가며 빚어낸 미래의 시인

 

시는 긴장이고 충돌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새로운 시는 안전이나 완전과는 멀리 있다. 뛰어난 시는 지금-여기에서 저기-너머를 꿈꾸게 한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열두 분의 작품 중 세 분의 작품을 대상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졸업2편은 거침없이 활달하다. 젊은 세대의 구어적 말맛과 비약적 대화를 극대화하여 시적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경쾌함이 겨냥하는 것이 불분명할 때가 잦아 맥이 풀리기도 한다.

 

무인 가게5편은 절제된 안정감이 돋보였다. ()과 담(), ()과 곡()을 살려 시를 의미화하고 전경화하는 재능은 시인으로서 큰 자산이다. 시대적 징후를 잘 포착한 무인 가게는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단지 다른 시편들에서 보여준 설명적 부분을 덜어내고 특유의 응집력으로 시적 개성을 확보하기를 권한다.

 

추성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한다. 감각, 사유, 언어라는 시의 세 꼭짓점을 오가며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시의 안쪽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당선작 은 녹록하지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일(秀逸)한 작품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혹은 조류 충돌의 새에게 사람 사는 곳이란 온통 부딪힐 수밖에 없는, 차단된, 차가운 벽이다. 그러니 의 선택지는 진화하거나 깨져 죽거나, ‘안에서 옥수수를 받아먹으며 길들거나 창의 바깥으로 넘어서거나, 숱한 새 아닌 새가 되거나 진짜 새가 되거나일 것이다. 비단 새뿐이겠는가. 이 시가 반문명과 비인간을 지향하는 시로 읽히는 대목이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우리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길 기대한다. -정끝별 · 문태준 시인

...............................................................................................................................

 

 

2024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서울늑대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뿜으며

이불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영원

 

목만 빼꼼 내놓고 숨어 다니는 작은 동물들

나는 그런 걸 가져보려 한 적 없는데

하필 너를 데리고 집에 왔을까

내 몸도 감당 못하면서

 

우리는 같은 멸종을 소원하던 사이

꿇린 무릎부터 터진 입까지

하얀 늑대가 맛있게 먹어치우던

죄를 짓고 죄를 모르는 사람

 

혼자 먹어야 하는 일 앞에서

천사는

입을 벌려 개처럼 웃어본다

 

 

 

 

 

조명실 /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 본다

 

[심사평]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 작품

 

신춘문예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새로운 시의 경향을 감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2651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백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팬데믹에 이어 전쟁과 기후위기 등 우리 삶의 불안이 참담한 형태로 가시화되는 한 해였던 만큼 그런 경향이 작품에도 반영됐다. 불안한 오늘날의 삶과 온몸으로 맞설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서는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김보미의 제 자리4편은 유려하게 운용되는 시의 맛이 뛰어났다. 그러나 오히려 그 유려함이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선과 태도를 가려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백민영의 피에타2편은 숙련도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의 구조와 전개 모두 능숙했지만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로 귀결되고야 말았다. 조금 더 크고 넓은 운동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이영서의 멀어지는 기분2편이었다. 개성적인 시선과 발화가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세계가 눈길을 끌었지만 단조롭거나 무리한 전개를 보이는 대목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이실비의 서울늑대조명실을 선정했다.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시란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늑대는 늑대가 되어 서울을 달리는 두 덩이의 하얀 빛을 통해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드넓은 도시의 이미지까지 아우르며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극장 조명실의 독백으로 전환되는 조명실은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하는 데 성공해 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자다. 당선자는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앞으로도 자유롭게 이 세계를 유영하기를 바란다. 본심작을 포함해 뛰어난 투고작이 많았다.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시에 대한 우리의 열의가 있는 한 시는 끊임없이 우리 삶과 더불어 이 세계와 대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소연·박연준·황인찬

.............................................................................................................................................

 

2024년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면접 스터디/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시원하다

아 아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미지근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집 아이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안부를 물을 때
보다는 낮고
지저분한 소문을 전할 때
보다는 높다

언뜻 저 사람과 그 옆 사람의 목소리하고 똑같다

우리 셋이 동시에 얘기하면 참 재미있겠죠
진지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소리만 낸다

아 아
교실은 소리를 머금은 상자가 되고

이가 나간 머그잔에 물을 담아 마시다가 바닥에 흘렸다
닦아내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물 위로 번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진짜사람들이 진짜미소를 지으며 진짜 멋진 진짜옷을 입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행복이 밀려왔다


【심사평】 진심·위선의 문제 유쾌하게 풀어내… 한국詩 밝힐 신예 출현

응모작들에서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미래 지향적인 목소리가 부족한 대신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과 문제를 조용하지만 차분하게 관조하는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목소리가 감지되었다.종교적 의미로서보다는 자기 존재 탐구의 수단으로서 신이나 천사 등 초월적 존재를 모티프로 한 시와 그 반대로 가까운 친척이나 동료들이 등장하여 익숙한 삶을 뒤집어보는 일상형의 시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었다.일상형의 시에서는 청년취업 문제나 주택 문제,부채 문제 등과 관계된 시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심사는 예·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다.이 과정을 거쳐 열한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자연과학이나 설화 등의 인유를 통해 오늘의 이야기를 담아낸 긴 산문형의 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시적 짜임새와 수준이 만만치 않아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들은‘시창작기초’ ‘모델하우스’ ‘빛을 긁어낸다면’ ‘면접 스터디’였다.

‘시창작기초’는 알레고리 기법을 이용하여 손금의 운명선에서 거대한 사파리를 발견하고 동물들의 운명을 시 쓰기와 결합한 작품이었다. ‘손금’과‘밀렵’을 결합한 참신성이 돋보였지만 시적 확장성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모델하우스’는 현실감이 묵직하게 와 닿는 작품이었다.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형제의 이야기가 형이 만든 축소된 아파트 모형 속 축소된 사람들과 분양대행사 직원이 소개하는 모델하우스의 대비로 실감 나게 전개되어 있었다.청년 세대의 주거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다소 시적 구조가 평이하고 시행이 투박하다고 생각되었다.

‘빛을 긁어낸다면’은 여러 사물을 이질적으로 배치하고 혼합하는 시적 능력이 돋보였다.하지만 내면에서 맴도는 불투명한 시적 전개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시의 앞부분에서 제시되는 다채로운 내면의 이미지들과 어우러지는 외연의 목소리를 기대했지만 그 점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귤’하나로 시작하여‘아이’의 심리를‘일기장’과‘쿠키’등의 다양한 사물을 활용하여 입체화하는 시적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면접 스터디’는 시적 사건을 다루는 솜씨나 인식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수작이다.취업 준비를 위해 면접 스터디를 한다는 시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소재를 통해 진짜와 가짜,진심과 위선의 문제를 유쾌하고 활달하게 풀어내어 힘 있게 읽힌다.특히 진짜인 척 행사되는 현실의 거짓을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러니 형식으로 건드리는 자기식의 어법이 안착된 유니크한 솜씨가 발군이었다.당선작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오랜 습작기를 거쳤을 것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한 문장과 개성,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졌다.이에 심사위원들은 한국시의 미래에 풍요로움을 더할 탁월한 신예가 출현했다는 것에 흔쾌하게 동의할 수 있었다.당선을 축하드린다.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

【당선소감】 말 안에 깃든 폭력성 ‘참을 수 없어서’쓴다

참을 수 없음.

저는 참을 수 없어서 시를 쓰는 것 같습니다.무엇을 그토록 참을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공교롭게도 어떤‘말’들이라고 답하겠습니다.예를 들어 저는‘선함’과‘아름다움’과‘멋짐’과‘성실함’같은 말들 안에 깃든 폭력성을 참을 수 없습니다.어렸을 적 우리 집 가훈은‘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였는데,언젠가부터는‘사회’라는 말도‘필요’라는 말도,심지어는‘되자’라는 말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어떤 말에 들어맞는 사람이 되면 사는 게 편하다,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결국 제가 찾는 건 그 말들 너머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이 압니다.

그렇지만,세계는 말로 이루어져 있고 말로 작동합니다.힘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말을 재정의하기도 합니다.그래서 저는 저를 둘러싼 세계와 불화하고 맙니다.정확하게 말하면,불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참을 수 없으니 뭐라도 쓰자.그렇게 시 한 편을 쓰니 한 편을 더 쓰고 싶어졌습니다.무엇보다 그 과정이 재밌었습니다.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쓰는 사람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도 배우게 되었습니다.더 열심히 배우라는 뜻으로 저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럴 동력을 불어넣어 준 문화일보와 심사위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이때까지 살아왔습니다.나에게 쓰는 행위의 기쁨을 몸소 알려준 엄마,김분숙 씨.고맙고 사랑하고 존경해요.동생 영훈과 지호,부족한 누나 언니를 늘 믿어주어 고마워.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저를 푸짐하게 먹이고 키워준 할머니와 이모들,이모부들,삼촌,모든 친척들에게 감사합니다.나와 함께 거침없이 흔들려준 친구들아,고맙고 보고 싶다.지난 한 해 동안 여러 수업을 기웃거리며 많이 배웠습니다.김선오 시인님,김근 시인님,김준현 시인님,박소란 시인님.문학을 좋아할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던 제 어설픈 시들을 애정으로 들여다봐 주셔서 감사합니다.존재만으로 기쁨과 감탄을 주는 고양이 망고,우리 건강하자.밤비야,여전히 너를 기억하고 있어.그리고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사랑이 무엇을 가능케 하는지 알려준 재희에게 온 마음을 건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네가 호빵맨이 되어서 사람들이 네 얼굴을 뜯어먹는다면 어떨 것 같아?”같은 질문들에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당신이 있어 나는 살아갈 수 있어요.

 

강지수. 1994년 서울 출생.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

 

 

[202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 박동주(박현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떠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여러 빛깔의 편지지

하얀 송편에는 첫 마음을 써요

어떤 송편에는 첫 눈이 내리고

첫 발자국 첫 속삭임이 들어 있어요

 

 

 

[시 심사평]

서정시 기본형에 매우 충실한 작품미적 완결성 갖춰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통적인 서정에 충실한 시가 많았다. 화자가 어떤 대상을 만나면서 세계와의 내밀한 동일성을 꿈꾸는 시, 뿌듯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결말. 대부분 은유적인 기법에 기대어 잘 빚은 항아리처럼 고만고만한 체형을 갖고 있는 시들이 그렇다. 응모자들이 농민신문이라는 신문사의 이름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일까. 우리는 해마다 오는 신춘이 아니라 이제껏 한번도 와보지 못한 놀라운 신춘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마지막까지 유심히 읽은 작품 중에 허물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채 정리가 되지 못했고, ‘용접공은 현실감이 살아 있지만 소품이었고, ‘간헐천은 능숙한 솜씨에 비해 자기 갱신의 의지가 약해 보였다.

도배사4편을 쓴 분은 시에서 감각이 발생하는 지점을 잘 간파하고 있는 사람이다. 일상을 화사하게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나지만 매번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멈추고 만다. 더 자신 있게 세상과 맞짱을 떠도 좋을 것이다. ‘돌무덤5편은 이미지의 충돌에 의한 유장한 서사의 전개가 볼 만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시적인 것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응모한 시의 길이와 연의 형태가 모두 비슷한데, 고정된 틀을 부숴야 한다.

당선작으로 고른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는 서정시의 기본형에 매우 충실한 시인데, 당신이라는 대상과의 거리 조정으로 미적 완결성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함께 응모한 시편 중 미나리도 수작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 장석주 · 안도현 시인

[시 당선 소감]

나의 시로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 수 있었으면

​​

당선 전화를 받는 순간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습니다. 그동안 반짝거리며 다가왔던 시들이 부옇게 지워졌습니다. 멀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슬픔의 정수리에서도 시는 늘 든든하게 저를 위로해줬습니다. 마음이 까무룩 해져 길을 갈 수 없을 때면 어김없이 시는 저의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처럼 살아갈 때도, 시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저의 시도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연세 문학회 활동을 하다가 시인으로 사는 것이 자신 없어 한참 동안 시를 외면했습니다. 그리워하면서 멀리했습니다. 이제 주저하는 마음은 버리렵니다. 모래 알갱이처럼 많은 말 중에 섬과 섬을 이어주는 따뜻한 말들을 엮어 시를 쓰렵니다.

한동안 시의 독자로만 있던 저는 동작문학반의 맹문재 선생님을 만나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오랜 시간 시를 찾아가는 길은 짙은 안갯길 같았습니다. 외로운 여정에 여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의 초석을 놓아주신 맹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의 환경을 열어주신 하재연 선생님, 시클 창작반의 하린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나의 문우 나비족과 나비족장 박지웅 선생님, 평생 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로 이끌어주시고 깊고 넓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맨 앞자리에 놓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단히 정진하겠습니다.

언제나 저를 응원해주는 남편 창헌, 사랑하는 두 딸 미선·영선, 사위 재광, 친정엄마 그리고 이 모든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동생들 미자·병준·은정·병근 고맙다.

박동주(본명 : 박현숙) 시인1962년 경기 이천 출생 연세대학교 불문과 졸업

서울 서초반포구립도서관 시 창작반 활동

...............................................................................................................................

 

2024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운주사 천불천탑 /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의 민초를 맞이한다

투박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그 모습

그 거친 어깨 끌어안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고 싶다

고해의 파도에 깎여나간 마음 쥐어짜내 입술 깨물고 울고 싶다

마음의 부스러기가 섞여 나온 눈물을 부처님께서 가사자락으로 닦아주면

지나간 괴로움을 땅에 내려놓고 다가올 염원을 부처님께 올린다

염원이 모여 천개의 석탑이 되었고, 천분의 석불이 되었다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

같은 모양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 서서 정토세계를 꿈꾼다

 

 

시 당선소감

사실 당선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시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천한 제가 당선이 될 수 있을까 집필하는 동안에도, 제출하러 가는 길에서도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제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성취감과 함께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출한 이후로는 잊고 다음 작품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당선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상을 넘어선 결과, 불확신을 깨고 날아든 쾌보(快報)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동안 눈앞이 탁한 불확실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써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손끝으로 더듬어가면서 나아가던 제게 당선 소식은 앞길에 피어난 은은한 등불로 다가왔습니다. 문인의 등용문 신춘문예에서 안겨주신 이 기회를 이전보다 더 열심히 시를 갈고 닦으라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다가올 신년, 보다 더 정진하는 자세로 집필에 전념하겠습니다.

아직 시에 대해 더많은 배움이 필요한 저에게 과분한 영광을 안겨주신 심사위원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많은 아들을 항상 응원하고 지지를 아끼지 않는 본가에 계신 부모님,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은근한 사랑을 주시는 할머니, 소질이 있다면서 시를 계속 써보라고 격려를 보내주신 이승하 교수님까지 감사를 드릴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에게도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시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숨구멍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철학에서 시적인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영감을 영감으로만 남기지 않고, 정교하게 새겨진 만다라처럼 한 단어, 한 문장 한땀 한땀 전심을 다해 활자로 옮겨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쉼표로 다가오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먼 타향에 홀로 나가 사는 변변찮은 아들을 항상 걱정하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도 나름대로 구르는 재주가 있습니다라고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준경


<시조 심사평> 당선작은 작품의 완성도 높아

올 불교신문 신춘문예의 시시조 부문 응모작은 1500여 편에 이른다 한다. 이 엄청난 양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넘어온 작품은 106편이었다. 101이 넘는 경쟁을 거친 셈이다. 선자는 한 편 한 편 꼼꼼하게 읽어 10편을 가려냈다. 역시 101이 넘는 경쟁을 거쳐 선정된 작품은 빈자일등’, ‘돌확 발우’, ‘갠지스를 배회하는 불빛’, ‘구석골 동석이’, ‘소금 꽃’, ‘저녁 강’, ‘술래잡기’, ‘나를 만나러 가는 길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다시 읽어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시조 석등과 시 운주사 천불천탑이었다.

시조 석등은 정형을 잘 지키고 있고, 오랜 습작의 공력이 느껴졌다. 그런데 탯줄의 행렬’, ‘고샅길 펼쳐들고같은 표현이 작품의 신선미를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대시조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정형율을 지키다 자칫하면 표현이 진부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절가조라는 시조 본래의 명칭처럼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정서를 담아야 한다.

운주사 천불천탑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아픔분노’, ‘원망깎아서 내버리면 눈’ ‘입이 나온다는 표현,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는 표현은 크게 새롭지는 않아도 적확하다. ‘운주사 천불천탑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라고 본 끝부분의 표현은 이 작품의 완결성을 높여주었다.

두 작품을 들고 오래 고심하다가 당선작은 한 편이라는 주최 측의 방침에 따라 운주사 천불천탑을 당선작으로 하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마지막 관문에서 아쉽게 탈락한 분들은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주시길 당부드린다.

심사:유자효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

 

2024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산벚꽃 피는 달/김제이

 

달을 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저 달 언덕에 산벚꽃나무숲이 있었지, 난 날마다 산벚꽃나무숲 언덕에 올라 지구를 바라보았지, 지구를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지구에도 산벚꽃나무숲이 있을 거라 믿었지, 거기 산벚꽃나무숲 언덕에서 누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때는 정말

이제 생각나, 내가 저 달에서 떠나온 거

맞아, 내가 떠나올 때 잘 다녀오라고 기다리고 있을 거리고 손 흔들어 주던 너, 너의 젖은 눈이 생각나, 너와 함께 걷던 산벚꽃나무 숲이 생각나, 저기 산벚꽃 핀 언덕 아래 작은 절에서 날 위해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네가 생각나, 어서 달빛 동아리를 내려줘, 나 이제 돌아갈 거야

그런데 이를 어째, 나 여기서 한 여자를 얻어 두 아이를 낳았으니

심사평"상상력 차원 더 높인다면 훌륭한 시인 될 것"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5분의 시들이었다. 김제이씨의 산벚꽃 피는 달4, 서희씨의 페이지 터너4, 김미옥씨의 후제4, 최영정씨의 입 속의 말발굽4, 임도윤씨의 가을 사찰과 국화4편 등이다. 모두 어느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렇지만 시적 긴장감이 돋보이는 김제이씨와 서희씨의 작품들이 유독 눈에 들었다. 이 두 분의 작품들은 끝까지 경선을 다투었다. 그러나 숙독 끝에 김제이씨의 산벚꽃 피는 달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고 말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후자 경우는 페이지 터너를 제외 할 경우 다소 미흡한 감이 있었으나 전자 경우는 모든 작품이 일정한 수준을 지키고 있었다. 둘째 후자의 작품들은 시류를 추수하는 감이 있었으나 전자의 작품들은 안정감이 있는 자신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셋째 전자는 전체적으로 관념적이었으나 후자는 감성적이었다. 넷째 전자는 대체로 지적 사유로 끝났지만 후자는 지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을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서희씨의 결정적 단점은 그의 시어 구사나 묘사기법이 다소 작위적이고 시류편승에 너무 민감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유념하여 이같은 측면을 극복한다면 좋은 시를 쓰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제이씨는 자신의 철학을 미학으로 형상화시킬 줄을 아는 시인이다. 요즘 우리 문단의 시류에서 보듯 감각적인 유행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투고작들처럼 자신의 시를 지키면서 상상력의 차원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앞으로 훌륭한 시인되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오세영

당선소감늦은 만큼 온힘 다해 시의 길을 가겠다

 

뒷산에 올랐습니다. 산길을 걷다 당선통보를 받았습니다. 순간 멍해졌습니다.

오랜 세월 시를 앓았습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원고를 넣었습니다. 참 많이도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오세영 선생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부족한 만큼 더 노력하겠습니다.

시의 길을 밝혀주신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류근, 김영산, 하린, 김근, 황인찬 교수님 그리고 용기를 더해주신 안현미, 이지아, 이병일, 이병철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래 함께 한시산티동인들 그리고 새로 시작한흙다리도반들 같이 아파한 문우들 모두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못난 남편을 믿고 기다려준 아내 숙에게도 쑥스러운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랑하는 지혜, 자운, 진평, 지현 그리고 존재 자체가 사랑이 전부인 준성이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산벚꽃 피면 맑은술 한 병 들고 뒷산에 오를까 합니다. 달을 보며 한 잔 하고 싶습니다. 늦은 만큼 온 힘을 다해 시의 길을 가겠습니다. 쓰고 또 쓰겠습니다. 끝으로 기꺼이 제 여린 손을 잡아준 한국불교신문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김제이: 충남 서산 출생
-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창과 졸
-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

 

 

2024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달로 가는 나무 / 김문자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

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

 

인천 장수동 사적 562*800년 된 은행나무

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

 

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

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

 

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

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

은행나무는 품을 여며 폭풍과 폭설을 견디는 새집이 되었다

큰 나무의 덕을 보아도 큰 사람의 덕을 못 본다는

무서운 격언을 새가 쪼아 먹을 때

뒷산까지 뿌리가 뻗은 은행나무를 뽑으면 산이 무너질까 봐

사람들은 새가 세 들어 사는 나무에게 빌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7월과 10월의 보름이면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지아비 달이 걸린다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

 

 

심사평 "활달한 어법·거침없는 상상력읽고나면 가슴이 두근"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불황의 늪에 빠지면서도 시심이 있기에 견디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경인일보 2024년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했다.

응모편수가 예년에 비해 줄지도 않았고 수준이 낮아지지도 않았다. 응모작품의 성향은 역사적이거나 문명의 진화이거나 하는 거대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사유의 깊이가 보였다. 소소한 일상을 아름다운 서정의 그물로 건져 올리거나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시각이 좀 더 깊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특성을 살필 줄 알아야 감동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작품들이 독자에게 감동과 전율을 준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심사할 작품들을 택배로 받아서 우수한 작품들을 선정하는 예심을 거쳐 지난달 20일에 경인일보 심사장에 모여서 당선작을 조율했다. 열 분의 작품을 놓고 몇 번씩 돌려 읽으며 새로운 어법인지, 표절은 없는지, 시어들은 울림이 있는지, 본질에 닿으려는 노력이 보이는지 등을 검토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김문자의 '달로 가는 나무'. 어법은 활달하고 상상력은 거침이 없으며 희망을 준다. 희망을 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발표지면이 새해 둘째 날이어서 그렇다.

첫 행은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로 시작된다.

마지막 행은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로 되어 있다. 읽고 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선자의 문학의 꿈이 까마득한 은행나무를 기어코 오를 것을 믿는다.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

 

 

2024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자물쇠 /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있다

하필이면 벼랑 끝에 걸어놓은 맹약

효험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 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 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습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는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는 엎어 치나 메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든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만 속절없이 녹슬어간다

 

당선 소감

조금 전까지 훤히 밝았던 쪽문 밖에 커튼이 내려쳐 집니다. 얼마 전 폭우 속에서 간신히 난간을 붙들고 있었던 그 까마귀가 날아와 앉아 있다가 난무하는 도심의 불빛 건너편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겨울 초입의 매정한 한기 속에서도 꿈쩍 않고 있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제 길로 갔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들도 그러했습니다. 무언가 붙들고는 있었는데 막상 손을 펴면 빈손이기 일쑤였습니다.

라고 써 놓으면 시가 된다고 우기면서도 늘 찜찜했습니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 했지요. 써놓은 시 아닌 시를 다시 읽어보면 시가 아닐 때 과감히 지우지 못하는 스스로를 타박합니다.

아무리 고쳐 써도 아침에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저녁은 아랑곳없이 와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퇴락한 이정표 같은 속내를 오롯이 담아내자고 시의 내에 어정쩡 손을 담그고는 시입네하기엔 밤이 너무 깊습니다.

퇴고에 퇴고를 계속해도 시가시비상시(詩可詩非常詩)이어서 아예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곤 합니다. 그 속에서 또 시를 씁니다.

시리고 어두운 속에서 형해되어 있는 고갱이를 드러내는 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잠깐씩 쉼표를 찍고, 그러다가 들이 줄줄이 걸어가는 뒤꽁무니에 한 발을 슬쩍 들이밀었습니다.

힘에 부치는 작품에 후한 평을 주시고 15년 역사의 중부광역신문 페이지에 선뜻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중부광역신문사 이숙경 대표님과 청주시문학협회 그리고 성낙수 신춘문예 추진위원장님을 비롯한 송찬호 한상우 김나비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지런히 쓰고 지우며 시 한 편 제대로 써서 함께 응모하셨던 문우님들의 길 앞에 징검다리 하나로 남으라는 격려로 삼겠습니다.

 

박찬희(59):서울출생, 인천거주

서울신대에서 서양 고대 및 중세 공의회의 역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는 미국 AEU 대학교의 겸임교수

2017년 계간 문학의봄등단, 1회 한양도성 시공모전 대상, 16회 바다문학상 대상

9회 금샘문학상 대상(시조),7회 문경문학상 대상(),27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

혼의 깡마른 직립’(시산맥), ‘비스듬히’(카르디아) 3권의 종이책 시집과 1권의 전자책 시집이 있다.

 

심사평(본심: 송찬호 시인, 성낙수 시인)

기후 위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따뜻한 겨울 날씨 속에 심사가 진행됐다. 응모 작품의 경향은 사회나 집단에 대한 관심보다 일상적 삶에 대한 통찰이나 개인 내면의 서사에 집중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토론을 거쳐, ‘열의 이동’, ‘늦은 7시의 속사정’, ‘자물쇠가 최종 단계에 남았다.

열의 이동은 인생의 단계를 자전거, 모터사이클, 자동차 등에 빗대 형상화한 게 눈길을 끌었다. ‘가족 가득 태운자동차로 쉼 없이 달리다 결국 폐차가 됨으로써,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다 노후에 이르는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실감 있게 그렸다. 작품의 후반부가 평이한 진술에 그쳐 아쉽다.

늦은 7시의 속사정동그라미멜론등의 단어를 자신만의 개성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이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만큼 언어와 상상력의 운용이 활달하고 주제 또한 깊이가 있다. 작품 중간에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어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물쇠는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작품이다. 잠그고 풀리는 자물쇠의 이미지를 통하여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의 이치를 설득력있게 설파하고 있다. 자물쇠처럼 닫힌 너, 이웃, 사회, 세상이 저절로 열리는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그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자물쇠라는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능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응모자가 치열한 시정신과 결코 만만치 않은 시적 기량 보유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자물쇠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운전/강지수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요

아뇨 아뇨 하고 뒤돌아 도망치다 보면

잔뜩 눌어붙은 마음에 칼질을 해대는 것

한 가지 알려줄까요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

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피해 길을 돌아갈 때 혹은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천성

나와 분리된 조각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워하는 겁니다

발가벗고도 이를 내보이며 웃었던 날

<심사평>이미지를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는 힘이 거침없는 시운전

​​

이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인재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하늘하고 인간, 인간하고 인간의 아비규환 속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투고작들 속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들을 그리려는 필사의 노력들이 펼쳐진다.

중음신의 모습을 한 유령, 귀신, 고스트, 좀비 등과 유사한 다양한 형태의 변형된 인간을 창조하고 있다. 세상의 슬픔을 증언하려는 시의 지난한 몸짓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자 시의 본령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사의 모호성과 현실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 부재가 시를 가볍게 한다는 점이다. 서정시의 퇴보와 상반된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와 정서의 약진이 두드러지나 새로운 시의 전형을 창출하기까지는 도전과 시간이 얼마간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심사를 진행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응모작들을 나누어 읽고 네댓 작품씩을 뽑아 돌려봤다. 최종까지 거론된 작품으로는 강지수의 '시운전', 유가은의 '툰드라', 이상영의 '오늘을 돌려주려고' 등이다. 이상영의 시는 어조가 발랄하고 문장이 속도감이 있으며 단문의 조합이 경쾌하다. 다만 동원된 이미지들의 분열감이 시의 응집을 방해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유가은의 시는 가독성이 탁월하다. 경험을 시의 감각으로 전환하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비/, 사막/비옥한 땅, /죽음의 거리 사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의지를 다소 무리한 진술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선자들은 강지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추호도 이견이 없었다.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몇 천 분의 일의 선천치(natal teeth)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여정을 톺아내는 마음이 곡진하다는 점을 높이 샀다.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섬세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로 통합해가는 시적 완성도 또한 믿음이 갔다. 선자들은 모처럼 좋은 신인을 만났다는 마음을 서로 확인했다.

-심사위원 : 엄원태 안도현 안상학 나희덕

<당선소감>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시 쓰기 작업

출판 편집자로 약 3년간 일했습니다. 주로 예술서를 만들었어요. 예술 작품, 그리고 예술 작품을 다룬 이야기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설렜습니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일. 만드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막연하게 꿈꾸었습니다. 마침 제게는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시로 뱉어낼 때 가장 즐겁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썼습니다. 쓰다 보니 운이 따랐습니다.

저의 시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매일신문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엄마, 김분숙 씨. 오래도록 기쁨을 주는 딸이 되고 싶어요. 늘 고맙고 미안한 동생들 영훈 지호. 너희들이 자랑스러워. 나의 엄마를 든든히 지켜주는 아저씨,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저의 또 다른 어머니이자 늘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어머님, 그리고 아주버님. 감사드려요. 건강하세요.

소중한 친구들아. 나의 10대와 20대가 너희들 덕분에 즐거웠다. 앞으로도 함께 엉뚱한 짓 많이 하자. 특히 지혜, 현지. 나의 기쁨을 너희들의 기쁨처럼 여겨주어서, 한꺼번에 몰아닥친 행운에 짓눌리지 않고 숨을 쉴 수 있었어.

재희. 사랑하는 재희.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작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카뮈의 '이방인'을 읽어보라고 내게 추천해주었지. 문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어렸을 때 방학이면 혼자 버스 타고 가던 동네 도서관의 책 냄새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 내가 글을 쓰게 된 건 모두 당신의 덕분. 우리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자.

열심히 쓰겠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지수 1994년 서울 출생. 전출판편집자.

2024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미싱/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수상 소감; "방향 모른 채 날리던 소년에게 당선이란 의미있는 궤적 찾아와


 

1994년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몸에 열이 많았을까요.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았습니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이 화창한 날에는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 쓰기를 곧잘 멈추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시인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나 생각해봅니다. 열심히 하루를 펼치고, 활자를 따르며 시를 날립니다. 아직도 제 시는 방향을 가늠할 수 없고, 한순간 추락하기도 하고, 쉽게 젖습니다. 그럼에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하릴없이 땅을 찍는 머리보다 손끝을 떠나는 비행의 순간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이제 저의 궤적에도 의미가 생겼습니다. 계속할 겁니다. 저의 기록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으니까요.

부름에 답하겠습니다. 저를 호명해주신 시인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단국대학교 교수님들,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친구, 동료, 작가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들의 그늘 아래에서 싹트고 피어나 여물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예술은 연결되어 있음을 선명히 느낍니다. 시는 동화와, 동화는 시와 닮았습니다. 제가 누나와 닮은 것처럼. 어머니와 아버지와 닮은 것처럼요. 친구와, 동료와, 스승과 닮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과도 닮아가고 싶습니다.

성욱현

291994년 밀양 출생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22 대산창작기금 동화부문 수혜

천안역 인근 책방 악어새 운영 중

 

 

심사평 "엉킨 실 풀고 매듭 새기는 것인생이라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

 

시의 언어는 전달 가능성과 전달 불가능성 사이를 오간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언어의 운명이기도 하다. 시는 '정보'의 도구로 전락한 언어를 '선언'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선언이라면, 시는 교환되기보다는 제출되는 것이며 그로써 한 사람의 생을 증언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된다. 인생은 정보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멀어지거나 그 틈 사이에서 반짝이는 신비를 통해서만 인간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언컨대, 시 말고 다른 언어로 쓰여진 삶이 인생일 리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은 인간의 육체로 쓰는 시인 셈이다.

그것이 심사자들이 '미싱'을 젤 위에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 엉킨 실을 풀기도 하고 매듭을 새기기도 하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라는 놀라운 질문은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하는 풍경과 맞물려 인간이 쓸 수 있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물었던 개가 죽었다/ 내가 더 강해지기도 전에"로 시작하는 당선자의 또 다른 시 '이사'도 그렇거니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문장에 밴 섬세한 시선 덕분에 심사자들은 일찌감치 당선자를 결정한 뒤 당선작을 고르는 기쁜 고심을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자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본심에서 함께 검토한 '당신에게 맞는 온도', '건강함'이란 말로 설명되는 시들이 대체로 무거운 시어를 통해 세계의 원리를 포착하려는 과욕을 쉽게 노출하는 데 비해 평이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아픈 어머니를 씻는 아버지의 지극한 일상을 깊이 감내한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주었다.

'판토마임''낯선 매혹'에 사로잡힌 언어들이 자칫 그 매력의 배후를 놓쳐버리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대한 반성처럼, 훌륭한 이미지를 구사하면서도 특별한 순간을 가능케 하는 근원에 접근하려는 고투를 멈추지 않아서 반가웠고, '낙하'는 시가 의미 용량으로 해석되는 관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맥 이면에 도사린 예감을 통해 그 의미를 부드럽게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분명 우리는 이들의 독자가 될 것이다.

 

심사:정호승·신용목 시인

...............................................................................................................................

 


영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극빈/김도은(정미)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이 극빈도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말들

그래,함께 헐리면 편하지

지탱이 지탱을 업고 하는 말들은 그마저도

죄다 빌려 온 말들이라는 것

돌려줄 곳도 없는 말들이라는 것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어둑한 한 평의 미궁들엔 다행히도

무더위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들어올 것도 없이 여미는 겨울보다는 낫다는 것

홀로,깊은 안쪽이 되는 것이

 

<당선 소감:쓸쓸하거나 따뜻하게

 

절실해질 때마다 망설인 것들을 생각했다.망설이는 일들만으로 분명해지는 답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었다.그러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있을 결정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결정한 일로 이렇게 행복해졌다.

파동이 잘 느껴진다는 것은 내 안에 수만 겹의 파동이 여유분으로 있다는 증거다.그러니 세상에 풀 죽은 채 돌아오는 날이 많아질수록 시를 써야 할 이유도 늘어났다.간절한 것을 만들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었지만,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 꿈만큼은 쉽게 내려놓아지지 않았음을 고백한다.시 앞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순간마다 내겐 운명처럼 여러 일이 일어났다.무병을 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해될 때도 있었다.이제,좋은 글을 쓰는 일만 남았다.빈 가방을 들고 불룩하게 길을 나서야겠다.그렇게 좋은 글을 쓰다 보면 한 발자국씩 괜찮은 나와 만나지지 않겠는가.

당선 소식을 그 누구보다 기뻐할 플라타너스 잎들이 휘날리는 교실 창가에서 가파른 세상의 언덕을 오르는 트럭이 삶의 메타포임을 눈 뜨게 해준 시의 첫걸음인 은사님 이영춘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게 해준 든든한 울타리인 남편 이두호씨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그리고 멋진 두 아들 윤범,윤수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 고맙고 다행이다.긍정적이고 이쁜 우리 지은.늘 응원해준 학순 언니.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내 동생 정혜.먼 곳에 계신 아버지 엄마.그리고 친구들과 문우들.용기 잃지 말고 앞으로 더 나아가보라고 선물처럼 꿈을 허락해주신 박영교 선생님 이서빈 선생님 이옥 선생님 이진진 선생님 네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영주일보 관계자분들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겠다.쓸쓸한 길이지만 따뜻하게 따뜻하게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2024년)영주신문 신춘문예‘시 부문’주옥을 골라낸 다양한 심사평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영주신문(대표‧권오섭)은32년째 계속 발행되는 전국에서 드문 지령1337호를 맞이 하는 알찬 지역신문이다.선비의 고장인 영주의 맥을 잇기 위해2024년 제1회 신춘문예를 개최한 영주신문에 깊이 감사드린다.

총1756편의 응모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심사하였다.지역별 응모 편수는 서울28%,경기32%,강원7%,경북23%,전남3%,전북2%,경남5%를 비롯해 제주 등에서 응모하였다.처음 실시하는 행사인데도 많은 사람이 응모해 왔다.

응모한 전체적인 작품들을 읽어보면 작품 수준의 편차가 좀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금방 본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작품으로 승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삭힌 뒤에 그 엑기스를 뽑아서 작품화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가져다 쓴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새로운 언어가 그 작품 속에서 한 문장에 들어앉아 적확한 언어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또 다른 하나는 시적인 사회성이나 정치적 이슈 등을 작품 속에 끌어와 쓸 때는 완성도 있게 설정하거나 표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을 들 수 있겠다.마지막으로는 한 작품에 대한 이미지의 형상화이다.작품을 읽어보면 시인이 그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필요한 요소가 두뇌 속에 떠올려져야 하는데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대체로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예심에서 올라온 여러 작품 중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 손에 남은 작품은「대숲과 새」,「검은 고양이」,「극빈」세 편이었다.그 뒷받침을 해주는 각4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세 작품은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힘이 있었다.그러나 잠깐잠깐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나 어휘를 적어놓은 것은 그 진한 맛을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지 못한다.이미지의 형상화가 어렵지만,독자에게 주는 무게는 있어야 작품의 값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작품「대숲과 새」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대숲이 항문을 조이면/새들이 침묵의 그네를 탄다’ ‘대나무가 허리를 펴면/새들이 알사탕처럼 쏟아진다’등의 문장들,결국은 대숲,바람,새들 이 세 명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품이었다.

작품「검은 고양이」는 좀 다르다. ‘밤의 너그러움을 껴입은 고양이’검은고양이를 밤이라는 어둠 즉 밤의 너그러움으로 표현하고 있다.이 작품에서는 나와 검은고양이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검은고양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서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 작품이었다.

작품「극빈」은 그 첫 연은 어떤 참사를 겪고 난 후 그곳의 골목에 대한 이미지를 이어 나가는 느낌을 주었다.이 어려운 가난의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기도 하면서‘혁명가의 노래로 그 길을 벗어 날려는 생각이’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로 변하여 헐리고 말 것이라는 마음을 갖는다.가난의 삶은 겨울보다 여름이 살아가기가 낫다는 생각에 접어들면서 끝을 맺고 있다.작품「극빈」외4편의 작품도 고른 수준이었다.오히려 뒤의4편 중에서도 이미지의 선명함을 만날 수 있었다.작품「모두 저녁을 찾으러 간다」,「사슴은 수신중」,「수동식 낙타」,「하잠夏蠶」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작품에 적확하게 심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보였다.새로운 어휘를 찾아내어 써서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노력도 찾아볼 수 있었다.작품「하잠夏蠶」은 지하철 계단참에 누워있는 노인을 통해 하잠의 이미지를 얻어 왔으며 그가 돈 통(바구니)을 앞에 놓고 있을 때도 빈 바구니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푸른 지폐를 한 장(남루도 견본이 필요하다)을 먼저 담아두어야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돈을 넣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노인(걸인),우리가 살고 있는‘이 세상의 인심’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작품「수동식 낙타」에서는‘사막을 달려온 낙타가 온몸을 접는다’로 첫 연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사막에서 살아가는 낙타의 슬픈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작품「사슴은 수신중」은 수사슴이 그 뿔을 통해 전파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것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다.즉 뿔의 주파수에는 맹수를 먼저 찾아내고 고요를 걸러내고,초록의 여름을 지탱한다. ‘모두 저녁을 찾으러 간다’는 그 첫 연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날이 새면서부터 모두 저녁을 향해 간다’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이면 일을 다 마치고 어둠이 오기 전 집으로 퇴근하는 일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이것을 더 비약해서 본다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을 살아가며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궁극적으로 마지막에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낮은 비유로 표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수상자에게는 다시 한번 축하의 마음을 올리며 또한 응모한 모든 분들에게도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문운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박영교 시인,이서빈 시인,이옥 시인,이진진 시인>

...............................................................................................................................

 

 

 

2024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랑/엄지인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더운 바다를 피해 육지로 돌진합니다

거울에 목을 비춰보니

빗물이 빗장뼈 안으로 고여 흘러넘칩니다

쇄빙선이 얼음을 부수고 지나간 듯

물살이 온통 파랗습니다

 

[심사평]기후변화시대의 명상 감각적으로 보여줘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오랫동안 뜻과 주제와 내용 파악으로 시를 수용한 결과다. 시는 이해 너머 사랑의 영토다.

소리와 이미지, 독특한 어조, 명명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들이 시의 건축학적 자재에 스며드는 사랑의 요소다. 풍화마저 건축의 일부이듯이 시의 건축에 있어 건축 너머의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을 때 이미 굳어진 기존의 이해는 새롭게 구축되고 우리의 일상 또한 새뜻해진다.

이해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너무 반듯하고 투명하게 닦인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쉬 잊히듯이 빠른 이해는 빠른 망각을 부르고 사유의 자동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해의 소비 시스템을 벗어난 시들은 대체로 창에 낀 먼지와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 같은 불투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불투명은 방법적인 것으로서 쉬운 시난해시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 가운데 꼼꼼 수선집지구의 밤’, ‘파랑이 최종 심사작이 되었다.

어떤 작품을 택하든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으나파랑의 경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활달하게 가로지르며 기후변화시대의 명상을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는감각적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미더웠다. 동봉한 작품들의 여일한 수준 또한 기대를 갖게 하였다.

세계의 그늘과 존재의 그늘이 예각화된 언어의 그늘과 만날 때 단순한 구별짓기로서의 개성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소비를 성찰하는 사랑의 참신한 사태가 될 수 있음을 앞으로 꾸준히 증명해주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손택수 시인

 

[당선소감]“시 쓰기란 글을 설득해 생기를 찾아가는 기쁨

 

무정형의 시를 오래 쥐고 있었습니다. 시는 슬라임 같아 모양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이로 흘러내리고 추슬러도 빠져나갑니다. 손가락에 걸리는 몇을 들고 시라고 우긴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단단하거나 너무 물렁하면 가차 없이 버려야 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삶이 너무 충만해서, 어느 해에는 삶이 너무 버거워서 뒤로 밀쳐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람 잔잔해지면 이내 다시 꺼내어 전전긍긍했습니다.

본심에서 매번 탈락했기에 간절히 소식을 기다리던 중 기자님의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만 했습니다.

시는 한 번도 친절한 적 없었습니다. 대부분 창백한 단어와 문장인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개성을 믿어주고 응원하는 문우가 없었다면 글을 설득하여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에 기회를 열어주신 광주일보와 손택수 시인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꿈은 꾸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이루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네요. 박순원 교수님, 김성철 교수님 감사합니다. 두 분을 만나 시 문을 열게 된 것은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 창작에 재미를 한 스푼 더해 주신 치치시시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고 이유정 선생님 몸소 보여주신 따뜻한 열정 잊지 않겠습니다. 생오지 문예창작촌과 봄날의 시 회원님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합니다. 광용, 지산, 채원, 부르면 먹먹해지는 이름 뒤에 무슨 말을 더할까요? 사랑한다는 말 밖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시인의 꿈을 제가 대신 이루었네요. 투박하더라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엄지인: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생오지 문예창작대학 수료

.............................................................................................................................................

 

2024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젠가 / 홍다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나고요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내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한순간 한 방이면 끝나는 게임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해요

 

쌓아 올린 우리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우린 서로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는 중이죠

 

 

 

당선 소감 "시의 몸을 만드는 일은 즐겁고도 고단한 것

 

올려다봅니다. 한 번도 건너본 적 없던, 매달리면 흩어지던,

 

운동장 한쪽에는 구름사다리가 있어요. 건너간 친구들은 모두 귀가했고, 나는 높이를 가늠해봅니다. 봉을 밟고 올라서서 매달려봅니다. 뻗어 있는 곳은 귀가의 방향, 내 두 다리는 바닥을 벗어납니다. 왼팔로 견디며 흔들거리며 오른팔을 뻗는 동안 사다리는 머리 위 구름의 자세로 손을 내밉니다. 잡는 순간 놓아버릴 것만 같은, 미끄럽고 차가운,

 

모래놀이, 오징어, 시소, 타이어는 바닥에 놓여 있고 나는 공중에 매달려 있어요. 매달린 손바닥이 뜨거워집니다. 저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고, 한 칸씩 나아갈수록 사다리는 길어집니다.

 

두 팔을 두고 돌아왔어요.

 

종일 카페에 앉아 동작을 연습해봅니다. 한 팔로 매달려 버둥거리며 왼팔 오른팔을 옮겨가는 연습, 긴팔원숭이가 되어 정글을 날아다니는 연습, 나뭇가지를 타고 둥글게 휘어집니다. 매달리는 동작이 흘러가는 감각으로 변할 때까지, 쓰고 지우고 손을 바꿔가며 고쳐 쓰다가 나는 구름과 사다리를 분리해봅니다.

 

구름과 사다리는 구름, 사다리, , 사다리, 자꾸 나를 건너갑니다. 뻗어야지, 놓아야지, 붙잡아야지, 젖고 미끄러지면서 운동장의 몸이 길어집니다.

 

시의 몸을 만드는 일은 즐겁고도 고단한 것 같습니다. 최종심에 이름이 오르길 몇 해, "난 할 수 있어""내가 할 수 있을까" 사이에서 기우뚱거리다가 쏟아지고 홀가분해졌을 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꿈만 같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요.

 

옷의 첫 단추를 지어주신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중앙대 문예 창작 전문가 과정을 통해 많은 깨우침이 있었어요. 김근, 황인찬, 이병일, 임정민, 이지아, 류근 교수님 감사합니다. 예리한 시선으로 서로의 보풀을 떼어내 주고 형태를 고민하면서 주경야독해 온, 각자의 확고한 시 세계를 꿈꾸는 시동인 <자몽> 문우들과 오래오래 함께할 겁니다. 빈틈을 메워주고 응원해 준 남편과 딸, 아들 그리고 시어머니 황순예 여사님 고맙습니다. 친정엄마 우옥이 여사님 존경합니다.

 

무등일보사 관계자님들과 견고한 구름사다리의 손 내밀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홍다미:강원도 삼척 출생.

춘천교대 미술교육과, 강원대 교육대학원 심리학 전공.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2년 수료.

 

 

[심사평]쓸쓸한 삶의 깊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

 

새로 시를 시작하는 이들의 시를 읽는 것은 하얀 눈이 쏟아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창밖에 숲으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이 있고 발자국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게 됩니다. 숲 안에 내가 꿈꾸는 신비한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179편의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어지러운 세상살이 속에서도 우리들의 시는 여전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혜진씨의 '속옷을 사러 갑시다' 따뜻히 읽었습니다. '내일 속옷을 사러 갑시다 / 모레도 살아 있을 우릴 위하여' 라는 진술이 핍진한 우리들의 삶에 희망을 줍니다. 스케치처럼 다가오는 희망의 풍경들이 좀 더 웅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임준표씨의 서정시편들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불면' 속에 스민 눈 속을 울며 찾아오는 이의 이미지는 오늘 우리 시에서 보기 힘든 정서입니다. 이 이미지 속에 보다 맑고 신비한 새로운 시대의 샘물을 빗기 바랍니다. 고등학생인 양유민님, 그림과 함께 쓰여진 시가 따뜻하고 섬세했습니다. 양유민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한국 시단에서 곧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제 손에 최종적으로 남은 시 두 편이 있었습니다. 전규씨의 '마카롱'과 홍다미씨의 '젠가'를 읽어가는 내내 가슴의 설레임과 함께 찾아오는 선택의 압박이 있었습니다. 두 시 모두 쉽고, 사랑스럽고, 세계에 대한 자기 선언이 있었습니다. '슬픈 시는 싫어 근데 쓰다보면 슬픈 시가 돼' 로 시작되는 시는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고 일본 마루는 밟을 때마다 새가 울어서 시시해'라고 얘기합니다. 모든 시시한 풍경 속에 세계의 미학을 찾고자 하는 전규씨의 유니크한 시를 곧 볼 날이 올 것입니다. '젠가'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우리 시대가 간직한 쓸쓸한 삶의 깊이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놓았다는 점과 함께 새해 아침 신문에 발표된다는 신춘문예의 특성도 고려되었습니다. 홍다미씨의 시 세계가 보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하합니다.

.............................................................................................................................................

<2024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감정 일기/송상목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키스는 짧고

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

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

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을 끔뻑거린다 느린 속도로

슬픔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심사평:묵직한 여운삶의 음영 새긴 조형력 돋보여

​​

신춘문예는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다양하고 작품들 사이의 편차도 큰 편입니다.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서정시들이나 추상적 사변을 직설적으로 나열한 시들이 가장 먼저 걸러졌습니다.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가족사를 둘러싼 시편들도 절실하기는 하지만 익숙하다는 인상을 떨쳐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소재와 주제의 독창성, 개성적 화법과 표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검토작들을 좁혀나간 끝에 다음 세 분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황주현의 꼬리라는 과거4편은 어떤 형상이나 현상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로부터 삶의 구조와 원리를 이끌어내는 시편들입니다. ‘무게의 중심’ ‘삐딱한 수평’ ‘꼬리라는 말’ ‘여름의 회로’ ‘별의 동선등 힘의 역학관계를 새롭게 읽어내고 배치하는 사유가 흥미롭고 정밀합니다. 다만, 발상을 풀어내는 방식과 길이가 비슷해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는 인상과 설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준영의 액체의 신4편은 전체적으로 서사적 구성과 산문적 호흡을 취하고 있지만, 시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은유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시편들입니다. 특히, 세계의 질서나 사회적 시스템에서 배제된 인물들이 되새김질하는 고통의 감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비약이나 어색한 표현, 불명료한 부분들이 있어서 전달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송상목의 감정 일기4편은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하고 펼쳐 보여주는 시편들입니다. 소품에 가까운 시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다섯 편 모두 군더더기 없이 인상적인 내면풍경을 완성해내는 솜씨나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당선작으로 뽑은 감정 일기역시 천진하고 해맑은 표정 속에 삶의 음영을 풍부하게 새겨넣는 조형력이 돋보입니다. 감정을 인간의 심리적 부산물이 아니라 독립된 행위의 주체로 다루는 태도가 신선했고, 무심한 듯 건네는 말들에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섬세한 감정 연구가 앞으로 더 큰 세계에 대한 탐구와 치열한 수행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나희덕(시인·서울과기대 문예창작과 교수)

당선 소감:"지구력 갖춰 좋은 결실위안의 시 쓸터"

마지막 투고였다. 송부하면서 직감했다. 왠지 될 것 같다고.

진짜로 됐다.

올해만 이십여 곳은 되는 신문사에 신춘문예 작품 투고를 했다. 이만하면 됐다. 하고 쉬려 했다가 여전히 시가 쓰고 싶어서 계속 썼다. 그러다 새로이 다섯 편이 모였는데, 안 보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투고를 또 한 것이었다. 그게 당선되었다.

짙게 눌어붙은 열정이 읽혔기에, 그를 높이 사 졸고를 집어 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선 소감을 쓰며 백여 일간 쓴 시들을 돌아보았다. 일상에 뿌리 박은 것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소박한 사람이었나. 놀랄 정도였다. 이어서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와 우리가 오늘날 필요로 하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현실 논리에 치여 자신을 마모시켜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내 눈은 그런 이들의 삶과 감정에 향해 있었다.

앞으로 얼마간은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웃다가 절망하고, 절망에서 끝마치지는 않는 시를 쓰게 될 것 같다.

그리하여 첫 시집은 위로의 시집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위안을 가져다줄 시.

사는 동안 되도록 많은 사람을 끌어안아 주고 싶다. 타자가 나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처음은 우리를 보듬는 것으로, 이후는 바깥에 놓인 이들을 끌어안는 것으로. 그게 현시점의 목표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넓어지고 다양해지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너무 좁아서 숨이 막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가능성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좋지 않을까. 각박해지지 않고, 진정한 나를 없애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고.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나는 감사드릴 분이 많다.

우선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근면히 쓰겠습니다.

한 학기 동안 시를 알려주신 박주택 교수님께도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소설만 읽던 놈인데, 처음으로 시의 길에 들어서고 난 뒤 시에 미쳐서 매일 쓰고 또 쓰다 보니 덜컥 뽑혀 버렸습니다.

여기 이름을 나열하지 못한 교수님들, 그리고 초중고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학교에서 배워온 내용과 전달해주신 가치관이 톡톡히 발해 시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함께 달려준 경희랑달리기 크루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지쳐도 끝까지 가는 지구력을 갖추어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학기에도 맛있게 먹고, 잘 자고, 몇 킬로미터고 같이 달립시다.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혹시 나 말하나 싶으면, 그래요, 너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우리 가족. 누나와 형, 그리고 매일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미흡한 제게 특별하거나 위대한 면이 있다면 그건 모두 어머니에게서 온 것일 것입니다.

여태 지나온 슬픔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모리()라는 이름을 가졌던 슬픔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도 꼭 하고 싶습니다.

이번 당선의 영광 전부를 어머니께 돌립니다.

 

송상목: 충남 당진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

 

[2024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엄마는 외계인*/최서정

 

분홍장갑을 남겨놓고 지상의 램프를 껐어요

눈 감으면 코끝으로 만져지는 냄새

동생은 털실로 짠 그 속에 열 가닥 노래를 집어넣었죠

온종일 어린겨울과 놀았어요 어느 눈 내리던 날

장롱 위에서 잠든 엄마를 꺼내 한 장 한 장 펼쳤죠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손이 찰까)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어린, 을 생각하면 자꾸만 버튼이 되는 엄마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

소곤소곤 곁에 누워 불 끄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녀 닮은 막내가, 바닥에서 방울방울 웃어요

놓친 엄마 젖꼭지를 떠올리면 자장가처럼 따뜻해지던 분홍

그녀, 마지막 밤에 파랗게 언 동생 손가락을 털실로 품은 걸까요

반쯤 접힌 엽서를 펼치듯 창문을 활짝 열면

어린 마당에 먼저 돌아와 폭설로 쌓이는 그녀

더는 이승의 달력이 없는, 딸기 맛처럼 차게 식은

별똥별 나의 엄마

꼬리 긴 장갑 속에서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든 동생의 손이

주머니 속 캥거루처럼 쑥쑥 늙어가요

 

*엄마는 외계인 - B회사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이름 중 하나

 

 

심사평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 상당한 습작과정 엿보여

 

202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는 도내 거주자 및 출신자 대상으로 공모되었다. 이는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한 전북도민일보의 관심에서 비롯된 실험적 방안이자 2024년 전라북도특별자치도 선정에 즈음한 지역 작가의 기회 창출을 염두에 둔 과정이라 판단된다. 지역을 한정한 만큼 응모 편수의 저하와 작품 수준의 미흡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시 부문에 상당량의 편수가 응모되었고 무난한 작품 또한 엿보였다. 심사자는 응모작 중 우선 5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리고 고민 끝에 김겨울의 의자와 최서정의 엄마는 외계인을 당선작 최종 후보로 압축했다.

의자오랫동안 말을 다뤄온 언어들에서 보이는 []’[]’처럼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를 동일화하는 동화(同化)적 구성이 돋보였다. 다만, 이러한 감각적 문장들이 확장되어 주제 구현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온에 머문 점이 흠이었다. 이는 주관적 관념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설득할 만한 이미지 제시의 결여로 이러한 현상은 의자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 시의 중심축이 되는 일련의 서사적 구성이 변환 혹은 전환을 통해 확장되지 못하고 평면적 서술에 그친 점이 그것이다.

엄마는 외계인은 정제된 시어와 절제된 문장이 눈길을 끌었고,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했다.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시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휘와 문장이 상보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촘촘한 긴장감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주관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치밀함도 돋보였다. 아쉬운 것은, 시 전반을 훑는 상실에 관한 암울한 정서의 부유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나 다행히 ‘~체의 경쾌한 어미 작동이 우려의 추()를 일정 부분 상쇄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 또한 심사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이는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주체가 되도록 한 발 뒤로 물러서 견자의 입장을 취할 때 가능한 것으로, 응모자의 상당한 습작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에서처럼 침윤된 내면의 무게를 서정으로 감량할 수 있는 능력에 더해 나머지 응모작 두 편을 관통하는 직관과 통찰 또한 더 나은 앞날을 기대하게 하여 당선작에 선했다. 당선자는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정진해주길 바라며, 낙선한 응모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배귀선(시인·문학박사)

...............................................................................................................................

 

202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알비노/최형만

​​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

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

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심사평]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

본심에서 숙독한 작품은 11명의 작품 35편이었다. 치열했던 예심을 통과한 만큼 응모작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시의 어법과 형식을 무리하게 끌어쓰는 경향이 강했다. 자기 시를 쓰지 못하고 검증된 시 쓰기에 편승하려는 모습은 우려스러웠다. 그런 시는 화자가 시의 언어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에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용기 있게 자기 시를 쓰려는 작품을 앞자리에 놓았다. 그중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새점 봅니다4, 주말 극장2, 알비노2편이었다. 새점 봅니다는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시어들이 적재적소에 적중하고 있었다. 차분한 어조 속에 쉽게 휘어지지 않을 이미지의 뼈대를 감춰놓는 수법도 믿을 만했다. 그러나 일상의 순간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그려나가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심한 어법이 조금 더 팽팽하게 긴장했으면 좋겠다.

주말 극장은 화자가 시의 서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시상 전개가 활달하고, 언어의 내적 활력이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도 소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참신하거나 새로운 인지적 각성을 주지 못했다. 기성 시인의 시적 유전자가 너무 많이 발현된 건 아닌지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알비노는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이었다. 시어들이 종횡으로 충돌하는 힘이 좋았다. 언어를 운용하는 폭이 넓고, 그 넓이가 시적 사유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기성의 시 문법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내적 서사가 좀 더 긴밀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 충분히 극복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논의 끝에 알비노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인으로 첫걸음을 떼는 투고자의 시적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의 무게를 견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용택 시인, 문신 우석대 교수

​​

[당선소감] ​​

돌아보면 어디서부터 걸었는지 모를 길을 걸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죠. 늦은 나이에 문창과에 들어가면서 바닥부터 다시 걸었습니다. 남들이 노후 자금을 생각할 때 시 한 줄 떠올리는 스스로가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역시나 타고난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봅니다. ‘푸른 하늘이라는 시제로 시를 쓰던, 이제는 까마득한 유년의 어느 날이 이제야 그 길을 찾은 듯합니다.

이 시를 구상하던 날은 그랬습니다. 무더웠던 여름날 산 중턱의 저수지였어요. 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볼까지 붉었는데 마음은 왜 그렇게 춥던지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침내 제가 사는 이곳에도 첫눈이 내리던 날, 다시 저수지를 찾았습니다. 볼에 닿는 산바람에 가슴이 기우뚱하는데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가고 싶은 길, 그 길이었습니다.

친구와 지인을 비롯해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춘문예공모나라문학 카페는 제가 수시로 드나드는 집과 같아서 그곳에서 편안했습니다. 더불어 오봉옥 교수(시인)님께서 바닥의 걸음마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축구에 진심인 교수님과 저는 통화를 할 때면 손흥민의 얘기로 한참을 떠들지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섰음을 압니다.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름날의 저수지에 내려앉은 그 노을도요.

최형만 시인:경남 진해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

8회 원주생명문학상, 14회 중봉조헌문학상, 13회 천강문학상 수상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펜치가 필요한 시점 / 김해인

 

짜장면과 짬봉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절단해 줘요

불가마에 단련된 최초의 연장이 되느냐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레디메이드 툴이 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후의 방향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한 끼 굶을 일을

어느 시궁창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이 친척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를 꾹 눌러서 이쪽저쪽으로 갈라줘요

이쪽으로 가면 강의 상류 끝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나고 싶죠

저쪽으로 가면 바다의 시작,

흰 치마를 펼쳐서라도 항해하는 게 로망인 걸요

밸런스게임은 사양할게요

이쪽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열려 있고

저쪽으로 가면 녹슨 대문이 부서져 있다거나

이쪽으로 가면 왕이 되고

저쪽으로 가면 거지가 된다는 동화 같은 거 믿으라고요?

차라리 사지선다형으로 바꿔주세요

검은 셔츠와 흰 셔츠 중 뭐가 필요하냐고요

지금은 펜치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당선 소감] 용접공들과 커피 나누며 시 찾아낼 것

 

기차가 다리를 접고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는 시간이 있었다. 모던의 그림자들이 허리가 꺾인 채 짙어가는 시절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함께 뜀박질하던 노을이 사라진 날도 많았다. 지금부터는 시간을 찾아내는 것이다. 서랍 구석구석을 쫓고 찾아서 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낯선 플랫폼에서 공구로 생계를 이어온 지 33년이란 시간이 갔다.

새벽녘 봉고를 타고 온 용접공들과 커피 한 잔을 나누면서 일과가 시작되었고 휴가란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세계인 줄 알고 살았다. 저마다 자란 키만큼 한 발 짝씩 하늘에 다가서는 나무들처럼 이 공간에서 시가 나오고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요즘 크게 깨닫는다.

큰형님, 동현, 광현, 예쁜 며느리 정남이,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미안하다는 얘기를 전합니다. 언젠가는 울타리에 대하여라는 글을 쓰리라 다짐합니다.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신 조말선 선생님에게 무한한 존경과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합니다. 늘 창 문학회와의 인연을 만들어 준 장정애 문우님, 임성섭 회장님, 총무님, 함께 공부해 주신 문우님들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저의 졸작을 심사하여 주시고 세상에 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 관계자님들에게 두 손 모아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해인

약력: 1961년 부산 출생, 본명 김인래, 계명대 사학과 졸업, 현대상사 대표, 국제PEN 부산지회 회원.

 

[심사평] 노동하는 육체 가져와 비유 리듬 증폭시켜

 

삶을 언어로 건축하면서 자기를 실현하려는 노고가 반갑고 고마웠다. 한미정의 거베라에 대한 경배2, 이영숙의 아침이 검고 정오는 무심하고 저녁은2, 이희복의 이소4, 김혜린의 작약3, 김해인의 펜치가 필요한 시점2편을 가려내어 거듭 읽었다. 한미정의 시편은 사물에 투사하면서 가족 이야기를 기술하는 솜씨가 좋았고, 이영숙의 시편은 외부를 자기의 사건으로 시화하는 과정이 성실했으며, 이희복의 시편은 몸을 지닌 삶의 고단한 일상을 시적 언어로 잘 육화하였다. 모두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작품들이다. 남겨진 김혜린의 시편은 진정한 관계를 염원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김해인의 시편은 노동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를 성찰하는 발화가 진지하였다. 김혜린의 시편과 김해인의 시편을 두고 우리는 망설였다. 마음의 무늬에 상응하는 전자의 생생한 이미지들이 우리를 붙들었고, 경험의 구체성을 담보하는 언어의 명징함을 지닌 후자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둘을 모두 신인으로 내어놓아도 좋을 만큼 시적 성취를 보였기에 우리의 선택은 지체되었다. 마침내 이미지의 미학보다 구체적 삶의 언어로 기울었다. 김해인의 펜치가 필요한 시점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공구와 더불어 노동하는 육체를 말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노래하였는데, 처음에서 중간을 지나 끝에 이르기까지 시적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 의미를 증폭하는 비유와 리듬을 잘 형성하였다.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구모룡 평론가, 성선경 시인

...............................................................................................................................

 

 

2024년 국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해변에서/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아니 그것은 죽은 것

혹은 벗어놓은 것

떠밀려온 것

유유자적

흘러온 것

눈알은 하나뿐이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메마를 것 같다

언젠가

미끈한 눈웃음 짓던

사람을 사랑한 고래가 그랬듯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무언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막 내던져진

작은 눈빛

오늘은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

어디에도 흐린 곳 하나 없다

너무 밝다

최선을 다해

기지개 켜는

눈알의 의지

심사평

이번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이는 심사위원 세 명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 이유로 본심에서 논의될만한 작품들을 고르는 과정도 치밀한 독서가 필요했다. 시간도 오래 걸렸다.

 

공들인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속에서 변기는 가능합니다2, ‘통증2, ‘홀리데이 페퍼민트 캔디2, ‘해변에서2, ‘수저통2편을 골랐다. 열띤 논의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해변에서2편과 수저통2편이었다.

먼저 수저통2편은 시를 풀어나가는 안정된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대상의 슬픔을 환유적 비유로 풀어내는 능력도 좋았고 이를 감상적으로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공감도 높은 이미지와 생활 감각 속에서 충분히 설득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려냈다. 또한 대상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고도 능숙하게 다가왔다.

박유빈의 해변에서2편은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었다. 특히 당선작 해변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닷가에 떠밀려온 눈알이라니!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정말 눈알이다. 이 낯선 설정을 끝까지 기이하면서도 설득력있게 풀어나가는, 차라리 힘을 뺀 화자의 태도가 더 신뢰감을 주었다. 거기에 상처와 고독, 사랑의 슬픔이 자연스럽게 겹치도록 풀어내는 과정은 읽으면 읽을수록 흡입력이 있었다.

최종 결론은 빨리 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낯선 상상력에 점수를 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마음을 담아 축하를 보낸다. 이 응모자가 펼쳐나갈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기대된다.

심사위원=김언 박상수 최정란 시인

당선소감

비몽사몽 상태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다. 나는 덤덤했다. 당선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해 왔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당선이라는 기차역을 지나왔을 뿐이다. 그냥 그런 거다.

산책이 좋은 이유는 무겁지 않아서다. 가끔 나는 시가 산책 같다고 느끼는데, 무겁지 않은 느낌이 시와 산책의 공통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는 조금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힘이 많이 들어갔네, 어쩌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시란나다울 수 있는 가벼운 산책이어야 했다. 시는 언젠가는 제대로 해낼 산책같다. 정말로, 반드시, 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끝내주는 산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나는 그게 시였으면 좋겠다. 돌아갈 집이 없어도 괜찮다. 이건 그냥 산책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종국엔 시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이상한 자신감이 있다. 멀고도 가벼운 나의 산책, 시와 아는 사이가 되어 매 순간 나를 스치는 느낌을 반기면서.

함께 문학을 공부한 친구들과 동창들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너희와 했던 모든 산책 덕분에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문학을 택했을 때 무턱대고 나를 지지해 준 우리 가족에게도 고맙다. 산책하는 마음은 우리 가족으로부터 만들어졌으니까.

심사를 봐주신 김언, 박상수 그리고 최정란 시인께도 감사하다. 시를 알려주신 이승하, 이수명 그리고 김근 교수님께도 감사하다. 정말로 감사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시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송승언 선생님께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시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선생님 덕분이겠다고, 좋은 시가 아닌 산책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겠다고. 공부하는 동안 기뻤다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박유빈 시인

2000년 양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

 

 

 

2024년 경남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머그잔/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심사평]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 출렁이는 물로 잘 비유

오늘 열심히 걸어서 자정에 당도하면 다시 오늘이 시작되듯이 시를 열심히 써서 어떤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많은 시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를 이해한다고 하면 시는 이해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면서 또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지난한 여정이 담긴 시들이 1300여 개의 층계를 이루고 심사자들의 눈앞에 조금은 긴장한 듯 당당하게 도착해 있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 한 편을 가리는 작업은 꽤 고통스런 일이었다.

한 실직자의 허무를 눈사람과 그림자로 풀어낸 눈사람과 그의 그림자는 조금 촘촘한 듯한 문장들의 보폭이 아픈 돌팔매질이 되었다가 스르르 중력을 잃고 길 가 어딘가로 굴러가버리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시적 인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서술어의 처리를 조금 더 고민해보면 아주 단단한 시가 될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물어 잇자국이 선명한 사과의 흔적으로 너와 나의 관계의 현상들을 그린 사과의 저녁에 묻은 흙이 오래 눈에 남았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저녁을 조금 더 들어가 보았다면 말 할 수 없는 깊이에 누구라도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고민 끝에 우리가 맨 위에 올린 작품은 머그잔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도 너무 많은 주체의 역할을 요구당하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을 출렁이는 물로 비유하고 있는 점에 마음이 갔다. 높이 치솟아오르거나 좀 더 따뜻해져야 하거나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는 세계의 요구를 한 컵에 담아 흔들어버리고 싶은 반항이 감각적 성과를 높이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손에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작품들을 아쉬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뻤고 좋은 시를 향해서 가끔은 에두르고 에두르다가도 그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다시 시작하기를 담담히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시의 층계들이 제각각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우선, 맨 앞에 놓인 머그잔에 주저없이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성윤석·조말선

​​

[당선소감] 작은 틈 속으로 묵묵히 내 이야기 담아낼 것

가끔 내가 나를 보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성인이 된 내가 어린 나를 한자리에 모아서 생일 파티를 한다거나, 변기에 앉아서 양 떼들을 불러들인다거나, 볼일을 다 보기 전에 바지를 올려야 하는 순간이 생기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큰아이 대학 합격 소식을 받은 후,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천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에 적어뒀던 단어들과 문장들을 바라보면서 시가 맞는 것인지, 시라고 우겨도 되는지, 끊임없이 의심했던 자신에게 당선 전화는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게 작은 틈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 틈 속으로 묵묵히 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도록, 내가 가진 마음을 편한 일상으로 말하는 글,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되는 게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 쓸모없는데 시로 읽었을 때 재미있는 글을 써나가겠습니다.

시에 대해 질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신 김륭 선생님,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아들 정민, 정훈. 친구 같은 조카 동원, 은경, 경빈, 근영 많이 사랑합니다. 나의 유일한 수다 친구 경란에게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여행 친구 미경 오래 다니자. 그 외에 가족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경남신문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박태인 시인:1977년생, 김해 거주

...............................................................................................................................

 

 

 

202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아오른 지하/황주현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

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심사평]재난 현장을 과격하지 않고 따뜻하게 파헤쳐

예심을 거쳐 열 세 분의 시들이 보내졌다. 어떤 분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중 한 분만 선()하라는 임무이니 악역인 셈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그냥 내려놓게 되는 시들과 거듭 읽게 되는 시편들로 나뉜다.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또다시 읽어가다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그 기준이란 게 있다면 쓴 분의 마음이 읽을수록 점점 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들이다. 그 글 속 마음이 우리네 삶의 맨살결이라고 불릴 만한 실감으로 다가오게 되면 끝까지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올해의 당선작은 솟아오른 지하. 재난의 현장을 차분한 시선으로 파헤친다. 그러나 과격하지 않다. 견고하게 질서 짓는 문장은 문학적 수련의 깊이를 짐작케 하고 그 시선의 따뜻함은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한 흔적이다. ‘솟아 오르고 있는 감염된 권력과 성장의 이면에 도사린 검은 재난(지하)의 그림자는 지금 우리의 내외면의 강렬한 은유로 읽힌다.

끝까지 견준 작품은 거울 일지외와 향기로운 못외 등의 응모자였다. 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쓰시리라. -장석남 시인

[당선 소감]황홀한 불면을 당분간 즐기고 싶다

​​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김수영 구름의 파수병’)는 아직도 산정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자신이 없었다. 날아가는 제비를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했으나 그마저도 부끄러운 저녁은 불을 켜지 못했다. 시로서 고백하고 시로서 반성하고 시로서 다시 꿈꾸는, 시와는 반역된 생활은 누추하고 게을렀지만, 때론 치열했다.

너무 치열해서 자주 허기졌던 불혹의 변두리에서 시도 굶었다. 시와 각방을 쓴 20년의 세월이 통째로 훅 직선으로 지나갔다. 어둡다기보다 캄캄한 저녁은 몸 뉘기에 바빴다. 사방 흙벽이 조금씩 햇빛의 두께만큼의 유리창으로 갈아 끼워지는 동안 몸은 고단한 필체로 시()를 써댔을까. 오래 굶었는지 시는 군불을 때면 혓바닥으로 춤추는 굴뚝의 연기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다시 짓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바짝 들어간 힘을 빼고 키 낮은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골방의 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의 골방은 불면으로 환해서 바깥 풍경들이 그대로 내게 들어와 목판화 속처럼 돋을새김 되곤 할 것이다. 이 황홀한 불면을 당분간 즐기고 싶다.

오랜 식구 같은 화성문협문우들과 시의 꼬인 덤불을 쉽게 풀어주신 윤석산 시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풍산초 43기 벗들과 지겹도록 어깨동무하고 있는 안동 경안고 문우회와 맥향문청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상일보 신춘문예를 열어주신 분들과 솟아오른 지하에 따뜻하게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들께 두고두고 영원히 진심으로 감사한 맘 아끼지 않겠습니다. 불러 본 기억이 없는 내 이름도 불러 봅니다. “주현아 고맙다.”

황주현:경북 안동 출생, 화성문인협회, ‘동인

 

2024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화살표의 속도는 / 황주현

 

걷고 달리고 날아가는 속도다 화살표는 정지해 있으면서도 계속 이동 중이지만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없다

 

화살표에서는 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날까

 

궤적에서 공격성이 자란다 사활을 건 뾰족한 모양이 머리인지 입인지 코인지 궁금해 한 적 없지만 그것이 가끔 말을 하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한다

 

화살표는 계속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도망가고 사라지려 한다 몇몇 동물들은 그런 표와 비슷한 외모를 노력 끝에 얻었지만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화살표를 발명한 사람들

혹은 진자운동처럼 00 사이에거 태어나고

그 사이를 무한 반복한다

 

꼬리에 두느냐 머리에 두느냐를 고민하는 동안은 이미 한참이나 날아 온 거리다 어떤 사람에게선 이미 녹이 슬거나 그 끝이 뭉툭해진 화살표가 무더기로 발견되고 또 어떤 사람에겐 마치 새싹처럼 이제 막 돋는 일도 있다

 

빗나가는 과녁을 가진 것들도 많겠지만

명중이라는 끝을 두고 있다

공중에 초록을 박아 넣고 이리저리 여진을 앓고 있는

저것들, 혹은 그것들

 

지금도 화살표를 가로 막거나 되돌려 놓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단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살표를 조종하는 또 다른 화살표를 개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심사평:일상적 언어로 깊은 울림의 사유 이끌어내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해서 올라온 작품은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이 많았다. 신춘문예 작품의 성향과 경향을 대변했던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독자와의 소통도 염두에 둔 작품이 많았다.

 

전체 응모자 263명이 보내온 작품 1338편 중 1차 예심과 2차 예심을 거쳐서 올라온 작품은 모두 26편이었는데 최종 후보작은 세 편이었다. 황주현의 화살표의 속도’, 00밑줄의 강도’, 00국수광합성이다.

 

00밑줄의 강도에서는, 강조하기 위해 그어놓은 밑줄이 가지는 힘을 얘기하고자 했다. 유의미한 밑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이거나 함정일 수도 있다. 그것을 피하려다가 낭패하거나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가 강제하는 규범이나 프로파간다가 그 밑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밑줄의 순작용과 함께 그 모순과 부작용을 그려내려고 한 작품이다. 자유연상에 기초하여 이질적인 소재와 관념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언어사용이 돋보인다.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사용도 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적 진술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질문으로 완성되거나 어떤 유기적 의미망으로 입체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직소퍼즐 윌리를 찾아라에서 너무 많은 윌리가 아닌 것을 소거해야만 윌리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시의 중심에 닿기 전에 너무 많은 허들을 지나야 한다. 개인적 언어사용이 독자와의 소통에 장애가 되지 않는 지점을 잘 찾아내면 충분한 성장의 가능성이 보인다.

 

00국수광합성도 심사위원들의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광합성은 식물이 그 생명을 에너지를 얻기 위해 햇빛을 매개로 한 화학반응이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얻는데 여기서는 국수가 그 매개로 등장한다.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화해시키는 작용을 한다. 국수는 일종의 치유를 위한 레시피이다.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흐름을 유지하면서 화해라는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드러나지만, 한편 그 점이 이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격식체인 해요체종결어미라든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순조롭게 화해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함께 제출한 무지개 고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시가 품고 있는 따뜻함이나 안온한 정서가 매우 잘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적이지 않다는 점은 신인에겐 흠결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황주현의 화살표의 속도에 심사위원들의 집중적인 관심이 모였다. 도로 위나 공사장 벽 지하철 계단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화살표에서 간단하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힘이 만만치 않다. 화살표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게 한다. 걷거나 뛰거나 날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문명을 가리킬 때는 공격성을 가진 짐승이 된다. 그 속성으로 보아 욕망이라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문명, 혹은 욕망의 기표라 해도 무방하다. 계속 움직여야 하는 생래적 운명 때문에 사라지거나 멸종하기도 한다. 그러나 없음0과 없음0 사이에서 무한 재생산된다.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애초부터 제거되어 있는 이 화살표로부터 반성 없는 문명의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정작 아픔에 대해서 말한 바 없지만 치명적인 관통상으로 우리는 앓고 있다.

 

작위적 언어 조합으로 생경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대신 관절이 유연한 일상적 언어로 깊은 울림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한 줄기로 꿰어지는 서사가 없어도 느낌과 의미의 입체적 재구성에 문제가 없다. 통찰의 힘이 느껴지는 시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도 고른 질을 유지하고 있다. ‘우산이라는 계절, 가령 우산이라는 발명된 문명의 도구가 거꾸로 본래 있었던 계절을 환기하고 인간의 의식과 언어를 규정하기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본말이 전도된 모순적인 현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황주현의 작품은 실험적인 시들이 가지고 있는 소통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 깊은 의미의 울림을 가진 시를 쓸 역량으로 평가된다. 이에 심사위원 전원은 화살표의 속도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심사:강희근(위원장),복효근(심사평), 박우담, 김성진, 채수옥

 

 

당선소감:고교 문예반 활동으로 글쓰기 시작

 

당선입니다라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그다음 말을 놓쳤다.

그 짧은 찰나는 시의 연과 연 사이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여백이었고 행간에 던져진 쉼표의 행렬 같은,

 

살면서 이렇게 준비 안 되는 일도 생기다니.

살면서 또 이렇게 기습적으로 벅찰 수도 있다니.

끈질기게 시()를 놓지 않은 시간에 대한 시()의 의리 있는 화끈한 화답이었다.

신춘이 지구의 온난화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가.

뜨겁다 못해 얼어붙은 몇 날 며칠 내 몸에 더운 꽃들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봄의 화살이 너무 일찍 당도했다.

 

화살표는 지나온 시의 계절 쪽으로 좌회전, 우회전, 돌아가시오로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나의 심상은 오래도록 한곳에 정차하지 못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끌고 다니고 가끔은 몰아붙이고 또 가끔은 던져두고 사라지곤 했다.

행방이 묘연한 시의 궁핍이 어딜 가서 진득하게 노숙할 수 있었겠나.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일로 나의 화살표는 시의 마을엔 자주 연착이었지만 어김없이 안개 걷힌 맑은 새벽에 당도하여서는 또 환한 출발이 되곤 하였다.

 

신춘문예라는 네 글자는 고유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려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싱싱한 동사다. 포장 안 된 자갈밭과 함부로 꽃 피지 않는 모래밭을 맨발로 뛰어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면아직은 쓸만한 무소의 심장이다, 그 심장을 심심치 않게 놀릴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신춘을 활짝 열어 주신 경남도민신문과 화살표의 속도에 따뜻한 손을 잡아 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삼시세끼 꼬박 밥을 갖다 바치는 내 안의 해인 순흥 안씨 미경!,

최고로 미안하고 고맙다.

윤서, 정후는 나의 예측의 별이다.

 

꽉 찬 배추 속구배이 같은 시퍼런 지원군인 나의 칠 남매 형과 누나들, 이 모든 나의 가족이 진정 내겐 영원한 신춘임을 자랑하고 싶다. -황주현

 

[인터뷰]

시는 세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공감의 속도가 짧은 시를 쓰고 싶어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경기도 수원에서 자영업(생활용품 전문할인점 다팜 아울렛대표)을 하고 있는 황주현입니다. 화성문인협회 회원으로, 그리고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당선 연락을 받고 한 3일간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신춘문예를 도전했습니다. 목표는 최종심에 한곳이라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년에 딱 한 번만 더 도전할 요량으로 욕심을 비웠습니다. 일주일쯤 지나니 당선이 현실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당선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참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어떤 좋은 일이든 행운이 늘 몇 몫을 한다는 생각과 결과는 겸손하게 받아들이자는 지론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당선작인 본인의 시에 대해 간단히 소개 바랍니다.

당선작 화살표의 속도는 주위에 숱하게 있는 화살표 얘기입니다. 화살표를 통해서 무의식의 세계가 늘 습관과 통념으로 길들여진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일상의 한 단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매장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화살표가 어떤 장소와 위치와 경로를 통제하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객분은 화살표를 본능적으로 믿고 따르고 있지만 이면에 화살표를 부정하고 의심하고 거슬러 가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들을 발견하면서 화살표가 우리들의 일상에 투철한 기능과 역할이 분명 있지만, 역으로 화살표에 철저히 구속된 나약한 인간의 한 단면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요.

세상의 모든 기호나 문자는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들은 단순히 그들만의 보편적인 역할에 그치질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진화하고 발전합니다. 그 진화와 발전의 속도만큼 그것을 활용하는 인간의 기능과 판단과 인지는 좁아지고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시를 처음 쓴 게 언제였나요?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경북 안동에 소재한 경안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문예반 특활활동을 하면서 글쓰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시내 여섯 개의 남자고등학교 학생으로 이루어진 학생문학써클 맥향에 가입하면서 공부보다는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것 같습니다. 정기적인 시화전과 낭독회, 그리고 학교 교지 편집위원을 하면서 글 쓰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때 함께 했던 선후배들이 지금 문단에서 열심히 자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영광 시인, 피재현 시인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대략 발표하거나 보관하고 있는 시가 몇 편 정도나 되나요? 그중 대표적인 시나 특별히 아끼는 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네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하거나 수시로 들여다보고 정을 붙일 시들은 30여 편 됩니다. 그리고 나름 탈고된 작품을 첫 시집으로 엮어도 무방한 작품들은 100여편 되고요. 특별히 애정이 가는 시는 올해 예천내성천 전국문예공모전 대상작인 고평역 가는 길과 경북문예공모전 최우수작인 경북선 물소리 배차 시간표입니다. 경남도민신문 신춘당선작인 화살표의 속도도 이제 저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시를 쓸 때 주로 영감은 어디에서 찾고 시상(詩想)은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딱히 어떤 상황이라기보다 일상에서 언제든 무시로 오는 것 같습니다. 시선이 오래 머물거나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어떤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잔상으로 남아 있거나 표현하지 않았던 날것들이 많습니다. 그럴 땐 즉시 핸드폰에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아니면 한 단어라도 메모해 저장합니다. 아주 강하게 나를 건드리고 놓아주지 않는 어떤 무거운 감정이 솟을 때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시들은 완성도는 좀 덜하지만 투박한 그대로가 좋아 그냥 그대로 탈고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분의 시가 있다면 누구였을까요?

영향을 주신 분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뭔가를 긁적이게 했습니다. 뭔가 긁적인다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글쓰는 습관이 만들어졌고 자유롭고 조금은 각별한 나만의 세계를 만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윤석산 시인님은 오래도록 제게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최근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시편들은 8년 만에 낸 안도현 시인님의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 둘 수 있게 되었다에 수록된 거의 모든 시들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된 순간은 언제인가요.

살다가 넘어졌을 때입니다. 용케 그때 가져다 썼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한 20여 년 동안 시를 외면했지만 늘 시는 제 언저리를 맴돌아 주었습니다. 제게 있어 시의 덕목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요.

먼저 놀라운 사유의 발견이 있는 시입니다. 생소한 경험이지만 낯설지 않은 시입니다. 내 얘기가 아니었지만 내 안으로 들어와 똬리를 트는 시, 그런 시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내려다 보거나 올려다봅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시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시라는 것은 제가 쓰고 싶은 시이기도 합니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거울 앞에 서면 매번 다른 내가 그곳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으로 빠지기고 하고 겹겹의 거울 속에 나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표정으로 쓰는 일기 같은요. 단 하루도 세상은 같은 날이 없습니다. 매번 다른 날씨들은 세상의 표정을 읽습니다. 시는 낮고 높고 쓸쓸하고 무겁고 어둡고 차가운 곳에 유난히 오래 머물다 갑니다. 그런 날은 세상의 거울이 아주 두꺼워야겠지요.

 

-시인 등단을 꿈꾸는 많은 예비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께 선배로서 조언해 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습니다. 전 늦깎이 신춘신인이고요. 이제 막 시작입니다. 함께 손잡고 가는 거죠. 제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굳이 한 말씀 드린다면 끝까지 시를 손에서 놓지 마세요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나요.

공감의 속도가 짧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 한 편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시보다는 공감대의 평수가 좁은 다락방 같은 시, 그리고 다시 그 시를 만났을 때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 결국 독자가 함부로 주인이 되는 시를 쓰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형하선기자·사진/이용규기자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길을 짜다/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져봐 배가 고플 거야

바늘로 빵을 찌르는 제빵사의 손길

먹줄 실 뽑아 바닥을 튕기는 거미의 솜씨

어긋난 선을 바늘이 엮어주면

옷이 한눈에 주인을 찾아, 보란 듯이 걸쳐 줄래, 그거면 충분할 거야

버스는 늘 먼저 떠나

박물관 뒷길은 혼자된 연인만 걸어가지

거기 길이 끝난 곳에 당도하면

길과 길을 잇는 재봉틀이 떠오를 거야

한 벌의 옷을 짓고 거기에다 누군가 몸을 넣는다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머리끝에 꽃이 달리잖아

 

 

당선소감

 

사람이 중요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날것들을 적었다. 시라기보다는 시래기를 엮듯 줄에 묶어 매달아 놓았다. 계속 매달려 있어야 했다. 먹지 못하는 벽을 채웠다. 바람벽 뚫린 구멍으로 엿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 일주일에 한 편의 시를 적었다. 이 한 편을 위해 시집을 한 권씩 밥 먹듯이 읽었다. 비 오는 날 멸치를 종이 위에 놓고 몇 시간을 보았고 영양 자작나무 숲을 찾아가다 돌배나무에 기대 쓰러지는 집도 보았다. 동짓달에 구수한 시래기죽 한 그릇을 대접할 기회를 주신 강원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절을 올리고 싶다. 딱 이렇게만 살고 싶다. 일어나 상큼한 과일 먹듯 세 편을 읽고, 아침 먹고 소화제로 한 편, 점심 때 커피 마시듯 세 편, 졸릴 때 얼음 뜬 감주 같은 한 편, 저녁에 퇴근하며 지나가듯 한 편, 설거지 마치고 정리하듯 두 편, 잠들기 전 돌아보고 한 편! 그리고 꿈속에서 딱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아직은 미흡하고 거칠고 아둔한 상태로 출발점에 서 있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 숨을 가다듬는 중이다. 시를 쓰는 길로 이끌어주신 안도현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고민하며 고칠 수 있도록 옆에서 때려주고 위로해준 글 친구 전정화 선생님, 김경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시는 가족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황영기(52)태백 경상북도개발공사 근무

 

심사평

 

올해도 응모작이 많았고, 수준 높은 작품 또한 즐비해서 심사위원들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조민주의 풍경이 기둥을 세워요’, 허창호의 겨울 미나리’, 황영기의 길을 짜다등이었다.

조민주의 풍경이 기둥을 세워요는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젊은 감각이 가장 돋보였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보고 느끼는 풍경의 변화와 배우가 되고 싶은 이모의 삶을 교차해 나가며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솜씨가 빛났다. 특히 화가처럼 발달된 색채감각을 통해 시를 감각적이면서 다채롭게 직조해 나가는 능력이 뛰어났다.

허창호의 겨울 미나리는 겨울 미나리의 생태를 비유의 뼈대로 삼아 삶의 고단함을 그려낸 작품으로, “시퍼런 울음을 자주 삼키면 부드러운 줄기가 됩니까?”라는 구절처럼 비유의 자연스러움,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 역시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유연하고 구성이 단단하여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았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황영기의 길을 짜다는 제목 그대로 길을 짜가는 열린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읽는 이에게 감상의 즐거움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매력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묵호항등의 작품도 리얼한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숙성된 표현들이 빛을 발하고 있어 오랜 습작을 거친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홍섭·장석남 시인

..............................................................................................................................

 

 

2024,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물집/우정인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둥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불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 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주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린다 여섯 개 만원이요 붉음이 노랗게 벗겨져 후회로 바뀌는 순간은 아주 크고 둥근 것이라서 나는 하루에 한 알이면 일주일은 먹겠네, 재빨리 지갑을 열었다 사내가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담는다 아랫배가 축 처진 봉지에 담긴 사과가 둥근 물집 같다 나도 터뜨리지 못한 물집 같은 저녁

 

 

심사평-안정적 시 세계 구축변용·확장 돋보여

 

202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180명의 914편의 시가 응모하여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 중 본심에 오른 16명의 작품들은 경기 침체와 청년 세대의 비관적 현실과 소통의 부재를 다룬 작품들이 많았으며, 시 창작의 고투와 사유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어 또한 반가웠다.

 

본심 심사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논의 대상으로 거론된 작품은 '스베뜰라나', '찰칵찰칵', '둥근 물집' 3편이다. '스베뜰라나'는 장시임에도 매력적인 진술 방식과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다만 화려한 수사와 달리 주제의 선명도가 다소 미약하고 작위성이 강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찰칵찰칵'은 사물의 이면을 개성적으로 포착하는 시선과 감각적 문장을 강점으로 꼽을 수 있었다. 다만 주제가 미약하고 응모 작품 간의 편차가 있어 아쉬웠다.

 

'둥근 물집'은 시적 구성과 시어 운용이 소박한 반면, "사과"가 견인하는 식물적 이미지의 변용과 확장이 돋보였다. 또한, 타자와의 소통의 좌절을 통해 현대인들의 소외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응모한 시편들이 고른 수준을 선보여 안정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 식물적 이미지들이 매개를 뛰어넘어 시에서 존재의 가변성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둥근 물집'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자에게는 큰 축하를 드린다. 그리고 작품을 응모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서안나 · 문태준시인

 

 

당선 소감누군가의 마음에 불쑥 찾아들 시 쓸 것

 

제게 시는 불청객이었습니다. 어느 날 불쑥, 제 방문을 밀고 들어와 저를 울게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요. 한 권, 두 권 시집이 늘어나고 책장에 시집이 가득해질 무렵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는 제 방을 나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시를 쓰는 일은 호락호락 하지 않아서, 얼마만큼 저를 드러내야 하는지, 무엇을 얼마나 숨겨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갈팡질팡하는 제 마음이 전해졌는지 올해는 '네 삶을 함께 보자'며 좋은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이제는 저를 조금 드러내어도 될까요. 이 무례한 시와 겨루어도 될까요.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는 일이 미래의 고통일 수도 있겠으나 이 문을 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누군가의 마음에 불쑥 찾아드는 무례한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기쁜 소식과 함께 찾아든 아버지의 병환이 문 뒤에 있었을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쾌유를 간절히 빕니다. 그리고 늘 저에게 용기를 주시는 지도교수님과 학과 교수님들,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해는 제게 좋은 소식이 많았는데 모두 '덕분'입니다. 함께 삶을 습작하는 시반 식구들, 응원을 보내주시는 시시각각선생님,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많은 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키다리 아저씨와 소연, 준우, 고맙고 사랑합니다. 울타리 안에 따뜻한 바람이 일겠습니다. 오늘은 식탁가득 향기로운 냄새를 올리겠습니다.

 

우정인 시인: 1966년 경남 울주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4년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hwp
0.18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