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은 시 보기 (5편)
론리 푸드 外4편 / 임지은
식초에 절인 고추
한 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
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
외투에 묻어 있는 사소함
고개를 돌리면
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이미 배가 부르니까
천천히 먹기로 한다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무구함과
소보로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무서운 이야기
나는 무서움이 할머니만큼 좋았다
깜깜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걸으면 걸었고 내가 멈추면 멈췄다
시체를 파먹는 귀신이나
목소리로 아이들을 홀린다는 장산범은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살았는데
모르는 그림자와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얘야,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단다
할머니는 글씨를 읽을 줄 몰랐다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떠나 본 적도 없었다
어느 날, 아이가 생겼다
호랑이를 닮은 첫째와 호랑이를 삼킨 둘째와
호랑이를 물리친 셋째와 호랑이를 물어온 넷째...
그런데 얘야, 요즘 세상은 다르지 않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요, 할머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칼을 만지작댔다
그것은 누군가를 찌른 적이 없었지만
누군가를 찌르게 될까봐 더 무서웠다
움켜쥔 손을 펴자 여자라는 단서가 또렷해졌다
남자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할머니, 이제 무서움은 이야기 속에 없어요
다리를 달고 거리를 걸어다녀요
나는 남자가 사라진 곳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다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의 도서관
빌린 적 없는 책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노인을 바다에 돌려보내는 심정으로 도서관에 간다
페이지를 넘기면 어깨에 변덕을 두른 애인이 있다
오늘은 화난 기분을 생선 살처럼 발라 먹는다
어제는 슬픈 기분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오늘은 화난 기분을 생선 살처럼 발라 먹는다
바깥에게 안을 들켜버리고 싶은 창문의 기분
스스로 열리고 싶은 자물쇠의 기분
흘러내리고 싶은 콜라의 기분
정숙이라는 단어를 보면 요란을
집어삼킨 정숙이의 기분이 궁금해지고
조용함이 햇빛을 깨워 그림자를 만든다
높게 쌓아 올린 모서리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열대어를 줍는다
계단은 다음 칸을 잃어버리기에 알맞은 구조
빌린 적 없는 바다를 반납하며
물기 없는 지느러미를 주머니 속에 넣어본다
그건 나 자신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 손바닥의 기분
빈 가방을 견디고 있는 어깨의 기분
한없이 구부러지는 철봉의 기분
하루 중 가장 얇은 페이지가 찢어진다
부록
땀에 젖은 문장으로 내달릴 것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으로
순간을 찢을 것
벤치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골몰하다
잠시 모자 속에서 꺼낸 날씨를 산책한다
이리로 가지 마시오
구름으로 가시오
같은 기분 위에 서 있는 오후
사과나무의 기분은 좀 멀고
방향 표지판의 기분과는 가까운
생각을 얼마나 멀리 던지느냐가 이 산책의 관건이다
목줄보다 긴 그림자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산책의 부록이다
날아가기 직전의 모자처럼
바람에 기대앉아
밑줄 가득한 햇빛을 넘긴다
그러니
두 다리를 잃어버릴 것
처음 듣는 음악으로 조깅할 것
지루한 생각을 열고 뛰어나가는 개처럼
첫 문장은 시작된다
과일들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
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렌지였다
나는 덜 익은 오렌지를 밟고
노랗게 터져버렸다
가끔은 푸른 안개가 묻어 있어도 좋았다
이제 나는 오렌지가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박스째 진열된 과일 가게에 갔다
기다린다는 건 잘 익은 바나나
지갑을 열고 거짓말을 꺼냈다
딸기였다
손바닥 위에 씨앗 코끼리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분홍의 과즙
딸기 속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거짓말이
어떤 세계의 바다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오렌지 속에 코끼리를 넣고 나왔다
<<임지은 시인 약력>>
*1980년 대전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같은 과 대학원 졸업.
* 201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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