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 _ 축일(외 5편)/ 정재율
심사위원 : 박상수, 신용목
축일 (외 5편)
정재율
옷장 안에서
그러니까 그때
한참 동안 나가질 못해서
나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옷장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벽에
혀가 닿았다
우리 집 개는 내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데
겨울 내내 쓴 일기장도 다 숨기지 못했는데
친구들아 내가 만약 죽으면 너희에게 내 만화책을 몽땅 나눠 줄게 그러니 싸우지 마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옷걸이 대신 빗장뼈를 가지고 놀았다
걸 수 있는 건 다 걸자
다행히 바지는 입은 채로
체면 같은 게 있으니까
어두운 천장을 보는 일도 하나의 슬픔이라서
혀에서 니스 맛이 났다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나면 덜 아프대
그러려면 옷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셔츠에서 셔츠로 코트에서 코트로
나는 보조개가 두 개라서
사랑을 두 배로 받은 아이인데
일곱 살 때 생긴 흉터를 아홉 살 때 생긴 거라고
부모님이 우겼다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니?
그래도 밥은 잘 먹잖아요
추문도 없이
언제 들어간 것인지 모를
그러니까 그때
부활절인지도 모르고
옷장 깊은 곳에서 새 양말을 발견했다
홀
물을 주세요
내일은 날씨가 괜찮을 거예요
조금 자란 화분을 가꾸는 일은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
어떤 새는 자기가 판 구멍에
부리를 박고 죽기도 한다
바다에 간 적 없지만 바다 냄새를 아는 우리와
창밖에는 너무 많은 우산들
추락하는 새
운동장에는 구멍이 많다
친구는 태풍이 올 거라고 말했다
남아 있는 친구들과 내기를 하고
점심시간에 먹지 못한 우유를 꺼내 마셨다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
그런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되고
두 손 가득
쏟아지는 사탕
명찰을 만지작거리는 얼굴들이
걱정스럽고 다행인 순간
우리의 이름을 칠판에 적자
쏟아지는 창문에
새 한 마리가 머리를 박았다
너도 집으로 가지 못했구나
오늘 밤엔 우리 모두 깊은 잠을 자도록 해
새는 따뜻했다
친구들은 누군가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다
새를 돌보는 동안
줄기가 자라고 잎이 생긴 강낭콩과
파도에 무너질 것을 알지만 모래성을 쌓는 사람들
태풍이 오는 사이 몇 명이 사라졌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새를
운동장에 묻어주고 왔다
그래도 괜찮은 날 같아서
누가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이제 집에 가야지
우리 중 누구도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푹푹 빠지는 서로의 몸을 쳐다보았다
고해성사
배가 고프지 않았다
새로 산 향초에
불이 잘 붙지 않았고
오늘 오후엔 분명 눈이 내린다 했는데
옥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장면이 바뀌었다
어느 날은 해변이었다가
어느 날은 성당으로
나는 파도를 생각하고
수평선에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도 꺼내 입었다
내게 주어진
깨끗함에 대해 생각하다가
스웨터에 보풀이 많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떼어내려고 하면
떼어지지가 않고
유원지에서 바람개비를 놓쳐버린 아이와
사진기가 없는 가족들은
유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죽기 전 무엇을 하고 싶냐고 내게 물었다
마중을 나갈 거야
눈 내린 성당 밑으로
잠들어 있는 하얀 개들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더 이상 뒤척이지 않고
만약 천국에 갔는데
내가 나빠지면 어떡하지 한참을 생각했다
▲ 정재율 / 1994년 광주 출생. 한양여대 문창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 중. 2019년 《현대문학》신인추천 시 당선.
* 발표된 당선작은 '축일' 외 5편이지만 여기에는 3편만 올립니다.
⸺월간 《현대문학》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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