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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평설-40년의 그리움, 심장꽃 / 나민애

시치 2018. 10. 12. 00:17

김승희 평설-40년의 그리움, 심장꽃 / 나민애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사랑한 태양이여



                                   나의 생(生)이 가면의 얼음같이

                                                          되지 않기 위하여

                                     영원한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김승희, <태양미사>

                                  <태양미사> 고려원, 1979 중에서


1. '김승희'라는 이름의 다른 수식을 위하여


 많은 이들에게 김승희 시인은 시대의 여전사였다. 그들은 김승희의 시를 고통의 단말마이며 절규라 여겨왔다. 때문에 사람들은 상상한다. 이 시인의 목소리는 핏빛이며 눈빛은 어둡겠구나. 절망의 심연을 걷고 있는 자로서 심연 속에 살겠구나.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과연 김승희 시인은 고통과 절망의 노래를 불렀을까. 이번 새 시집은 이 강렬한 규정을 강렬히 부정한다. 그에 대해 멀리서 듣지 말고 가까이 읽어보라. 읽어보면 알게 된다. 내가 읽은 김승희 시인은 어둠이 아니라 빛을 뿜는 순백의 나무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만난 김승희 시인은 날카로운 무기가 아니라 나뭇가지나 꽃을 들고 있었다. 내가 본 김승희 시인은 핏발 선 눈으로 증오하지 않고, 맑은 눈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 시집은 그 빛과 꽃과 사랑의 최대화로 태어났다. 그러나 단지 밝고 아름다운 미학적 화원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김승희'적인 방식으로 이 최대화는 전개되고 있다. 시인이 그간 보여주었던 시적 세계의 문법, 즉 삶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위트가 여전한 채로, 그는 매우 독특한 시간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김승희'적 다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날카로운 비판이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면 모순적이겠지만,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의 비판은 지극히 사랑스럽다. 빛과 꽃이란 원래 밖에 있는 것이어서 두 눈이 발견했다고 말해야 옳지만,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의 빛과 개화는 시인의 손끝과 내면에서 이루어 진다.

 자기 시력(詩歷)의 종합과 변용이라는 의미에서 이 시집은 김승희 시인 개인에게 있어 상징적인 작품집이 될 것이며 내적 시력(視力)의 최대화라는 의미에서 이 시집은 김승희를 읽은 이들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집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시인 김승희는 한결같으며 또한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고통의 분출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김승희에 대한 오독이다. 김승희 시인은 무녀나 시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그를 규정하는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김승희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과거의 모든 수식을 걷어내고, '전해져온 김승희의 이름'이 아니라 '전해져갈 김승희의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떠나 다시 읽으니 과연 그는 아픈 시인이었던가. 아픔이 이렇게 찬란하기도 하던가. 고통이 이렇게 아름답기도 하던가. 이 시인은 절망과 비극 위에 서 있지 않다. 그가 거한 곳은 빛이고 그리움이다. 그가 바란 것은 희망이고 사랑이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에 가득 채워져 있다.


2. 꽃씨가 빙하를 건넌 시간, 적어도 40년


 '시인의 말'을 들여다 보니, 시인이 두 눈을 들어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겠다. 응당 차갑기 마련인 비관적인 시선이 왜 따뜻하게 느껴지는지도 알겠다. 지금 시인은 '희망의 딸'들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희망이 추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세상의 모든 꽃들"을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이 말이 암시하듯, 이번 시집의 핵심은 '꽃들'에 놓여 있다. 많은 꽃들이 화사하게 만발하여, 이 시집은 역대 가장 향기로운 화원으로 기억될 것이다.

 만약 이 화원을 처음 만나는 독자가 있다면, 꽃의 색채와 향기에 취하지 않기를 권한다. 김승희 시인의 꽃들은 색채와 향기로 인해 채택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와 깊이로 인해 밀어올려진 것이다. 나아가 이 시집의 꽃들이 봄이나 대지가 만든 결과물로서 우연히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집에서 피어난 모든 꽃은 그녀의 시각성에 포획된 외부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가 키워내고 시인의 눈이 꺾은 것이 아니다.

 김승희의 꽃들은 그 누구도 아닌 시인이 직접 심고 키운 것들이다. 게다가 이는 땅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과 마음에,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심어진 것이다. 그의 첫 시집 <태양미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그때 이미 시인이 꽃씨를 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지난 40년간, 오늘의 꽃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1979년 김승희 시인의 문학사적인 시명(詩名)을 새겼던 최초의 시집에서 그는 심연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고통의 언술이 강하게 읽혔던 그 시집의 제목은 고통에 바쳐져 있지 않았다. 그가 고통을 넘어 바랐던 것은 희망, 아픔을 넘어 품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어둠이 아니라 빛을 추구하는 내면을 시인은 '태양병'이라 이름을 붙였다. 어둠을 딛고 태양을 사랑했던 일을 일러 '태양미사'라 불렀다.


우리는 똑같은 빙하였지만

나만이 한 송이의 구근을

꽃피우기 시작했지

오, 나만이.

          -<천왕성으로의 망원(望遠)> 부분


 이 시점에서 40년 전의 시를 호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시집은 과거의 모든 시편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어떠했나 시인이 첫발을 떼던 그때는 '빙하'였다. 빙하는 얼음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부재가 결정하는것, 태양이 자취를 감추었던 어둠의 세기에 시인은 꽃씨를 심었다. 발아가 가능해서 심었던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불가능하기에 심었다. 49년 전 그때, 꽃으로 피어날 오늘의 시집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 어려운 시기에 시인은 씨앗을 비춰줄 태양을 찾아다녔다. 이렇듯, 빙하의 시기에 꽃을 심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고통'이라는 두 글자로 담아낼 수 있을까. 이러한 희망의 전언을 어떻게 '절망'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김승희는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는 심는 자요, 피워내는 자였다. 그리고 심은 것의 피어냄을 위해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태양을 바라는 자였다. 김승희 시인은 온전한 항일성의 시인. 이 점은 과거의 시로부터 오늘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증명되고 있다. 1979년, 아니 그 이전부터의 모든 여정을 펼쳐놓으면 오랜 시간 그가 고통으로 사랑의 씨앗을, 아픔으로 희망의 씨앗을 심었던 것을 알게 된다.

 과거 시인이 심었던 씨앗은 이번 시집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말은 시인이 비로소 웃었다는 말, 결국 태양을 품었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집에 등장하는 두 번의 배롱나무 꽃과 두 번의 알로하 꽃, 맨드라미와 해바라기, 명자나무의 붉은 꽃과 사과나무의 흰 꽃, 몇 번의 야생화, 자잘한 꽃과 큰 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많은 꽃들은 시인이 빙하를 지나온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태양의 부재에 지지 않았다는 확인을 담고 있다. 나아가 이 모든 개화 앞에서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아니, 의아해할 수 있다. 그 오랜 시간, 추워서 햇빛도 얼어붙는 잔혹한 시간을 건너면서 시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태양이 없던 시기에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태양을 꿈꾸게 했던 것일까.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와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흰 구름을 밀고 가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림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 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돌멩이에게 중력을 잊고 뜨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siada)에게 17년 동안의 지하 생활을 하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꽃들의 제사> 전문


 시 <꽃들의 제사>에서 우리의 의문은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다. 보라, 이 시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첫 마음에 바쳐져 있다. 그 첫 마음이란 아마도 씨를 심는 마음이었을 터, 혹은 태양이 없는 곳에서 태양을 사랑한 마음이었을 터. 시인을 그것을 '그리움'이라 부른다.

 이 시는 두근거린다. 첫 단어부터, 마지막 행까지 온통 터질 것 같은 에너지로 차 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참은 한두 번의 언급으로 해결될 수 없었기에 총 9번의 '어떤 그리움이'에 대한 호명을 낳았다. 첫 행에서 시인은 붉은 꽃을 보고 감격했다. 시인은 푸르른 정맥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시인은 흰 구름을 보고 확신했다. 시인의 심장은 햇빛을 보고 팔딱였다. 시인의 손톱을 보고, 돌멩이를 보고, 유충과 소리를 보고, 비행운을 보았다. 결국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불타는 심장'이었다. 에너지의 원천이자 그리움의 수원지이자 시인이 절망과 어둠을 건너게 했던 유일의 등불은 가슴속에 있는 "이 심장'이었다. 우리가 이 고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심장', 늑골 안에 감춰진 심장이야말로, 김승희적 고유명사인 '태양'의 변환체이기 때문이다. 추구의 대상이며 사랑의 희구이던 태양은 이 시집에 와서 시인 내적인 것으로 체화되기에 이르렀다.


3. '생명꽃'의 전언, 아픔이 아닌 치유


 시인이 지금껏 환상과 파격을 통해 보여줬던 모든 시도와 살아 있는 것에의 열정은 '태양'이라는 말로 모아질 수 있었다. 그 태양의 빛을 담아 시인의 눈빛은 빛났으며, 그 태양의 궤도를 따라 시인의 상상은 확장되었다. 과거, 태양은 부재하는 것으로서 시인의 심장을 타오르게 했다. 그런데 그 여정은 이번 시집에 와서 꽃의 개화라는 상징적 사건과 함게 폭팔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 '태양'은 시인의 눈빛과 상상에 담기지 아니하고 심장 안에 박혀 있다. 시인이 추구하던 그 무엇은, 추구의 대상을 넘어 시인 그 자체가 되었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는 추구의 대상이었던 '태양'이 시인의 바깥에 있지 아니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늘에서 타오르는 불덩이가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시 <꽃들의 제사>는 바로 이 내적인 영겁, 희망과 사랑과 가능성의 모든 것을 내적으로 체화한 그 순간을 토해낸다. 그래서 이 시는 두근거린다. 태양이 빛의 속도로 날아와 가슴 안에 박혔으니 시가 뜨겁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절개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바로 눈앞은 아니고 저기 저 앞이다

그러니까 나의 전망은 신의 절개지다

생살이 찢어진 붉은 절개지에도 사계절이 오고

나무뿌리가 지하수를 끌어올리고

새순이 돋아나고 꿏도 피고 열매도 열린다

절개지는 절개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사계절 내내

저렇게 노력하고 잇다

태초에 그리움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르면서

저만치

절개지 너머의 반쪽 산은 절개 너머의 이쪽 산을 바라본다

장마철이면 또 생살이 찢어지던

절개지의 아픔이 시뻘겋게 되살아 흙탕을 치고 내려온다

지금도 펄펄 살아 있는 저 붉은 아픔은

절개지의 절벽 위에 피어난

한 웅큼의 야생화로 스스로 치료하려는 듯

갈 봄 여름 없이 조촐한  꽃들이 피었다 진다

                                                                      -<전망> 전문


 이렇듯 오래 사랑했다는 말이, 시인의 '그리움'이라는 말에 녹아 있다. 태양을 희망했다는 말이, 심장에 담았다는 말로 진화되었다. 그 사랑과 그리움이 기적을 만든 이야기가 시 <전망>에 들어 있다. 시 <꽃들의 제사>가 내적 태양의 벅찬 박동을 담고 있다면, <전망>은 내적 태양의 치유하는 생명력을 조용히 읊는다.

 이 시에 담긴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그런데 그 기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었고, 하루하루의 생이었다. 이를테면 시인이 말하는, 저 평범하지만 위대한 기적은 이렇게 들린다. 아파도, 살았다. 무엇이 올지 몰랐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무뿌리는 뿌리대로, 새순은 새순대로, 절개지는 절개지대로 자신의 할 일을 성실히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이 단순한 사실을 기적으로 퍼올린 것은 시인이다. 그가 삶은 견딤으로서 위대해진다고 믿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살았으므로, 절개지의 인생과 견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승희 시인은 무조건적인 생의 찬미자가 아니다. 그의 세계 인식은 미화보다 냉철함에 가까워 삶을 쉽게 채색하거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법이 없다. 때문에 김승희 시인에게 있어 생은 생 그 자체로 다가온다. 날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이 어디 있을까. 삶에는 즐거움보다 견디고 지탱해야 하는 아픈 자리들이 더 많게 느껴진다. 시인은 아픔과 고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저 절개지가 아프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주제는 '아픔'이 아니다.  김승희 시인이 '아픔'의 시인이 아닌 것처럼 그가 고통이 아니라 고통도 감당케 하는 희망을 노래해온 것처럼, 이 시의 주제는 아픔이 아닌 '그리움'이다. 시인은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상처가 따르되, 그 상처가 오히려 희망을 불러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치지 않는 '그리움'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자신이 생을 향한 그리움을 붙들고 절망의 시기를 건넜듯이, 모든 꽃씨가 개화의 그리움을 붙들고 빙하를 건넜듯이. 그는 저 상처받은 절개지 역시 그리움을 붙들고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이 시인에게 있어 아프다는 표현을 단순한 아픔의 토로로 듣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 고통과 절망은 그것의 전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증명하는 것은 김승희 시인의 목표가 아니다. 대신 이 시인은 고통을 감내하는 그리움이 얼마나 강한지, 아픔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그리움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말하고자 한다. 달리 말해, 자신이 얼마나 태양을 사랑해왔으며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절개지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절개지에게는 패배할 수 없는 이유, 즉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증거로는 절개지는 꽃을 피웠다. 이름 없는 야생생화들이 상처 곳곳에 피어나 아픔의 세월을 봉합한다. 그러므로 이 시를 보면 확신하게 된다. 그리움은 너무도 그리운 탓에 꽃씨를심었다. 그 힘으로 그리움은 빙하를 건넜고 태양을 불렀고 개화를 꿈꾸었다. 그리고 오늘의 그리움은 스스로 꽃이 되었다. 


4. 따뜻하고 붉은, '신성(新星)'의 개화


 얼마나 깊게 사랑했기에, 태양은 저 먼 곳에서 내려와 시인의 심장이 되었을까. 얼마나 오래 그리웠기에, 얼어붙은 씨앗은 비로소 꽃으로 피어났을까. 그간의 모든 시절을 걸어와 탄생한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가 기념비적이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집이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은 온 생애와 마음과 사랑을 바쳐 일종의 '심장꽃'을 피워냈다. 태양을 사랑하던 시인과 시인에게 사랑받던 태양이 일치됨으로 인해 그 개화는 가능할 수 있었다. 그 기적 같은 사실을 이 시집의 모든 꽃들은 속삭인다.


사랑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

손으로 잡으면 늘 다치는 것

사랑은 가슴 위로 떨어지는 피

피하려고 해도 꼭 적시는 것


세상은 온통 배롱나무 꽃 천지

지금은 꽃의 피가

시방 공기에 다 물들었다


앞으로 갈 길에는 주유소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기름이 거의 떨어져가는데

다음 주유소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여기서부터다

주유소가 안 나오면

꽃의 피로 가야지,

못 박힌 자리마다 쏟아지는 피,

오른편 심장 하나 구하려고 배롱나무 꽃그늘에

                          -<오른편 심장 하나 주세요> 전문


 아프게 사랑했던 이야기가, 아니 아프지만 사랑했던 생에 대한 이야기가 이 시의 1연에 담겨 있다. 그래, 아프다면 가지 말까. 이런 회의의 마음에 시인은 꽃을 걸고 반대한다. 기름이 다 떨어진다면 또 어떠랴. 시인의 세상에는 온통 태양의 아이들이 피어나 그리움의 마음을 지지한다. 가기 힘들다면 심장의 그리움을 믿고, 그것이 힘들다면 나무마다 가득 피어난 또다른 '심장꽃'들을 믿고 간다.

 예전에도 시인의 자아가 폭발적인 확장을 도모했던 적이 있고, 그래서 환상적이며 초현실적이다 말해졌지만, 오늘의 시집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그 자아가 확장됨을 확인할 수 있다. 배롱나무 꽃에서 심장을 느끼는 순간, 시인의 심장은 하나가 아니라 가지 끝의 여러 개로 피어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왼쪽 가슴의 심장이 여러 개의 오른쪽 심장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마법이 발휘된다. 자아의 외연은 나무를 타고, 꽃을 타고, 심장을 타고, 덩쿨나무처럼 멀리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자꾸자꾸 시인의 내면 안으로 들어와 몹시 사랑스러워진다. 시인이 '심장꽃'을 피어내기 시작하니, 아픈 세상이 점점 예뻐진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꽃들이 인생의 살 이유와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러면서 시인이 지닌 그리움의 역능은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긍정되기 시작한다.


그냥 알로하 한마디면 된단다

모든 좋은 것은 알로하로 통한단다


심장, 이 부드러운 향기의 힘

난초 꽃 피우며 밀고 올라가는 힘

바다와 하늘이 서로를 비추는 이 유유한 힘

산마루와 골짜기가 서로 사랑하는 이 애절한 힘


오늘은 마음이 구름과 자유를 추구한단다

사랑이나 희망이나

그렇게 너무 어려운 불치병은 모래밭 속에 묻고

기세등등하지 마


알로하,

한마디면 된단다

희망에는 완치가 없지만

절망에는 완치가 있다고

                  -<'알로하' 라는 말> 부분


 이 시는 아주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자의 증언과 같이 들린다. 생각해보니, 김승희 시인에게 있어 시 한 편 한 편은 모두 질문이었고 기록이었으며 증언이었다. 그는 삶이란 무엇인지 질문했고, 질문의 여정과 답변을 기록했으며, 그 끝에 얻은 것을 증언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과거의 시편들을 기억해보자. 어느 시편에서 그는 모래언덕에 올랐으며 어느 시편에서는 가시덤불을 밟았고 또 어느 시편에서는 폭풍우를 맞았다. 우리는 그 시편들을 읽고 삶의 켜켜이 모래와 가시와 폭우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랬던 시인이 오늘 더 먼 곳을, 더 오래 다녀와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알로하'의 개화에 닿기 위해 어떻게 모래와, 가시와, 폭우를 사랑했는지를 전해준다. 시인의 모든 기록 중에서 이 치유의 시는 가장 따듯한 증언이 되어준다.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여행의 끝자락에서 시인은 '그렇다'라고 긍정한다. 그리고 그 긍정의 증거로 꽃 한 송이를 들고 왔다. 그의 답변을 바닷가의 말로는 '알로하' 시인의 말로는 '심장'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심장꽃'을 더 정확히 유추할 수 있다. 꽃이 된 심장은 따뜻하다. 시인의 디테일을 더 보탠다면, 그것은 부드러운 향기까지 풍긴다. 그뿐일까, 그것은 난초 꽃이 피어나게 하며, 산마루와 골짜기를 서로 사랑하게 한다. 시인의 다른 시에서 디테일을 더 얻자면 그 힘은 절개지를 낫게 하고, 좌절한 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

 팔딱팔딱, 작고 힘차고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눈부신 이것은 무엇일까. 김승희 시인의 세계 안에서 그것은 '태양'이고 '심장'이며 '꽃'이다. 과거의 이름으로는 태양인 것이고, 애절함의 이름으로는 심장이며, 절정의 이름으로는 꽃인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는 없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예고된 바 있다. 앞서 빙하의 시기에 태양을 애타게 희구하던 시인의 입으로, 아프게 꽃씨를 심어나가던 찬 손끝에서 줄기차게 예고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일종의 '신선(新星)' 탄생에 대한 보고서와 같다. 하나의 태양이 시인의 심장 속에 꽃으로 태어났다는, 탄생의 보고서, 이 보고서가 깊이 있는 울림을 전달하는 것은 적어도 40년, 혹은 40년 이상이 그 사랑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시인이 얼마나 태양을 사랑했는지 이 시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시간 이상으로 시인이 얼마나 태양을 호명했는지 이 시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태양은 시인의 가슴에 들어와 비로서 시인의 사랑에 응답해주었던 것이다.


5. '심장꽃'을 헌화하는 최후의 제사


 빙하에 꽃씨를 심었던 시인, 아무도 꽃씨를 믿지 않을 때 홀로 믿었던 시인.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태양을 홀로 찾았던 시인. 그 시인이 지나온 빙하의 세기를 기억하기 때문에 이 시집은 아름다운 만큼 좀 서럽다. 꽃이 있었어요, 세상 처음 꽃을 본 아이처럼 활짝 웃기도 하는 이 시집은 벅찬 만큼 많이 서럽다. 시인의 꽃씨는 그간 얼마나 꽃이 되고 싶었을까. 그 간절함은 사랑의 동서남북을 다룬 네 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라더라.

목숨의 제사처럼 하는 거라더라.

목숨은 한 개밖에 없는데

그 한 개밖에 없는 것으로

그 한 개밖에 없는 것을 바치니까

사랑은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된다더라


사랑은 동쪽 사과나무 아래

피 묻은 알몸, 하얀 사과꽃 그늘 아래

산 채로 태우는 다비(茶毘) 같은 것,

번제,

알몸 위에 오래오래 불꽃이 타올라

뼈에 꽃무늬 같은 꽃물결 질 때까지

사랑은 그렇게 기어이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더라

                                                                         -<사랑의 동쪽> 전문


시인이 거한 장소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각각 다른 제사가 이루어졌다. 네 바위가 요청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동서남북이란 세상의 모든 곳을 의미한다. 사방의 제사라는 말은 그가 세상 끝까지 가보았다는 말과 같다. 이 네편의 시에서 시인은 마치 바리데기처럼, 온 세계를 돌며 자신의 인생과 마음을 바쳐 사랑을 추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 첫째, 동쪽에서의 제사가 <사랑의 동쪽>에 적혀 있다. 동쪽의 제사는 번제이다. 태움을 목적으로 한 번제에서 시인이 장작으로 삼은 것은 다름아닌 목숨이었다. 목숨이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나중의 것, 이 최후의 가치를 시인은 사랑의 대가로 바치고자 했다.

 스스로 제물이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결연함과 목숨을 바쳐서 사랑을 증명하는 숭고함은 환상을 통해 미학적 수준으로 승화된다. 이 시편은 분명하고도 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사과꽃이 되는 하얀 환상, 그 몸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붉은 환상, 나아가 하얀 환상과 붉은 환상이 소용돌이치면서 하나의 불꽃이 되는 환상, 이 세 가지 환상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랑의 번제는 거대한 '불의 꽃'을 만들어 간다. 이 불의 꽃이란 태양이 내재화된 결과요, 시인의 심장이 현현된 바, '심장꽃'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심장꽃'의 연원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다. 기원으로서의 첫번째 시집 <태양미사>는 매매가 가능한 서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대출이 불가능한 서고에 있다. 얇고 부서질 듯한 종이 위에, 김승희의 첫 시편들은 마치 고대의 신들처럼 깃들어 있다. 그 세계에서 푸른 말들은 장엄했고, 인간은 비참하고도 위대했으며, 태양빛은 하얗게 눈부셨다. 희망했고, 희망한 만큼 절망했으며, 모든 것이 가능했고 또한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그 환상의 가능함과 현실의 불가능함 사이에 시인은 일종의 꽃씨를 심어두었다.

 적어도 40년 간 그 꽃씨는 꽃이 되기를 기다려왔다. 아니, 40년 이상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는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려왔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얼음으로 덮인 절망의 현실에서 꽃씨는 어떻게 자랄 수 있었을까. 시인의 주변에는 꽃씨를 위해 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주었다. 심장을 주었고, 심장의 고통을 주었으며, 심장의 솟구치는 마음을 주었다.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최후의 것을 주저없이 주었다. 그 사정을 달리 표현한다면 사랑을 위한 자기 번제이며, 목숨의 제사라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차가운 절망을 녹인 것은 태양의 공로였다 말해서는 안 된다. 빙하의 시대를 버틴 유일의 수단은 시인의 사랑, 심장의 노래였다. 꽃을 키우고 피운 것 역시 그 붉은 박동, 그리움의 몫이었다. 이제 명확히 정의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꽃은 왜 붉게 피어났는지, 그것은 어째서 눈물겹게 아름다운지, 꽃이 붉음과 역능은 꽃의 재주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심장이 물든 결과요,  시인의 노래가 담긴 탓이다. 모든 '심장꽃'은 심장을 바친 끝에, 시인의 마지막 재산인 심장 위에 피어난다. 이로써 시인은 꽃이, 꽃은 시인이 되고자 했다.

 가장 최후의 것을 바치는 최대의 제사, 이것이 바로 꽃을 바치는, 꽃을 만드는, 스스로 꽃이 되는, 바로 이 시집, 바로 '꽃들의 제사'다.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을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등

           산문집: <33세의 팡세> 소설집:<산타페로 가는 사람>

           연구서: <이상시 연구> <현대시 텍스트 읽기> <코라 기호학과 한국시> 등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