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돌멩이
이장욱
갖고 싶은 게 있나?
골라 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펴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 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어젯밤 굳게 먹었던 마음을 바꾸었네.
아아, 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랑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의 돌멩이
〈2018년 제6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작〉
⸺계간 《시와 사상》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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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시인, 소설가, 평론가.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94년 《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2005년 《문학수첩》으로 소설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소시집『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천국보다 낯선』, 소설집 『고백의 제왕』『기린이 아닌 모든 것』기타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혁명과 모더니즘』『우리는 아프리카』등.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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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발췌
수상작인 이장욱의 「왼손의 돌멩이」는 마술의 세계를 시적으로 변용시켜 독특한 사유를 보여준다. 첫 행에서 “갖고 싶은 게 있나?”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하면서,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방식이 어쩌면 마술의 변용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드리운다. 시라는 양식이 개척하는 지평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현대시에서 여러 다양한 시적 실험이 포화를 이룬 지점에서 마술과 같은 판타지와 그 판타지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왼손의 돌멩이’를 통해 시인은 독자에게 보여준다. 데이비드 카퍼필드라는 걸출한 마술사가 관객을 매혹시키듯 과연 오늘날 시가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을까? 영화나 마술처럼 현대 예술은 기술 발달에 힘입어 스펀지처럼 대중을 흡수하는 반면에, 시는 가장 단순한 언어적 장치로 독자를 상대하는 외로운 저항을 해야 한다. 오른쪽 주먹에서는 꽃이 피어오르는 찬란한 삶이 전개되지만, 왼손에는 외로움마저 사라져버린 무감각의 세계가 존재한다. 결코 통합될 수도 동화될 수도 없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일깨우는 것이 시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왼손에 남은 돌멩이는 고독의 끝에 다다라 허공을 직시하는 인간의 실존을 암시하고 있다. 마술이나 환영처럼 다가오는 삶 속에서 시는 근원적인 허무와 소외를 직면하게 하는 힘을 지니기에, 이장욱은 “나의 아름다운 왼손의 돌멩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화사하지 않을지라도 생의 밑바닥을 견디게 하는 고귀한 시의 정신이다.
심사위원 : 김경수, 최휘웅, 박강우, 김혜영(글)
2018, 시와 사상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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