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2018 대산대학문학상. 시 당선작)-극지의 밤 외/서재진

시치 2018. 11. 23. 00:34

 (2018 대산대학문학상. 시 당선작)  





극지의 밤 외(4편) /서재진


이누이트의 외투 깃마다 빡빡한 바람이 들어찬다

당신 어서 도망가라


내뱉은 말 모두 시퍼렇게 얼어붙어 입김이 되는 땅

부끄러운 고백이 당신 입술을 녹일 텐데, 그렇다면 추워서 어디에도 가지

못할 텐데 칼이 침엽수처럼 돋아날 텐데


노파가 어린 사냥꾼들에게 설화를 전하는 밤이다

부모를 죽인 자식이 당신 가슴팍에 살고 있다고 아니 당신은 짐승 한마리

도 건드려본 적 없다고, 사실은 얼어붙은 땅 위로만 걸어 다닌다고 당신은

발자국이 없는 사람이라고

올가미와 칼을 든 사람들이 바람의 역방향으로 서서 소근거린다

말하지 않을게 당신을 찾지도 않을게 벙어리와 장님이 연애하는 것처럼


바람도 방향도 없이


당신이 태어났을 적 배꼽에서 솟구친 울음

거기서 이 땅의 첫 꽃이 피었다는데

영구동토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 법, 그래서 당신은

발자국 대신 피 한 방울 피 두 방울 흘리며 도망갔다고


어린 이누이트가 놓친 늑대, 그 늑대가 새끼를 낳고 새끼 늑대가 자라 어

렸던 이누이트의 자식을 잡아먹을 때쯤


내가 무사히 노파가 된다면 이야기를 전하겠다


바람의 역방향으로 해가 진 밤이다

극지에서 적도로 날아가던 날짐승이 물에 빠져 죽은 밤이다

벙어리와 장님 서로의 입술만 더듬던 밤이다


꽃 피는 것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모피를 입고 짐승을 사냥한다

아니 혹은

꽃 지는 것을 느낀 적 없는 짐승들이 모피의 냄새를 따라 사람을 사냥하는지도





수취인 불명



해안선이 갈라놓은 섬과 땅의 간격 위에서

지친 새들이 부리를 닦는다

사람 음식을 먹고 자란 새들은

언제부터 사람의 안광을 가지게 되었을까

바다를 등진 전봇대마다 나뭇가지가 목을 매달고 있었다

신발 앞코가 젖도록 서서 수평선 쪽으로 안부를 중얼거렸다

당신이 병 얻었다는 거 소문처럼 전해 들었다

바람이 환히 불었다


포말을 조개며 조각배가 움직였다

화물칸에서 덜컹거릴 편지를 생각하며

당신에게 할 말을 연습한다. 우표 값이 올랐다고 해요

나 당신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싶어요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옮겨 다니는 새의 방식으로 아주 먼 안부를 전

하고 싶었어요

모든 물음 물고기 배 속을 지나 당신 귀에 닿겠다

저기 저 낚시꾼이 전져 놓은 찌의 움직임이 되어

말 배운 적 없는 입술처럼 움질 거리겠다


어제 죽은 사람이 그저께 차려준 식사를 기억한다

상한 과일을 먹고 자란 육지의 몸뚱이들은 어떻게

식사를 차리고 서로의 실갗을 핥고 연기처럼 흩어지는 법을 배울까

앓는 사람만 있고 낫는 사람은 없는 역병을 피하듯

새들은 여전히 부리를 닦고 깃털을 쫀다


젖은 옷깃을 고친다

나 어떻게 해야 당신 울음으로 옮아갈 수 있는가

해안선이 갈라놓은 섬과 땅의 간격을

육지의 새들은 날아서 건널 수 있는가


새들의 발목마다 이 땅의 주소를 쓰고

수취인 불명의 섬으로 보내고 싶을 만큼 추운 바닷가였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를 찾아줘요 그럼 키스해줄게요

오늘도 아파트 단지 뒤편에 남자애들이 모여 앉아 담배연기 같은 얘기를

나눴어요

베란다에 앉아 흔들리는 빨래와 치맛자락을 바라봤어요

창가에서 옷을 갈아입는, 아직 가슴이 납작한 소녀

치마 아래 검은 속바지, 더 아래의 깊은 밤

그곳을 해가 지는 곳이라 부르겠다 생각했어요

잠들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 있지요 보라색 태양이 나에게 소리 지르

는 순간

소스라치며 눈을 떠보면 열대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밤

고래의 주파수가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더운 섬의 소녀들이 노래를 부르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은 생각나지 않는 원시의 섬


                            *


바닷바람을 바람도 물도 아니었어요 나는 소금기를 잔뜩 뒤집어쓴 채

섬의 끝에서 끝으로, 그러나 둥근 섬은 어딜가도 가장자리

바다와 땅의 경계에 서 있어요 저기 저 지평선의 방향으로

나를 찾아봐요 그럼 입맞춰줄게요


              *


나는 지평선으로 태어난 사람. 나에게서 해도 뜨고 달도 지고

별자리는 나를 찌르면서 태어나고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밟고 지나가요

지지도 뜨지도 못하는 나를 봐요

입술을 칠하고 발을 구르고, 내가 나로 변하는 밤이에요

혼란해질 때마다 잠깐만 멈춰줘요 어린애가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듯

무수한 시선으로 돌아보면 나를 찾을 수 있을거야

이곳에서도 태양은 보라색으로 져요 입술울 깨물 때 묻어나는 루즈의 색

깔 말이에요


이 꿈의 종착지와 증기선이 내뿜는 한숨을 생각해요

저기, 여인의 젖가슴 같은 언덕 위에는

침상에 누워 너울거리는 병든 뮤즈

화가는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증기선의 연기는 아마 뮤즈의 꿈속으로 녹아들어갈 거야)


신화 속 노파는 고래의 언어로 소곤소곤 죽음을 모의해요

사라진 감정, 당신도 알잖아요, 무표정으로 꿈꾸는 사람들

그 행방 마저 한폭의 그림으로 굳어지는 섬

비소가 개미떼를 죽이고 또 어느 화가의 숨을 몾게 하는 것처럼

늙어가는 여인을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더운 섬 있잖니, 부고조차 너를 깨우지 못하는곳)




*폴 고갱, 1897년 작, 캔버스에 유채






채널



악당들이 총을 겨눈다


해류를 따라 짐승 사체가 천천히 떠내려간다

조각난 산호와 가벼운 조개껍데기와 잠복한 심해생물이 함께 흐른다

땅은 미미한 속도로 움직인다

강에서 버더로 바다에서 다시 몸으로 전해오는 비린내의 편력이여

영웅은 어떤 총알도 다 막아낸다

영웅은 피도 땀도 흘리지 않는다

세게 각지의 스크린에서 인질극이 펼쳐지고 있다

브라운관 속에는 악당도 영웅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브라운관

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영웅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브라운관 달린

티브이를 본다

정규편성된 다큐멘터리에서는 범고래가 펭귄을 미기로 물범을 사냥한다

노인 티브이를 켜 놓은 채 잠든다

그러는 동안에도 악당의 총구는 영웅을 행한다


초롱아귀 둥둥 흐르며 빛난다


총알이 발사되는 동안 물범은 펭귄을 먹고 범고래는 물범을 먹는다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은 노인 코를 곤다

슨찰 돌던 구명선 갑판 위로 퉁퉁 불은 짐승 사체가 건져진다


물이 날짜변경선을 지나 흐르는

그 순간 영웅 날아오른다 지구의 방향도 해류의 방향도 아닌

수직의 힘으로 솟는다




낭만의 시대




우리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매를 맞았다

몰래 집을 빠져나온 아이들은 구멍이란 구멍마다 타임캡슐을 숨겼다

붉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무엇이라 부를까

몸을 채 벗어나지 못한 고함이라 말할까

사물함에 숨겨둔 우유팩처럼 부푼

오래된 알레르기의 흔적이라 말할까


낭만의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 줄 맞춰 앉아

잠든 개구리릐 배를 가르는 법을 배우고

한쪽 눈을 감은 채 조준과 겨냥을 익혔다

양 눈을 다 뜨고 조는 아이도 있었다


복숭아는 물이 많고 달다고

복숭아를 먹어도 입이 간지럽지 않아야 한다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복숭아를 먹으면 다들 팔을 긁는 줄 알았다


리코더 주둥이로 숨을 불어넣으며

어던 아이는 발을 까딱거리고

어떤 아이는 양 눈을 뜨고 선생님을 쳐다봤고

어떤 아이는 숨겨놓은 우유를 생각했다


우리 낭만의 시간,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고 복숭아를 먹으면 온몸이

발개지는 아이들

구멍이란 구멍마다 우유와 타임캐슐과 개루리를 묻는 아이들

고함처럼 태어난 아이들 오늘도 줄 맞춰 매 맞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