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시 보기 (9편)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거미》 창작과 비평, 2002
박성우(朴城佑)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시집 《거미》 (창작과 비평, 2002), 《가뜬한 잠》 (창작과 비평, 2007), 《자두나무 정류장》 (창작과 비평, 2011), 《웃는 연습》 (창작과 비평, 2017), 산문집 《박성우 시인의 창문엽서》 (창작과 비평, 2015) 등도 펴냈다.
2007년 제25회 신동엽 문학상, 2012년 제7회 윤동주문학상 젊은시인상 등을 받았다.
한달 만의 식사다
나방은 즙이 많아서 좋다
위턱과 아래턱을 놀린 지 오래여서
입이 좀 뻐근하다 집주인이 돌아온다
저 남자는 시를 쓴다
한달 전, 저 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게을러서
화장실 귀퉁이에 세 들어 사는 내 집을
빗자루로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의 식사 탓일까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꾸 신트림이 난다
밥 먹는 내 모습을 처음 보았겠지, 남자가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남자도 나처럼 오랫동안 굶었는지 깡말라간다
생각하면 저 남자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 곳에 들어 올 때마다 지금처럼
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는지
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남자가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릴 때면 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남자가 알몸을 씻은 날은
주린 아랫입에 손가락을 물려 또 다른 허기를 달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거미》 창작과 비평, 2002
새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을 뒤돌아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거미》 창작과 비평, 2002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다
《거미》 창작과 비평, 2002
봄, 가지를 꺽다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꺽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가뜬한 잠》 (창작과 비평, 2007)
건망증
깜빡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에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을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가뜬한 잠》 (창작과 비평, 2007)
물의 베개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가뜬한 잠》 (창작과 비평, 2007)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 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자두나무 정류장》 창작과 비평, 2011
배꼽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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