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시인동네> 신인상 시 당선작] 임수현. 조혜영.
티백을 우리며 외 4편
ㅡ임수현.
그는 태백으로 갔고
나는 티벳으로 가고 싶지만 티백으로 된 차를 우린다
갓 돋아난 차나무 새싹
아빠 칫솔을 모르고 쓴 아침,
타일이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양치식물처럼
누런 수건은 언제부터 저기 걸려 있었던 것일까
하하하 웃으렴
귀에 입이 걸리잖니
희망이 생기리라는 희망으로
칫솔을 나란히 꽂아두는 걸까
같은 통속 같은 믿음
닦았던 수건에 손을 닦는 건
맞잡는 걸까
귀엽게도 입을 오물거리는 아빠
말을 아끼면 비밀도 많아져
가족끼리는 다 말해도 돼
티백을 건져낸다
칫솔을 변기에 빠뜨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잖아
팬티를 나눠 입는 건 쉬운 일
칫솔모가 하나씩 빠질 때마다
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서로 믿을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서로를 우려먹었다
호흡법
수영을 배우면서
물고기와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하는 것과 숨을 참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문턱까지 참았다 가슴을 여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
맥줏집에서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둥근 테이블 덕분에
나는 있으면서도 없는 호흡법을
배우는 중이었고 물속에서 만난 사람을
물 밖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끝내 나는 나를 떠올리는 데 실패했다
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없는
물 밑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호흡법을 배우는 중이다
영주(榮州)
바람의 방향이 그의 이동경로였다
스토로브 잣나무 꼭대기에서 햇빛이 떨어져
발가락마다 물집이 잡혔다 기다리던 낙타를 타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 행운의 전부
그 사람 이름 대신
‘이봐, 예천!’으로 불린다는 사실
그날 처음 알았다 사막 입구에는 바람이 하나 둘
쓰러져 목책을 이루고
여긴 애들이 올 곳이 못돼, 그는 꼬깃꼬깃한 달빛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밤을 밀었다
올 때보다
갈 때 더 어두워
떠나기 위해
작업복에 묻은 바람의 흔적을 쫓는 일일까
각자의 눈빛 속으로 밀려드는
각자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시간은 그를 바람 곁으로 돌려보내기 직전까지
사막 속에 오래 걷게 내버려두었다
모래가 가득했다 그날 밤 나는
슬픈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싹수가 노랗다는 말
개와 마주쳤다
크리스마스 때 엄마가 내 머리맡에 둔 인형 같구나
호두야, 호두야 너 호두 아니니?
넌 얼마 전에 죽었잖아?
너무 꼭꼭 싸서
잡아 뜯어야 하는 선물처럼
호두가 내 팔을 물어뜯었지
경비실에서 삽을 빌려와 널 묻어줬잖아
종이 상자에 넣어
기억 안 나?
솔기가 터져 너덜너덜해진 나도
괜찮다면 가질래?
개는 유유히 바닥을 핥으며
살얼음 낀 하수구 속으로 사라졌다
맛없는 플라스틱을 뜯은 표정으로
계속 울었지만 계속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옆구리에서 누런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망원
하나를 훔친다
하나는 둘로 갈라진다 갈라진 표정 사이로 언뜻 내가 보인다 지하철 의자는 마주보고 있다 검은 비늘봉지를 열듯 훔친 표정 안을 들여다본다 넘어졌어, 대신 자빠졌어, 하면 다른 표정이 생긴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작하는 사람의 표정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슬픈 표정을 애써 웃는 표정으로 바꾸지만 무슨 일 있어, 물어올 때 쓸쓸하게 내 표정을 닦는다 표정을 걸어놓고 다트를 던진다
표적처럼 일그러진 표정, 가장 먼저 눈치채는 건 밤이었다 뒤척이는 내 이마를 짚는 빗소리, 얼굴을 씻어도 표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표정은 지하철 유리문에 가득 달라붙어 문이 열리자 우르르 쏟아진다 내가 죽은 뒤에도 표정은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하나는 둘로 갈라진다
임수현
경북 예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시 전공.
2016년《창비 어린이》동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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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외 4편
ㅡ조혜영.
금성이 저녁 하늘로 돌아왔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냄새가 공원을 가로질러 나에게 왔다 시간과 날짜가 달라질 경우에는 약간씩 움직여봐
달과 맺었던 관계가 떠올랐다
벤치에서 몸을 가볍게 접었다
만약 사랑이란 걸 정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떤 담배나 희귀한 종류의 개라면 낭만적인 소설들로 짜깁기한 교복을 입혀 달콤한 팔뚝을 빨아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동쪽을 향해 얼굴을 들면 습기 없는 구름이 의무감 없이 흩어지곤 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작은 발을 가지고 싶지만 발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듯이 흰 목덜미를 사랑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닐 거다
별들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인공위성들이 우아하게 흩날리는 안개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보고 싶은 동물을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고체도 기체도 액체도 아니어야 한다고
백화점을 다섯 시간 동안 돌아다녔다 기성품을 고르는 일은 즐겁지 않다 조심스럽게 미친 여자이거나 최선을 다한 거짓말은
안쪽에서 움직였다 과한 피로감이 왔다
혀를 내밀어 거리를 둔다 얼굴을 붉히거나 몸이 뜨거워지는 당황스러움
문제 5
case 1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잠을 자 별의 위치가 우리의 잠을 정하곤 하는데 가끔 분명한 목소리로 사무치게 긴 노래를 하면서 빈약한 손목을 들고 별들 사이를 여행하기도 해 우리는 진짜로 잠을 자
case 2
무표정한 사람이 편해요 지하철노선도를 꺼내 구겨진 등에 밀어 넣으면 붉은 얼굴이 되거나 물렁물렁한 군화라도 튀어나오겠거니 생각해요 지금, 무릎을 맞대고 앉은 자매는 폭신한 소파에서 서로의 입술을 없애고 있습니다만 키스를 하거나 지평선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은 텀블러에게 맡겨두었습니다 머플러가 지겨워서 그랬어요 몇 명이 걸려 있었거든요 한 시간 내에 사라질 무늬를 미워하겠습니다 웃지 말아요 특히 뒤로는
case 3
당신이 좋아할 만한 믿음은 거기 없어, 앞으로 쓰러지면 비가 그치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에게 반드시 수트를 입은 형사들을 안기는 것처럼, 여자인 남자의 발가락이 전시된 그리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러블리하게 온도가 변하는 흰 빵이 하나 둘 셋이 되는 것처럼, 바람이 불면 토요일의 살롱이 꺾어 신은 운동화의 형태가 되는 것처럼, 기다릴 수 없는 틈이 있고,
case 4
배가 뜨거운 부엉이가 어떤 숫자를 말했다 모든 숫자에는 모든 의미가 있으므로 참으로 무의미하지만 어쨌든 민트색 블루종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변으로 향하는 신발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잡아먹어야 했지만 매너는 욕망보다 중요하므로 급습하는 짐승들에게 가벼운 농담을 했다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서른 살짜리 스무 살이 소화전을 개방하고 체크무늬 재킷을 찢었다 투명한 유연제를 뿌려 아늑해진 나무 아래서 사탕을 입에 물고 조금씩 잠드는 여자의 잘못된 비늘이 뭉그러져 오른쪽 어금니로 씹었다
1. 각각의 깊이를 계산하세요
2. 말끔히 지워주세요
3. 자,
4. 흰색입니까?
문제 6
그림 1에서 느리고 따뜻한 공기가 하루에 몇 명을 끌어안는지 계산하고 그림 2를 이용하여 설명하시오 단, 비관적인 느낌표와 기름에 태운 설탕을 반드시 넣을 것.
그림 1.
얄팍한 맛이 나는 백팩을 조금씩 녹여먹으며 백만 걸음을 걸어야 안 슬퍼진다고 몇 개의 숫자들이 그랬습니다 발을 물속에 담그고 불순한 마음을 풀었습니다 허수들이 반짝거리며 쓰레기로 변했습니다 발바닥은, 젖 냄새가 났습니다 부드러운 가장자리에서 14장의 카드가 왔습니다 노랫소리는, 주먹을 살짝 쥐고 그림을 망가뜨립니다 불편을 벌려놓고 버둥대는 피부를 붙잡았습니다 영원히 여름이거나 끝까지 겨울인 것이 좋겠습니다
그림 2.
물방울이 전혀 없는 구름이 둥둥둥, 새로운 박자로 움직이고 있다 가운데 그늘에 앉아서, 언제부터 나는 너를 모았을까? 청명한 올리브색부터 잘 익은 오렌지색까지 있는 머리카락이었다 귓속이 부어올라서 한입만 씹어 먹고 싶었다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남자를 보는 일도 익숙했다 나른한 기분이었고 손은 떨렸다 나무들을 잡아 뜯고, 펜슬스커트를 흘려보냈다 유성매직으로 그려진 여자 둘이 눈을 꼭 감고 구름이 생성되는 이유를 추측하는 소리들, 당신의 의자가 갖고 싶어서 그래 외투가 시끄러워졌다 그를 조종하는 데 허다한 말들이 필요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에어컨디셔너
설탕이 없어서 목이 잘린 식물들의 냄새가 나고 있다 입 안에서 쇳물이 흘러나왔다 나쁘게 흘러가는 날씨 탓이다 덜덜 떨리는 편지가 가로등 아래에서 연인을 만나는 취향을 자랑하는 건
작은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너의 티셔츠 속에 있는 것들을 갖고 싶어서 그래 지나치게 뾰족한 턱이 아무런 힘이 없는 모서리를 지정했다가 아주 쉽게 또박또박 걷는다 신맛이 나는 커피도 이제 질렸는데 여자아이들은
노출증일지도 모르지만
예쁘지 않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기침을 하거나 타닥타닥 안경이 타들어가는 건 부유하는 산책로가 알파벳을 만드는 일이다
아주 적당히
피크닉
냅킨을 쓰고 메추라기의 배를 가르자 핑크빛 돼지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어떤 도구가 나를 바꾸는 걸까? 세모와 네모가 정기적으로 흩어져서 모든 동물들과 교미를 한 후에는 슬프지, 인공적인 빨강이나 현실적인 녹색처럼
토실토실한 우유 한 모금이 푸르고 신선한 아파트에 대해 중얼거렸다 억양이 있어서 듣기 싫었고 실토한 마음들이 잘못된 계약에 의해 보슬비를 걸쳤다
끈적이는 얼굴에 흠집을 내면 좋겠어 청바지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몇 개만 있어도 특별해질 거야 두근거릴 정도로 세련된 언푸드(unfood)들이 목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음미하고 후회하는 것, 참지 않는다
하고 있어
오리 한 마리를 가슴에 붙이고 화장하는 여자를 협박,
가능성에 의해 움직이는 얼룩말이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사냥할 줄 모르는 고양이랑은 안 놀아
조혜영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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