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

지방에 임금황자를 쓰는 문중-혜평공파

시치 2016. 8. 29. 01:23



관서공파(시중공파)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선대는 고려 중기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지낸 강원용(姜遠庸)이 조부이며 역시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한 강기문(姜起文)이 친부이다.

후손들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바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린 기인이다. 9세손 강행(姜行)1467 세조 13이시애의 난을 평정했다.

 

의 아들 文會(1433-1499)1453(단종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9(예종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양사 언관을 지내다 연산군의 즉위로 폭정이 심해지자 은퇴하고 낙향하여 시문과 독서로 후학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다. 逍遙堂集 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경연 춘추관 성균관 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 세자우빈객으로 증직하시다.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그 삼자가 惠平公 顯이다.

 

惠平公 : [1486(성종 17)1553(명종 8)]

본관은 진주(晉州). 강이식을 시조로, 중시조 관서대장군 원노의 11세 손이다.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산청 출신. 흥국(興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행()이고, 아버지는 문회(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1513(중종8)(27)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왕으로부터중용1권을 하사받았다. 1517(3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기사관·정언·사서를 거쳐 1524(38) 문학·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1925(39) 전라좌도어사로 나갔으며 교리·부응교·헌납·응교 등을 거쳐, 1526(40) 재해가 휩쓴 평안도에 순어사(巡御使)로 파견되었다.

1530(44) 종부시정으로서 충청도어사로 나갔으며, 1532(46)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7(51) 승지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1538(52)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42(56) 형조참판, 1544(58) 판결사·내의원제조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한성부좌윤을 거쳐 1551(명종6)(65)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혜평(惠平)이다.

 

혜평공의 후손들을 혜평공 파라 일컫는데 우리 문중에서는 혜평공 할아버지의 諱字,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紙榜에서 顯字 대신 皇字로 바꿔 쓰게 된 서식의 연유가 있다.

 

 

 

  

  지방에 임금황자를 쓰는 문중 -혜평공파

 

어느 가문이나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을 쓰는데 지방은 고유의 서식이 있다

顯 祖考 學生(處士) 府君 神位

顯 祖妣 孺人 ㅇㅇ 姓氏 神位

대개 이렇게 지방을 쓰는데 우리 문중에서는 특별히 다른 서식으로 지방을 쓴다.

 

皇 祖考 處士 府君 神位

皇 祖妣 孺人 ㅇㅇ姓氏 神位

우리 문중에서는 혜평공 할아버지의 諱字,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紙榜에서 顯字 대신 皇字로 바꿔 쓰게 된 서식의 연유다.

 

사대부 집안에서 선조의 지방 위에 감히 임금 皇字를 쓴다?

이 글자가 가진 특수성으로 해서 쉽지는 않았을 테고 필시 조정의 허락을 필하였으리라 思料된다. 당시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皇字를 하사받았다는 이 설득력을 얻는다.

 

예로부터 위대한 스승이나 선조의 銜字라고 하는데 ? 꺼리다, 두려워하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불문율이다. 예로 들어 聖人 공자의 銜字라고 하는데 孔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은 통영으로 통합되었지만 예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업적을 기리어 충무라는 諡號를 아예 도시의 이름으로 쓴 적 있다. 하지만 충무공의 유적지 어디에도 이순신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지명이나 건물의 명칭은 없었던 것도 같은 이치다.

 

요즘에는 이순신 공원이나 이순신 광장, 이순신 대교 같은 명칭을 쓰고 있지만 옳은 는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