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

晉州 姜氏 계파

시치 2016. 8. 28. 21:43


晉州 姜氏 계파

강(姜)씨는 진주(晉州)를 대종으로 한다. 진주 강씨는 크게 은렬공파, 인헌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다섯 파가 있다. 은렬공파가 가장 먼저 발원하였지만, 규모는 박사공파가 가장 크다. 인헌공파는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의 호인 인헌(仁憲)을 취해 인헌공파라 부른다, 다만 강감찬장군의 출생지가 금천이라하여 금천 강씨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박사공파

박사공파는 고려 때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섰던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진주강씨의 인구 중 80%를 차지한다.

강계용은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내다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으로 고려-몽골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출정을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고 이후 그 아들인 전중내급사공 강인문이 2차 정벌에 따라갔으나 역시 태풍으로 실패하고 돌아왔는데 일본은 이것을 신의 바람이 도왔다는 뜻으로 신풍(神風) 즉 카미카제(かみかぜ)로 부르게 되었다. 귀국 후 정 1품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후 벼슬을 하지 않았다.

강계용의 후손으로 고려 공양왕과 사돈 간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강시(姜蓍), 강회중(姜淮仲) 부자와 왕의 부마로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강회계(姜淮季) 등은 고려 조의 이름난 충신열사들이다.

조선 세종 때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참여했던 강희안(姜希顔)과 대문장가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대명필로 평가받고 있다.

강항은 강희맹의 후손으로 선조 때 석학으로 공조좌랑과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모친 상으로 고향에 낙향해 있다가 정유재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불행히 가족이 모두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그는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가 31세 때 지어 남긴 서책과 글들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소장되어있다.

소감공파

박사공의 아우인 강위용(姜渭庸)은 고려 때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으며 강문의 5대파조 중 소감공파의 파조이다. 4대손 강태(姜泰)는 가선대부 대상(嘉善大夫 大相)으로 있으면서 오랑캐의 침입을 당했으나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엎드려 곡하면서 한사코 자리를 뜨지 않자 오랑캐도 감탄한나머지 해를 입히지 않았을만큼 대단한 효자였다.

관서공파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파시조로 하고 있다. 선대는 고려 중기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지낸 강원용(姜遠庸)이 조부이며 역시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한 강기문(姜起文)이 친부이다.

후손들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바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린 기인이다. 9세손 강행(姜行)은 1467년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다

은열공파

은열공파는 고려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강민첨은 고려 광종 14년 963년 11월 29일 진주 옥봉산(玉峰山)아래 개경향(開卿鄕 : 지금의 진주시 옥봉남동 622)에서 태어나, 1012년 현종 3년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날카로운 못이 돋아난 일종의 철갑선인 과선(戈船)으로 격퇴하였다.

1018년에는 거란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을 자주전투라 한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 장군 주국이 되고, 곧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 일등공신(推誠致理翊戴一等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1021년 11월 12일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으며, 현종이 3일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보내어 장사를 돌보게 하고, 태자태사(太子太師)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증직하시고 은렬(殷烈)의 시호를 내렸다.

또 조선 때 강세황의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강윤(姜潤·1830~1898)과 동생 강건(1843~1909)형제가 만든 휴대용 해시계를 만들었으며, 이들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헌공파

인헌공파는 삼한벽상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呂侯) 강궁진(姜弓珍)을 파시조로 하고 있다. 강궁진은 문하시랑 강여청(姜餘淸)의 4대손이다. 강궁진은 왕건고려를 건국할 때 정국평정 1등훈으로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시조는 고구려 원수공(元帥公) 강이식(姜以式)장군으로 모시면서 관향을 금천(衿川)으로 하고있다.

강궁진의 아들이 바로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임헌복시(任軒覆試) 갑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중국 사신이 별이 떨어진 후 태어난 강감찬 장군을 보고 문곡성이 태어났다고 경탄한 일화가 전해오며 한민족사 수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이후 상원수로 거란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전멸시켜 명실공히 고려 최고의 명장이었다. 강감찬의 출생지인 금천을 따서 인헌공파를 따로 금천 강씨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