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스크랩] 왕사신王士愼의 차茶 이야기

시치 2015. 10. 28. 22:53

왕사신王士愼(1689-1759)은 청淸 옹정雍正황제가 등극한 해에 고향을 떠나 1723 36세가 되어 양주揚州로 온다.

 양주揚州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지역으로 양자강揚子江이 동서로 흐르고 경항운하(항주杭州-북경北京)가 남북으로 흐르는데, 그 강과 운하의 두 물길이 만나는 곳이 바로 양주揚州이다.

옛날 중국의 운송수단은 뱃길을 따라서 물류가 운송이 되었음으로 두 강의 만남은 물류의 중심을 이루어 발달을 함으로써 많은 재력가가 탄생을 하였고, 그들은 양주에 아주 큰 원림園林 짓고 예술가들을 우대하였으며, 그 거대한 집에 예술가들의 작품을 진열하거나 소장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예술의 흐름은 시詩. 서書. 화畵를 삼절三絶이라고 하여 이 세가지를 잘해야 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다.

양주揚州가 지니는 제반 여건으로 문화 예술은 휘황찬란하게 발달하였으며 문학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양주揚州하면 시詩의 파편들이 떠 오를 것이다.

고인은 서쪽의 황학루와 이별하고, 아지랑이 피는 3월에 양주로 향한다

봄 바람 살랑대는 10리 양주길, 주렴을 말아 올리는 마음은 늘 다르구나

허리에 10만 관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로 오네

“10년 만에 양주의 꿈에서 깨어나니 기루妓樓엔 박복한 운명만이 남았구나등등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양주팔괴揚州八怪가 탄생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왕사신王士愼이다. 그는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 났고, 특히 매화를 잘 그려 왕매汪梅로 불렸다.   

왕사신王士愼의 청빈한 생활은 뭔가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청아한 인격은 세속적인 기호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왕 사신은 일생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그도 심취한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는 차茶를 좋아했다. 그것은 평생의 취미가 되었고, 그의 기괴함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왕 사신은 휘주 사람인데, 휘주는 황산 기슭에 자리한 오래된 도시였다. 황산의 운무차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차 마시는 습관을 길렀다. 그가 일생 동안 거쳐간 강소와 절강 지역은 도처에 차의 명산지가 있었다. 그는 차 마시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약간 쓴맛이 나는 음료는 쓴 맛 뒤에 오는 단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일종의 상징이었다. 차와 중국 문인의 일상은 너무나 어울렸다.

사신은 차야 말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음료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많은 차를 마셔 보았다. 고향의 황산차 외에도, 무이차, 정택차, 용정차, 상차, 송라차, 곽산차, 고저차, 양흠차, 운대차, 소백화차, 안산차, 천목차, 경현차, 묘후차, 보이차, 영도차를 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맛을 차만 해도 최소한 수십 종류가 되어, 그는 각각의 차가 지니는 독특한 맛을 음미할 있었다.

무이산 송수차에서 나는 맛과 떫은 맛과 단맛을 음미할 있었고, 새벽이슬이 마르기 전에 소백화차 만의 맑은 향도 느낄 있었다. 우전의 곽산차에서는 강남 차와 다른 풍미를 느꼈는데, 그것은 강북에서 나는 차들의 맛일 거라고 생각했다.

끊인 상차와 안산차는 거의 같은 색을 띠지만 속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구분할 있었는데, 전자는 담황색에 가깝고 후자는 청록색을 띤다고 했다. 그는 참새의 혀처럼 생긴 경현차의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좋아했고, 영도의 운슬차에 대해서는 청춘의 활기에 뭉게구름다리라고 칭송했다.

그가 차를 좋아하는 것을 친구들은 각지의 차를 보내왔다. 차를 많이 마시게 되자 눈을 감고도 그것이 어느 지방의 차인지, 심지어 언제 수확한 것인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신을 사람들은 다선茶仙이라고 불렀고, 그는 차광茶狂이라 만큼 차를 끓이는 물로는 샘물, 녹은 , 이슬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샘물로 끓인 차를 마시면 문을 닫고 세속을 떠난 기분이라고 했고, 양주의 평산천을 그가 차를 끓일 최상으로 물이라고 한다.

녹은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차고 맑기 때문에 성스럽고 고결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꽃가지 위에 떨어진 것만을 모아서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담아두고 1 동안 찻물로 쓰거나 친구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은 이른 아침 꽃잎에 앉은 것만 세심히 모았는데, 꽃잎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다음 병에 담았다. 그는 그렇게 차를 마시며 어렵고 힘들었던 삶과 오장육부를 씻어 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1752 67세에 완전히 실명을 했다. 1755 70세 겨울 눈이 완전히 먼 상태로 광초 狂草(초서草書의 일종으로 매우 휘갈겨 쓰며, 자형의 변화가 아주 많음]를 써서 고상에게 주었다고 전하며, 그는 1759년 건룽 2474세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참조 문헌: 저우스펀周時奮 저 양주팔괴 창해사 발행의 책을 인용 하였다. 이 책은 청나라 때 화가들의 이야기가 있어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 sandongren
글쓴이 : 山東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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