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저, 저 하는 사이에/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 하는 자리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을 때도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그 말 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2>-해마다 꽃무릇/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건 생
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3>-특별한 일/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제게로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4>-나무가 나무를 모르고/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
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
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5>-커다란 창/이규리-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나를 다 보았겠지만
창이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6>-허공은 가지를/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7>-많은 물/이규리-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8>-변두리/이규리-
신호등은 이제 점멸신호로 바뀌었다
그냥 알아서 해도 좋다는 시간인 것이다
종일 꽉 쥐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 봐,
하고 싶은 거……
신호등 두 눈은
가라는 건지 마라는 건지 애매하게 말하던 사람 같은데
누가 뭐라던 결국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제 생을 점멸하는 거 아닐까
길가 쑥부쟁이들도 깜, 빡,
불빛에 불려나왔다 들아가고
저 시간이 더 길었다면
우리가 그걸 할 수 있었을까?
변두리의 밤은 이득하고 쓸쓸하기만 한데
<9>-불안도 꽃/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불안이 피었던 것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무럭무럭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으로 이해하는 걸까
그 속에 오래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통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먼 경계도 더듬어 가늠하면서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10>-혀/이규리-
그 공원 들어 설 때
의자마다
남과 여가 앉아 있었고
돌아 나올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 위엔
혀가 낙엽처럼 떨어져 있고
떨어진 것들이 공원을 구성하고 있었다
우리, 생각보다 떨어뜨리는 게 많지
중요한 건, 다시 주우러 오지 않는다는 거
우리에겐 늘 많은 현재들만 술렁여서
놓친 풍선은 돌아오지 않는 걸까
공원은 그다지 공공적이지 않은 듯하고
찾아가지 않은 시간들이 쌓여 고궁이라 한다면,
<<이규리 시인 약력>>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계명대학교, 구미대학교 강사 역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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