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이규리 詩人의 詩 열편 감상하세요

시치 2015. 5. 27. 23:50

<1>-저, 저 하는 사이에/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 하는 자리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을 때도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그 말 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2>-해마다 꽃무릇/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건 생

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3>-특별한 일/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제게로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4>-나무가 나무를 모르고/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

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

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5>-커다란 창/이규리-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나를 다 보았겠지만


창이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6>-허공은 가지를/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7>-많은 물/이규리-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8>-변두리/이규리-

  
 

신호등은 이제 점멸신호로 바뀌었다

그냥 알아서 해도 좋다는 시간인 것이다

종일 꽉 쥐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 봐,

하고 싶은 거……

 

신호등 두 눈은

가라는 건지 마라는 건지 애매하게 말하던 사람 같은데

누가 뭐라던 결국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제 생을 점멸하는 거 아닐까

 

길가 쑥부쟁이들도 깜, 빡,

불빛에 불려나왔다 들아가고

 

저 시간이 더 길었다면

우리가 그걸 할 수 있었을까?

 

변두리의 밤은 이득하고 쓸쓸하기만 한데

 

<9>-불안도 꽃/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불안이 피었던 것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무럭무럭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으로 이해하는 걸까

그 속에 오래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통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먼 경계도 더듬어 가늠하면서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10>-혀/이규리-

 

 

그 공원 들어 설 때

의자마다

남과 여가 앉아 있었고

돌아 나올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 위엔

혀가 낙엽처럼 떨어져 있고

 

떨어진 것들이 공원을 구성하고 있었다


우리, 생각보다 떨어뜨리는 게 많지

중요한 건, 다시 주우러 오지 않는다는 거

 

우리에겐 늘 많은 현재들만 술렁여서

놓친 풍선은 돌아오지 않는 걸까

 

공원은 그다지 공공적이지 않은 듯하고

찾아가지 않은 시간들이 쌓여 고궁이라 한다면,

 

 

<<이규리 시인 약력>>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계명대학교, 구미대학교 강사 역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출처 : 詩 동행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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