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詩로여는세상〉작품상
도깨비불 (외 4편)/강 정
어머니와 하천을 건널 때였을 거나
옛 애인과 밤 산책을 나섰을 때였을 거다
한 죽음의 소식 들은 즈음,
꿈이었을 거나
꿈이 바라본 생시의 틈이었을 거다
어두운 물 위에 샛노란 불빛이 크고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풀의 울음이었을 듯도 싶었으나
뭔지 생물도감 같은 덴 안 나오는 낯선 짐승의 체형이었을 듯도 싶었다
무서웁기도 하였을 거나
공연히 마음 설레,
어깨 기댄 그네가 새삼 뜨거운 꽃 같은 질문으로 여겨졌기도 하였을 거다
우리는 몸을 숨겼다
안위를 걱정한 것이었을 거나
빛의 더 큰 발산을 노려
빛의 몸통을 더 쓰라리게 훔쳐보려 함이었을 거다
불빛 아래
더 뜨거운 흑점으로 엉겨 붙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빛의 주위로 물이 크게 번져 보였다
빛에 홀려 물이 불타는 것으로도 보였다
우리가 서로의 입을 서로의 흠결이라도 되는 양
마구 빼앗아 먹고 다시 뱉어내며
스스로 불이 되어갈 때,
빛을 껴입은 물방울들이 하나하나 개체로 나뉘어
눈 코 입과 팔다리 달린 생명체로 살아
홍등 같은 눈 부라리며 두리번두리번 우리를 찾아다녔다
괴물 같기도 요정 같기도 아이 같기도 어른 같기도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더 잘 들키기 위해,
더 질박한 불의 살로 저들의 흑막 속에서
더 큰 몸이 되기 위해,
우린 숨을 죽였다
죽여야만 다시 타는
잉걸의 노래를 잇새로 악물며
숨긴 몸속에서 속엣것들이
그만의 발성으로 더 큰 빛을 불러낼 수 있도록
죽음이라는 최초의 가면을
서로에게 씌워주었다
어머니인지 옛 애인인지,
나는 그들의 마지막 남자이자 최초의 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빛을 피해
빛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었다
물은 더 붉게 흐르고
하늘 위까지 물이 넘쳐 밤의 언덕 너머,
물의 갑옷을 벗은 시간의 알몸이 뚜벅뚜벅 우리 앞에 섰다
분명한 악당이었으나 밥을 해 먹여주고 싶은 슬픈 짐승이기도 하였을 거다
그나 우리나 겁에 질렸을 것이나 그나 우리나 많이 지쳤던 것이었을 거다
마지막 방사의 오열이거나 거대한 그리움의 가쁜 始終이기도 하였을 거다
三界를 다 삼킨 빛이 다만,
어떤 사람의 液化한 몸이었을 뿐이라는 것
신들의 기계가 돌연 분란을 일으켜
이 세상이 저 세상의 진심을 새삼 알아버린 날의 劇이었을 거다
깨어나니 정오였다*
———
* A. 랭보, 「새벽」마지막 연.
—시집『귀신』(2014)
키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 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 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시집『키스』(2008)
폭파 직전
전 생애가 불시에 사라졌다
한바탕 피가 휘날리고 바람이 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피를 머금고 쓰러진 우산
금색으로 갈라진 벽 위의 상처
소나무를 숨긴 가장 높은 탑
소나기의 차가운 참회
유리에 번진 사진 속 얼굴들
앙상한 아르페지오 선율
흐르는
간헐천 모퉁이에
칼을 물고 서 있는
만 년 전 당신의 눈
—시집『활』(2011)
소리의 동굴
우기의 밤, 기타 줄들이 눅눅하다
기대선 벽을 주먹으로 친다
분노나 억압 탓은 아닐 것이로다
제 마음에 뭐가 남아 있는지 의아해하는 백치 노파거나
오래 갇혀있어 벽 너머가 외려 두려운 수인처럼
툭툭, 자신 손마디의 쓰임새나 확인하려
벽을 주먹으로 친다
마디가 둔탁한 공명이 누렇게 번진다
비에 젖은 벽은 의외로 말랑말랑하다
소리는 소리의 그림자보다 크지 않다
그림자 속으로 살을 여미며 사라지는 소리들
방이 크게 그늘진다
빗금으로 미끄러진 벽을 타고 허공에 고인 구름들이 활강한다
감금된 소리의 수형들이 손을 맞잡고 큰 원을 그린다
나는 드러누워 있는 참인데,
소리에 파묻힌 어떤 몸은 끝끝내 빗줄기를 거꾸로 부여잡고
느닷없는 우레로 쏟아진다
드러누운 내 몸을 관통해 오래도록 벽을 쿵쿵 친다
소리의 그림자는 소리보다 더 두껍고 맹렬하다
벽 안쪽으로 파행하는 소용돌이
구름의 미세 입자로 부풀어 오르는 시간
높이 뛰어올랐다가 하늘을 되튕겨 추락하는 기분이란 걸
시로 써보려 한다
그러려면 온몸이 소리가 되어
흔적 없이 바스러져야 한다
벽을 치던 손으로 기타를 쥐고 1번 줄과 6번 줄을 동시에 퉁긴다
가는 소리가 굵은 소리를 덮쳐 허공에 피가 고인다
벽 속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여자가 몸을 엉킨 채 나타난다
남자의 몸에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자는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가며 더더욱 커지고
남자는 계속 작아져 성기만 남았다가 점이 되었다가
어두운 공명통 안에 잠긴 목청을 누인다
서로 닿지 않는 영역에서 전력을 다해 자신을 지우는 게
사랑이다, 라고 나는 쓴다
소리는 그러나 그 어떤 말로도 쓰여지지 않고
소리의 그림자는 쓰여진 글자들을 지우며 넓어진다
저 홀로 그늘져 빗물을 피해 더 깊이 웅덩이가 되고
더 어두운 빛의 속살로 둥둥둥둥 제 갈비뼈를 우려
벽 속에 숨은 말들의 잔등을 두드린다
벽을 뚫고 나오려는 말
소리의 깊숙한 동굴에서 사람이 되어 무늬를 쥐어짜는 습기
다시 기타를 벽에 기대 세운다
기타 줄은 낚시 줄처럼 꼿꼿하게 부식돼 있다
공명통 안에 숨죽인 남자의 울음이
줄들을 울린다
벽이 낮게 흐느낀다
벽 속의 여자가 몸 안의 사루를 흩뿌려 Rm집어내는 종소리
방이 급격히 둥글어진다
벽 위에 느릿느릿 그어진 굵은 선을 따라
생시에 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가 고대 암벽의 彫像처럼
끔뻑끔뻑 눈을 번득이며,
빗줄기 속에 큰 길을 낸다
소리를 망실한 어족들이 사람의 살로 회생하는
기나긴 우기의 밤이다
—시집『귀신』(2014)
호랑이 감정
다만, 좋은 공기를 만나 숨을 삼켰을 뿐인데
사람 하나가 코로 들어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혼돈스러운
어느 너른 길의 짧은 오수 속에서
비정과 나른의 통로이거나
호탕과 소심의 갈림길인
참음과 굶주림의 허방을 헤쳐
분내 특출한 여인 하나 숨결에 들어앉아
성성하게 구비진 목젖 위에서 잠든 울음을 요분질한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를 잠시 여민 채
세상 그늘진 곳에서
순간을 영원 삼아 쉬어가던 몸
잠든 털올들 사이
부대끼는 바람결에 꽃을 매달고 울대를 움켜쥔 이것은
제 살을 쥐어뜯는 몽매 같기도,
더 큰 울음을 내성케 하는 먼 과거의 엄명 같기도 하다
나는 응당 그래야하는 심장의 지령에 따라
사위를 둘러본다
다만 갑자기 어두울 뿐이다
이제, 몸 안의 빛을 꺼내 나를 죽이고
죽인 나를 채찍질해 몸의 이끌림에 투신해야 할 때,
숨겼던 발톱과 이빨이 저만의 생기를 시위라도 하듯
점점 끄무러져가는 노을 아래 더 붉은 촉광으로 망막의 혈기를 끌어올리고
위장은 무슨 쓰다만 碑文처럼 정직하게 비어간다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나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이
이토록 뜨겁게 부딪친 적 또 있었을까
나는 크게 숨을 내쉰다
목젖을 지나
허허로운 위장의 내밀한 질서를 토닥이며 낭심을 거머쥔
여인의 기운
콧구멍 속 큰 동굴의 잠을 열고
깊은 숨이 나가자 나는 쓰러진다
쓰러지는 반동으로 내처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
멀리 숨죽인 흰 사슴 한 마리 사력과 정성을 다해 밤의 등불을 뒤흔들고
몸 안에서 여인이 해사하게 운다
그 울음을 받아 속으로 삼킨 포효로 세상 중심을 하복부에 담는다
달린다
소리내 울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랑을 다 거치며 스스로 사라지는
時速의 망각 속에서
나는 혼자 사람의 탈로 세상의 탈을 다 받으려 애쓴다
먼데를 보며 참아내는 울음이
미래에 여인이 울 그 울음의 까마득한 前奏라도 되는 양,
터지면 쇠도 삼킬 내 울음이
행여 칼바람의 破聲으로 여인을 벨까 우려하고 기대하며
—시집『귀신』(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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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계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활』『귀신』, 산문집『루트와 코드』『나쁜 취향』『콤마, 씨』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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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빛을 피해 빛의 한가운데로 빨려’드는 언어의 소용돌이
조용미(시인)
본심에 오른 열두 분 시인의 작품을 읽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무엇보다 작품의 수준이 높았고 다양했으며 최근 우리 시의 흐름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시인들의 시적 고민과 모색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먼저 열두 분 시인의 작품을 여섯 분의 작품으로 줄여 선택한 다음, 개별적으로 한 작품씩 보아가며 논의해보는 순서를 밟았다. 그 다음, 합의한 세 작품 가운데 최종적으로 작품상을 선정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에 빠지게 했던 작품은 강정의 「도깨비불」, 김안의 「미제레레」, 신용목의 「후레시」였고, 세 시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수사와 의미의 장점, 시적인 세련미와 그 세련미를 얻기까지 강력한 시적 에너지를 분출했지만 다소 거칠었던, 헐렁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획득했던 작품의 시적 성취 등을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논의 끝에 강정의 「도깨비불」을 작품상으로 선택했다.
강정은 첫 시집 『처형극장』에서부터 다섯 번째 시집『귀신』까지 분명 의미 있는 시적 작업을 수행하였지만 그의 종횡무진 자유롭고 어지럽기도 한 시적 행조 때문에 ‘삐딱하고 심각한 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인식되어 온 부분이 없지 않다. 강정 시의 가장 큰 고유성은 질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폭주에 가까운 질주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언어의 질주, 사유의 질주, 폭 넓은 시적 공간을 활보하는 세계의 질주.
강정의 시는 소년과 노인, 윤리적 취향과 나쁜 취향, 생과 사, 이승과 저승, 알 수 없는 휩싸임,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논리적인 문장, 어울리지 않는 듯한 전개나 언어 등, 대립되는 시공간이나 정서, 언어가 혼재한다. 그런 까닭에 보는 각도에 따라 환상이나 환각, 초현실주의로 해석되기도 하고 정서적 지점에서는 귀기라든지 탈주의 에너지로 읽히기도 한다.
강정 시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이와 같이 동일한 시에서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 혼재하기 어려운 것을 혼재의 풍경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혼재의 질주가 가능한 것은 의미를 위해 봉사한다기보다는 종횡무진, 질주 자체에 몰두하는 그 ‘무용성’의 선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정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혼돈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정은 폭풍의 숲을 헤매는 자이며 그곳의 소리를 듣고 전하는 자이며 혼돈의 숲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왔을 때도 그 소리들을 잊지 않고 그 소리들까지 살아내려 하는 자이다. 그는 이 오랜 질주로 혼돈을 질서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혼돈으로 설득시키는 힘을 드디어 갖게 되었다. 그가 이른 곳은 만다라이면 만다라이고 환각이라면 환각이고 생살이라면 모두가 생살인 곳이다.
그리하여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함께 기거하는 강정의 시공간이 탄생했다. 탈주하는 언어와 상상력과 동선은 언어의 안을 관념이 아닌 살로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강정의 시는 「후생의 전말」을 들여다보듯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나섰다는 면에서 한편 윤리적이다. 그러나 무엇도 의도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해 추적하기만 하겠다는, 파멸과 패배를 작정했다는 점에서 윤리를 벗어나는 윤리, 즉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다. 이 새로움은 지금 여기 시간의 광폭狂暴을 지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확한 윤리이며, 그러나 그것을 가장 먼저 자신의 몸으로 살아냈다는 점에서 순결한 윤리가 되기도 한다.
강정 자신의 말처럼 ‘말의 회오리라는 고요의 축 주변에서 모래알 하나도 선명하게 포착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간절하게, 이 지상에서의 말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도깨비불」은 무심한 집중력으로 “이 세상이 저 세상의 진심을 새삼 알아버린 날의 劇”에 우리를 깊이 동참하게 한다. “빛을 피해 빛의 한가운데로 빨려”드는 소용돌이처럼. 수상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_ 조용미 이영광 이재복
—《詩로 여는 세상》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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