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문학수첩 신인상
시 쓰는 남자 외1편/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
이명(耳鳴)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박소란 / 1981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창과 졸업. 현재 프리랜서 에디터로 활동 중.
===========================================================================
■ 심사평 / 풍성한 응모, 뜻밖의 수확
올해 문학수첩 신인상 시부문엔 240여 명의 작품 2,800여 편이 응모되는 공전의 호황을 맞이하였다. 여름철에 그만한 상금(당선작 5백만원)을 걸고 신인을 공모하는 문예지가 희소한 데다, 그만큼 《문학수첩》과 이 제도가 널리 알려졌다는 그런 뜻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수백 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소 실망을 금치 못한 게 사실이었다. 양적 호황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돌려가면서 재독, 삼독한 결과 몇 사람의 가능상과 좋은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지석의 「모자 신드롬」외 10편, 임수련의 「악어왕국」외 9편, 이혜정의 「장마」외 9편, 그리고 박소란의 「시 쓰는 남자」외 9편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눈에 확 들어오는 발군의 수준은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그래서 다시 정독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박소란 씨의 일련의 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중 「시 쓰는 남자」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외양이 화려하거나 시적 기교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전반적으로 작품수준이 고르고 내밀한 사유가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게 장점이었다. 특히 당선작으로 선정한 「시 쓰는 남자」는 시를 쓰기 위해, 좋은 시 한 편을 쓰려고 시인이 한평생 얼마나 진지하게 또 고통스럽게 노력하는가 하는 데 대한 내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그가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더군다나 아무런 현실적 대가도 없는 시 쓰기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데 대한 의미 있는 사색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요즘 시류와 달리 개성적이고 깊이 있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란, 시 쓰기란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이고, 나아가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인가를 통찰하는 일이기에 신인으로서 이러한 사색과 성찰은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내용과 표현, 사상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의식하면서 분투하는 모습은 이 신인의 앞으로의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이런 점을 평가하여 우리는 박소란 씨를 당선자로 선정하고 축하하면서 이제부터의 힘찬 정진을 당부하는 바이다.
심사위원 : 김재홍, 신달자, 김종철
'신인상. 추천,당선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5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조미희 김태우 (0) | 2015.06.17 |
---|---|
[스크랩] 2015년 《시산맥》신인상 당선작 _ 목련의 오차(외 4편)/ 최연수 (0) | 2015.06.17 |
[스크랩] [2014 시와소금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심상숙 외 (0) | 2014.12.24 |
[스크랩] 제4회 〈시와표현〉 신인상 당선작 _ 최희, 임은호 (0) | 2014.12.20 |
[스크랩] 제2회 <문예바다> 신인상 당선작 _ 오광석, 신정순 (0) | 2014.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