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문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
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 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추천사유]
하늘과 땅의 튀기인 우리는 죽으면 육신은 땅의 나라(지국)에 들어가고, 몸의 임시거소에 있던 영혼은 하늘나라(천국)로 돌아간다. 죽지 않은 상태에서도 맨살을 땅에 밀착하면, 즉 밑창 터진 신발을 신고 걷거나, 아예 신발을 벗고 맨 발바닥으로 걸으면, 나무뿌리 틈 사이로 소리들이 흘러나오는 땅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 포탈라 궁을 향하는 순례자가 수천리 길 위에서 온몸으로 오체투지 하는 것도 땅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잘 듣기 위함일 것이다.
세속의 소리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들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숲길을 혼자 걸으면 땅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다. 땅속에는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소리들이 있다. 나무 밑동에서 흐느끼는 패자의 야사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이루지 못한 사랑의 고백 등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려서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이다. 태아가 모체의 심장 소리를 듣듯이, 유아가 젖을 빨아먹을 때 한쪽 귀를 엄마의 가슴에 붙이듯이, 땅의 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땅 속에 저장된 생명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는 사람의 형상과 흡사한 점이 많다. 가지는 사람의 팔이고, 잎사귀는 사람의 머리채이며, 줄기는 몸통 그리고 뿌리는 다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도 「나무와 새」란 시에서 “나무의 머리채 속에 새가 둥지를 틀고/ 밑둥치 속에 내가 움막을 짓고 산다 //새는 나의 혼이 되고/ 나무는 육신이 된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땅에 발자국 한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라고, 최 시인도 사람과 나무가 발생계보가 같다는 상상적 추론을 하고 있다.
땅은 소리의 거대한 저장창고 즉 어머니 대지의 자궁이고, 땅의 문은 자궁의 문인 질인 것이다. 땅은 새로운 생명을 키우기 위해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 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리는 의미, 뜻의 음성적 발현이다. 나무의 땅 속 입은 소리 뜻의 자양분을 먹고 지상 위로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땅의 문’, ‘땅 속의 입’이라는 창의적인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땅의 생태학적 모태성을 구체성 있게 잘 묘사하여, 육신의 본향인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훌륭한 생태시의 한 전형을 잘 보여주어서 후보작으로 추천한다.
추천 • 김세영
2007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 물구나무서다,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가 있다.
[추천사유]
수박씨처럼 버려진 웃음이 구른다.
거리의 속옷을 탐내는 산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줄 변기는 아직 막혀있다.
새벽을 삼킨 배관실 녹슨 파이프에 압착테이프를 감던 무수한 눈동자들이
소금 같은 기침을 삼키며 눅눅한 바닥에 등을 편다.
* 렉처럼 귀가 비릿한 날은 자주감자가 먹고 싶다.
아무도 열지 않는 경전 같은 창을 바라보며 늙은 신학자를 쫒다가
앙금으로 부활하고 싶다,
가냘픈 어깨를 맞대고 선 지붕들에게
아직 자르지 못한 탯줄을 두고 온 683번지의 광대뼈만 남은 빗자루에게
울며 올라탄 시간들과 산티아고 순례길에게 고백하고 싶다
눈을 감으면 한 번의 손길도 닿지 않은 참외 꼭지 같은 배꼽이 근질거렸다.
볏짚이 듬성한 지붕위에 시든 패랭이꽃이 낮은 천장을 기웃거렸고
천둥 같은 울음이 핏줄을 타고 부풀어 올라 밤마다 물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누렁이가 물웅덩이를 첨벙이다 치쳤는지 젖은 털을 흙벽에 비비고 있다.
꿈틀거리는 바퀴들의 설익은 소리가 아프다. 뜨겁지 않으면 공짜라고
몽정을 간직한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개구리의 혀 같은 봄이 빚은 한 끼의 기쁨에 마른종이처럼 바스락 이던
갈비뼈도 금이 갔는지 배가 고프다. 아리숙한 달의 어수룩한 빛 속에서
탯줄채 꼼지락 거리던 그 날의 눈물은 마렉의 노래로 잠이 들었다.
* 골고다를 부른 폴란드 가수
추천 • 이현협
2004년 시현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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