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들을 위한 서정시/ 허혜정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늘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들
흥나는 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 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어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시집『적들을 위한 서정시』(문학세계사, 2008)
1948년 서른여덟의 ‘장 주네’는 프랑스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열살 때 소년원에 간이래 거듭한 강.절도로 열 번째 기소된 뒤였다. 장 주네가 훔친 건 주로 술 몇 병, 손수건 몇 장, 책 몇 권 따위의 것들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와 소설에 감명 받은 장 콕도, 사르트르, 보부아르, 자코메티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프랑스 문단의 보물이 감옥에서 썩고 있다고. 주네는 이듬해 특별사면을 받고 대표작 ‘도둑일기’를 발표한다. 20대 시절 소매치기, 강도, 남창 노릇을 그대로 담은 자전소설이다. 그 소설에서 주네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학 재학시 스물한 살의 이른 나이에 등단하였고, 첫 시집을 내고서 18년 만에 <적들을 위한 서정시>를 낸 허혜정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과 서정적 자아도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망에 온몸을 담그고 있다. 내내 우울하고 처절하고 어둡지만 두려울 게 없다. 그래서 빗장을 걸고 악몽을 견디며 쓴 시들이 설마하니, 아무리 현실의 벽이 완강하기로서니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 보다야 못할까.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고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워가며 ‘부패한 방언들로 가득한 대화’들에서 떨어져 나왔다.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 절망과 비참과 모욕 가운데서 의도하지 않은 장 주네가 되어갔다.
신을 죽인 남자 니체는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완만한 자살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라며 '짜라투스트'를 앞세워 말했다. 그런 나라에서 허혜정 시인도 ‘산산조각 부서진 존재’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삶이라는 말보다 더 삶을 말하고 싶었다. 우뇌와 좌뇌로 쪼개진 머리속의 지구를, 내 살인의 공범이었던 나를, 역사 속으로 미쳐 돌격하던 특공대원처럼 나의 망상 속으로 돌진하는 미개인을, 이마에 피 흘리고 있는 아이의 웃음을, 폐허가 된 벽에 찢어져 흩날리는 대자보 속의 분노처럼” '적들을 위한 서정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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