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이민하 시 모음

시치 2014. 8. 26. 01:11

이민하 시 모음 | 미래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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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23:08:26

시간 ( 1) /이민하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새들이 나란히 앉아 지붕의 색을 섞고 있다

나무들이 기어올라 마지막 얼굴까지 번지도록 오래오래

표정을 서로 바꾸는 열두 마리

어두워지자 나는 이름으로 구분했다

아침이 왔고,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

몇 마리가 빠지고 대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천둥은 잎새가 되고 왈츠는 추억이 되고

우주는 간밤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공중엔 이름 없이 떠 있는 새들이 더 많다

그들 중 하나가 빠르게 눈앞을 지나갔다

덜 마른 빨랫줄이 흔들렸다

빗방울 몇 개가 날아 새들이 묻힌 화단에 심어졌다

 

— 2010 '시와세계' 가 읽은 새로운 시》

 

안경을 벗은 당신/이민하

 

   참 아름답군요 딱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이 도려내기 좋군요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당신은 가랑이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려요 당신은 혀를 내밀고 나는 비행기를 내밀어요 당신은 내 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름숲을 올라타요 구름숲에는 녹색 투명한 산들이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오렌지를 눈에 낀 태아들이 골짜기마다 우글거리고 오백 년 묵은 짐승들의 비명이 으스러져 보드라운 밀가루처럼 날려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릿길을 온몸의 발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는 안경을 벗은 당신, 나는 잘게 다져져 물푸레 잎사귀처럼 하늘거려요 구름숲보다 더 멀리 날아다녀요 끝없이 찢어져 날리는 나의 메마른 살점이 당신의 콧잔등을 핥아주기 좋군요 유리알보다 가벼운 나를 쓰고 어디 한번 웃어 봐요 안경을 벗은 당신,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모조 숲  —    -----------------이민하

 

언니의 다락방에서 빛바랜 상자를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불쑥 손톱들이 돋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언니의 목덜미를 쓸어주었네

폭풍의 꼬리가 지나가자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쥐들이 갉아 먹은 드레스를 나뭇가지에 하얗게 널어놓고

텅 빈 상자 안에 펼치는 호밀밭

피가 다른 조카들의 걸음마를 구경하며

엄마는 손뼉을 치고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뉴스로 목이 쉬어 기상예보도 짖지 않는 라디오를 끌고

아버지는 계곡으로 사라지고

엄마는 무너진 울타리에 새로 단장한 문패를 걸고

도벽이 심한 언니는 배가 불러 낮잠에 빠지고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우편배달부는 가방을 쏟았나

편지처럼 흩어지는 나뭇잎들이 길을 덮는데

어둠에 떠밀려 허공에 잠기는 구릿빛 반지

 

상자 안엔 열두 마리

호밀꽃 부케를 씹는 고양이들

달이 가라앉기 전에 배를 완성하렴

길 위의 하객들을 기다리며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물고기 연인-이민하  

 

그는 지붕 위에 올라 녹색 루즈를 바른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남자

무슨 소용이에요 어머니,

벽 속의 열대어들을 꺼내주는 칠판은 없는걸요

그는 오늘도 내가 준 지폐에 노란 매니큐어로 편지를 쓴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나는 연인의 지느러미를 만져 준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그의 지느러미에서

불에 타다 만 풀 냄새가 난다

지붕 위의 그가 불안해

지느러미를 잡아 흔들어 방바닥으로 떨어뜨린다

편지에 쓴 철자법을 검사하고 스타킹처럼 달라붙는 교복 안에 그를 집어넣고 밀봉을 한다

해질녘 돌아와 보면

연인의 끈적한 타액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혓바닥이 스친 벽마다 비린내가 슬고 있다

나는 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사료를 준다

그의 혀 끝에 달린 플러그를 내 입에 꽂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밤이면 잊어버리는 그의 발음을 입 안의 채찍으로 상기시킨다.

연인은 밤새 오물오물 우우거린다

잠들기 전 나는 그의 혀와 지느러미를 둥글게 말아

내 몸 안에 밀봉을 한다

마지막 지퍼인 눈을 감는다

 

모자이크의 세계/이민하

ㅡ터널

 

지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순간에

총알은 관통한다

우리는 잠든 지 오래

별사탕 같은 나트륨램프가 촘촘히 박혀 있지만

아침과 저녁을 구분할 수 있는가

앞지르기는 금물입니다

멈춰서도 안 됩니다

아쉽게도 나는 충돌한 기억이 없어요

피를 흘리는 당신에게

혈흔의 끝자락이 비상구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예의는 여기까지

새들은 앞뒤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

입구와 출구를 구분할 수 있는가

차선을 바꾸어도 뒤통수만 보이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오렌지색 계절 속에서

나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는

허공을 작대기처럼 꽂고

열린 듯 닫힌 듯 빠져나갈 수 없는

뻥 뚫린 내 몸

피를 흘리는 당신

뒤통수의 끝자락이 산책로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예의는 거기까지

 

지하식물 /이민하

사이

 

낯익은 트럭 낯익은 편의점 낯익은 사이

낯익은 인파 낯익은 가로수 낯익은 사이

 

창살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낯익은 손가락 사이

 

백만 번째 당도한

이 거리는 땅 아래로 진입하죠

 

손잡이를 밀고

몇 장의 낡은 감정을 지불하는

낯익은 끼니

 

빵 봉지처럼 바스락거리는 불면과

지루하게 일어나는 젓가락 같은 하루

낯익은 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체위를 바꾸고

낯선 미용실에 웨이브 진 헤어커튼을 주문했어요

색이 바랜 표정들엔 유광 래커칠

 

손잡이를 당기고

몇 칸의 낡은 습관을 진열하는

낯익은 끼니

 

편의점을 옆구리에 끼고 이삿짐트럭은 달리네

벽지가 너덜거리는 나를 싣고

철거되기 시작한 다리 위를

 

치켜뜬 창문 아래

벽장 속엔 곰팡내를 피우는 아이들

 

당신이 떠난 것인지 내가 떠난 것인지

낯익은 혼동과 낯익은 사라짐

싹눈처럼 불을 켜고 밤과 낮을 지우는

 

끝없는 이사

끝없는 사이

 

삭발 / 이민하

 

잠이 든 사자의 갈기는 무수한 바람에 엉켜 있다

 

찢어진 잎사귀로 몸을 가린 빌리 할리데이가 치자꽃 다 떨어진

  빈 가지에 목을 매달고 부르는 글루미 선데이

  수십 년이 지나도 일요일은 늙지 않네

 

  어지럽고 휘청거리는 테그레톨의 부작용은,

  어떤 이에겐 머리칼이 빠지고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일순간 분출하는 뜨거운 잠의 기포들

  뇌가 종이처럼 탄다

 

  나는 허기진 사자처럼 두 눈 뜨고 잔다

  발갛게 벗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잔다

 

  잠들면 조심하세요! 사라지는 부위는 야채처럼 싱싱해 보인다

  자면서 꾸는 가발의 꿈은 사자의 갈기 같아

 

  빗질을 해야겠어

  우리는 모두 깨어나면서 떤다 센다 엉켜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세 마리

 

* 흑인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는 치자꽃을 머리에 꽂고 무대에 오르곤 했다.

* 테그레톨(Tegretol) : 항경련제의 일종

 

구름의 건축/ 이민하

 

  애기처럼 가지고 싶은

  구름이란 말, 살찐 구름도 좋고 잘 우는 구름도 좋고 구구단이

  늦는 구름도 좋아 까르르 까르르 애벌레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구

  름의 기저귀를 빨면 구름처럼 또 배가 부르고

 

  말처럼 들판을 달리고 싶은

  구름이란 말, 까다로운 말도 좋고 코가 삐뚤어진 말도 좋고 날

  라리 말라깽이 거렁뱅이 말도 좋아 구름을  당근처럼  씹어 먹는 말이라면

  더 좋아

 

구름은 몇 개의 철근

  주장이 강하지만

      구름은 몇 개의 두통

      아스피린이면 그만이지만

      구름의 손을 고작 몇 개의 수갑으로 묶을 순 없다

 

      구름을 그리지만

      그건 구름이 지나간 자리

 

      오페라를 관람하는 그림을 그리지만

      구름은 듣지 못한다

      귀는 畵面 밖에 있으니까요

 

      롱테이크는 구름이 흐른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할 우려가 있다

      구름의 동일성은 흑백필름과 함께 사라졌다

 

      연푸른 외투의 바바리맨

      구름은 창문 밖에서 출몰한다

 

      구름의 사생활은 구름과 무관하다

      구름을 불러들이는 건, 기록이 아니라

      연출이다

      구름은 발견의 장르가 아니니까요

 

      콘크리트를 손에 발라 구름 란 채를 짓는다 순간적으로

      구름은 배치되고

      넘쳐 난다

      구름 속에 구름은 살지 않는다

 

      어둠에 취하면 수다로 다정함으로

      형질이 다른 불규칙한 나를 낭비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필름을 철거하며

      畵面 밖에서 구름은 생각했다

 

글루미 선데이 클럽/ 이민하

 

白花처럼 떠도는 공기알들이 온몸을 누르는 압정 같아. 양치질 소리에 치미는 욕지기. 검은 먹물로 솟구쳐 대기의 변죽을 부풀리고 새 한 마리 떨어졌다는 소식. 거울을 급히 밀어놓네. 산굽이를 돌고 도는 끝없는 벼랑. 깃털 몇 개가 총알처럼 박힌 나의 머리. 배고프지 않아? 트럼프 너머 표정을 살피듯 일기예보를 훔치네. 간지러운 커튼에 까르륵거리며 날아다니는 등고선. 아침엔 창문을 열지 말랬잖아. 치자빛 잇몸에 눈이 시릴 지경이잖아. 낡은 것들의 둥근 어깨. 마차 바퀴처럼 잿빛 골목을 구르네 풀먹인 벽지를 피부에 걸치고 당신 꽃무늬 좋아해? 아이의 피부에 바를 꽃무늬벽지나 함께 고르러 갈까. 실크벽지 황토벽지 이름 붙은 것들은 평화로워. 목을 매면 잠이 들어. 아아 가게들이 문 닫았네. 일요일이잖아. 따스한 햇살이 칼날 같잖아. 발코니를 치워야겠어. 빛이 바랜 얼굴에서 입술은 떨어지고. 꽃잎은 떨어지고. 아이 만드는 일도 잠시 쉬기로 하자. 아아 일요일이야. 눈이 부셔서 사람들은 장맛비처럼 들끓지. 곰팡이 핀 피부들이 겁도 없이 맞대는 촛불. 마차 바퀴처럼 잿빛 골목을 떠도네.

 

해피엔드/이민하

 

엄마가 오늘은 사과를 주지 않네

달콤한 키스를 부르는

독이 든 사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해피엔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엄마는 이제 너를 들여다보지 않네

손톱도 뾰족하게 다듬지 않고

가래를 삼키듯 질문도 꿀꺽 꿀꺽 꿀꺽

지하 사과공장엔 들르지도 않고

사탕을 입에 물고 미모를 예치할 은행을 고르고 있네

 

발코니 아래 사과배달마차에는

시간의 갈기에 들러붙어 썩고 있는 사과들

달빛은 엄마의 등을 토닥이고 돌아앉아

동굴로 가는 길을 자르고 있네

바퀴통에서 떨어져나가 떠도는 네 개의 머리

나른한 미모가 식욕을 잃고 팽개친 주사위

 

네 개의 머리를 굴리며 숲속을 뒤지던

숨바꼭질 놀이는 추억처럼 뻔해서

왕복하는 낡은 길 위에 아무도 목을 내주지 않네

동굴의 평화는 유리관棺처럼 지루해

침대를 둘러싼 머리 없는 난쟁이들의 춤

 

거울아, 거울아

이제 그만 머리를 내놓아라

달콤한 악몽을 부르는

독이 든 머리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워가는 해피엔드

 

어둠의 악보 / 이민하

 

  하늘이 구름을

  조금씩 벗겨내는 시간이에요

  부식된 갈기가 부슬부슬 떨어져

  메마르고 단조로운 음색이 물기와 색조를 머금어요

 

  허공의 모든 살결은 門이 있나니 빛이 불러들인

  모서리들이 어둠의 토악질로 뭉개질 때

  너희들은 지푸라기 음문 위에 몸을 뉘었구나

  고단함이여 나의 백성들이여

 

  마음의 온갖 뼈들이 현이 되어 울렁이는 대지의 살갗

  붉은 지붕 꼭대기에서 타오르던

  구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여 갈매기 눈알처럼

  끼룩끼룩 점이 되어 잦아드는 여민 옷깃 속

 

  빳빳하던 산맥들이 물처럼 흘러

  버팔로들이 투구를 벗고 목구멍 속에서 헤엄을 치는

  당신의 절벽 끝까지 가 보았나요

 

  어둠 속에 융기된 골짜기들이 게워낸 물의 알약들

  사방 천지에 말라붙었던 풀들은 유즙을 만들고

  언덕 위의 석류나무가 유두처럼 팡팡 터지곤

 

  나의 탄주는 그대에게 설탕 같은 손가락을 얹고

  달려요 달려요 달려요

  갈기를 목구멍에 매달고

 

  또 다시 어느새 울컥,

  빛이 모서리를 불러들일 때까지

 

구름표범나비 / 이민하

 

나는 너를 개미라고 부를래

버거운 사체를 나르는 너의 팔에 매달려

나는 죽어서도 복에 겨운 지렁이가 될래

봄날 소풍 도시락을 싸는 너의 다리를 부러뜨리며

나는 너를 제비라고 부를래

그러면 너는 짧은 여름날 나무에 목을 매달고

심장처럼 꺼내는 매미의 눈물

그러면 나는 나무

십 량 너의 운구차가 지하에서 불면할 때

커피나무가 되어 펑펑펑 검은 물을 따른다

몸을 펼치면 표범

온몸 가득 까만 불씨를 날리며

너를 삼킬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앉으면 구름

깔끔하게 무늬를 접은 날개의 뒷면

성숙한 우리의 인사법

너를 낳은 너의 이름은 오늘도 애지중지

미행을 하네 그가 휘휘 던지는 그물망을 피해

장애물경마 기수처럼 우리 달릴래?

달릴래? 그러면 너는 바람

천공에서! 눈앞에서! 땅 끝에서! 너의 목덜미를 끝없이 잡아타고서

나는 구름! 나는 표범! 나는 나비!

살이 벗겨지도록 일광욕을 하며 기린초의 꿀을 빠는

노란 입술 빨간 종아리

울긋불긋 이름이 많은 나를 부르며 목이 쭉쭉 늘어나는

너를 기린이라 부를래

그러면 너는 흑마술 같은 울음

바늘이 되어 나의 이름에 꾹꾹 文身을 하는

너를 자꾸 통과하며 門身이 되는

나는 죽어서도 구름표범나비

표본실에 묻혀 사각사각 날개를 펴고 접으며

찍을 테면 찍어봐! 포즈를 바꾸며

 

무릎 나무                 /이민하

 

화분을 엎질러.

누군가 달려올 때까지.

무릎으로 기어.

누군가 내려다볼 때까지.

 

두 발을 버리고

흙에 생살을 비벼서

너의 눈가에 붉은 점토를 바를 거야.

 

그 속에 목발로 서서

배양토처럼 너의 눈을 파먹으며 자랄 거야.

 

무릎 둥치에서 잔뼈들 뻗쳐오르고

실핏줄 흘러 흘러

다시 숲을 공사할 때까지

뒷문에서 떠드는 바람은 입닥치라고 해.

소문을 올라타는 후배위 밖에 모르는

말 많은 짐승들.

 

당신의 두 번째 체위는 불멸의 화분.

난 무수한 잎사귀

녹색 손톱으로 빗물의 현을 뜯을 거야.

 

무릎에서 수액 대신 피가 흐르는

나무가 되어 철철철 사시사철 소스라칠 거야.

 

멍이 진 살점들이 과육을 만들면 푸딩처럼

혓바닥 스푼으로 떠먹는

날들의 키스.

 

동충하초처럼 우린 다정하게 앉아

남은 부위를 마저 손질하며

기억의 낸동탑에 실리는 포장육 더미를 바라보네.

 

천근만근 껴입은

새떼를 벗어 말리듯.

 

전망 좋은 창/ 이민하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가 달력을 들추더니

  저금통을 털어 시장(時場)에 다녀오신다

 

  뭐하려고요, 아직 가느다란 혀들을 가누지 못하는

  내가 검은 포대기에 싸인 채 묻는다

 

  아버지는 찰랑찰랑 웃음을 처마 끝에 달아두고

  맑은 아침을 골라 화단의 흙을 손톱으로 팠다

 

  고등어를 손질하던 엄마의 엉덩이가 햇덩이처럼 달아올라 비린내를 풍겼다

  고추가루 같은 땡볕이 따끔거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꺼낸 꽃씨를 가득

  화단에 묻고 집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처마를 흔들고 지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는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포대기에서 나를 꺼내 엉덩이를 탁탁 털더니

  거꾸로 세워 허리까지 흙에 묻고는 시간의 포장리본을 풀었다

 

  광택이 흐르는 연둣빛 신발들을

  핏기 없는 발가락마다 신겨주고는 두 손을 탁탁

 

  그러고는 생일상 위에 초를 꽂는 엄마가 있는

  사각 창문 안으로 들어가 화단을 바라봤다

 

  무성(茂盛)한 입들이 땅 속으로 뻗었고

  무성(無聲)한 잎들이 바람의 계단을 밟고 창문을 뜯어먹었다

 

 

합창단/ 이민하

 

우리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장과 허공 사이.

저녁과 아침 사이. 지금은 새벽 두 시입니다.

 

전쟁과 고요 사이를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소리의 약탈에 눈떴습니다.

 

소년들은 우측으로 소녀들은 좌측으로.

배급표를 받으려면 줄을 서세요.

행렬은 내일과 모레, 아빠들의 월급날까지

 

그리고 달의 빙벽까지 계속됩니다.

소년들은 소녀들의 샴푸 냄새를 채취하려고 발꿈치를 듭니다.

너무 자라서 죽은 언니들은 차가운 보름달 아래 안부를 적어 보냅니다.

 

편지를 읽기 위해 우린 문맹퇴치학교에 모이지만

말의 시취가 새지 않도록

이빨을 재갈처럼 물고 있습니다.

 

어둠의 도시락을 까먹는 무말랭이 같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죽은 언니들은 부장품을 빼돌립니다.

우리들 목숨의 절반은 그녀들 것입니다.

 

무기거래상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다듬었지만

우리는 안전핀처럼 비명을 착용합니다.

 

메트로놈처럼 빠르게 왕복하는

아침마다 저녁마다 한쪽으로 기우는 척추에

비누를 문지르세요.

 

단단함과 거품 사이에서 흔쾌히 태어나겠습니다.

우리의 독창은 귓속말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비만한 음표와 지루한 오선지 사이.

 

새의 얼굴/ 이민하

 

  날개를 저을 때와 날개를 접을 때

  새는 어떤 표정일까

 

  날개는 새를 소유한다

  타이머가 날개를 소유하듯이

  누구나 태어난 채로

 

  오늘은 나의 생일이 아니다

  축하해 다오

  문 앞에 사탕처럼 들러붙는 꽃들 말고

  죽은 새도 괜찮다

  선물을 다오

 

  열두 살 때 처음 내 방에 날아든

  새 한 마리가 다음 날 화단에 묻혔다

  그 애의 싸늘한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후로는 종종 놀래키듯

 

  크고 작은 새들이 들어와

  방에서 실려 나가는 일이 늘었고

  그때마다 새를 대하는 기술이 늘었지만

  나는 여전히 새를 수리하지 못한다

 

  새는 얼굴을 숨기려고 부리를 키운다

  비행기처럼 자란 부리를 피해

  엄마는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는 어떤 이들의 부리공포증을 이해한다

  나의 지렁이공포증처럼

  환각이 절벽으로 떠미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산책을 시도하지만 기차처럼 달려오는 지렁이의

  꼭꼭 숨겨진 얼굴처럼

 

  날아가는 새의 얼굴은 날개 속에 묻혀 있다

  날개는 눈빛을 거래하지 않는다

 

  나는 화단에 엄마도 묻었다

  화단은 무덤을 숨기려고 꽃들을 키운다

 

  손톱으로 흙을 파며 내가 기르는 건

  묻혀진 날개가 아니라

  새의 얼굴

 

  나는 화단에 나를 묻었던 걸 이해한다

  부리에 삼켜진 엄마처럼

  지렁이에 삼켜진 사랑처럼

 

사이의 관극 

   ―관계에 대한 고집  / 이민하

 

   앞자락에서 떨어진 소년을 화분에 묻고 지루한 겨울 일기를 쓰는 사이,

   소녀가 세트에서 치워졌습니다

   관객이 소녀의 행방과 소년의 행동에 몰두하는 사이,

   우리는 무대를 광이 나게 닦고 조명을 둘러보고 새로운 소품들을 주문하였습니다

   소년이 테라스에 띄엄띄엄 배치되는 사이,

   관객은 눈을 비비고 소녀가 눈곱처럼 날아갔습니다

   우연처럼 혹은 각본처럼 우리가 살풋 잠이 든 사이,

   무대 밖으로 수거된 소년과 소녀의

 

   미끈한 오토바이와 희미한 발자국 사이

   소품들을 실은 계절이 행렬처럼 지나갔습니다

   소독차 꽁무니를 따르듯 나비 떼를 나르는 트럭을 좇는 꼬마들과 돋보기 안경을 쓰고

난롯가에서 책을 읽는 노인들 사이

   우리는 훔친 소년의 나침반과 소녀의 풀린 스웨터 한 올을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나무토막 뼈마디와 뼈마디 사이

   끝이 없는 실들이 우리의 손목에서 실패를 풀었습니다

   간혹 관객으로 변장을 하고 객석을 빠져 나온 마리오네트가

광장의 끝 페이지와 첫 페이지 사이

   인파에 절여놓은 소년과 소녀를 손질하였습니다

 

   배달된 나비 떼가 가루비누처럼 날리는 사이,

   잠에서 깬 우리가 기다리는 무대와 텅 빈 객석 사이

   뒤죽박죽 엉킨 세탁물처럼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우연처럼 혹은 각본처럼 우리는 조용히 불을 껐고 무대가 어두워지는 사이,

   막이 오르자 웅성거리는 관객들 사이

   팝콘처럼 조명이 켜졌습니다

 

사과나무정육점        / 이민하

 

 손에 손을 포개고 얼굴에 얼굴을 묻고 그는 빈집이 되었네. 여름은 선탠하러가서 물에 빠지고 가을은 헐거워진 안경테를 수리 중이고 잠꼬대를 개고 일어난 겨울이 산책 코스에서 만난 그는 팔다리가 거미줄 같았네. 겨울이 창고에서 황사바람을 꺼내 와 염포처럼 덮치는 순간, 손에 손을 펼치고 얼굴에서 얼굴을 꺼내며 그는 향수(鄕愁)를 사방에 터뜨렸네. 겨울이 가을을 불러오고 가을이 여름을 건져 심장 마사지를 하였네. 천지가 둘러앉아 감탄하였네. 겨울이 보석함에서 향수병(鄕愁病)을 꺼내 와 새로운 라벨을 붙이는 순간, 여름은 미니어처를 들고 향수공장에 가고 가을은 블로터 스트립을 흔들며 실험실로 가고 겨울도 잠옷 자락을 하얗게 휘날리며 사라졌네. 빨갛게 곪아 팔다리를 뒤틀던 그는 망치를 치켜들고 정수리를 내리쳤네. 지진이 나듯 살이 뚝뚝 떨어지자 천지를 식탁에 불러 앉혔네. 도축되지 못한 사과들은 빈집에 매장되었네.

 

모델     / 이민하

 

  난 당신이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 캔버스를 두 눈에 끼고 당신을 만나는 날이 많아졌어. 무릎 위에 잠든 당신의 머리털을 벗기고 치렁치렁 드리우는 고요한 붓털. 헤어져 돌아와도 당신을 그리고 꿈에서도 당신을 마구 그리고, 방 안엔 그림이 넘치네. 우르르 당신을 몰고 나가 갤러리에 팔았어. 딴청을 부리는 당신을 그리고 멀뚱이 뒤돌아보는 당신을 그리고, 난 당신이 좋아서 광장에 팔았어. 캔버스가 필요해서 떨이로 팔았어. 당신을 많이 팔수록 난 캔버스 부자, 당신의 부자. 난 캔버스 왕국을 차릴 거야, 당신의 왕국. 산맥처럼 불끈불끈 이젤을 세우고 나무의 왕국 송충이의 왕국 구름의 왕국도 차리겠지. 난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몰래 벗기고 당신을 몰래 덧칠하고 새벽마다 나이프로 북북 당신을 찢고. 그런 나를 무심히 가로채는 당신. 그런 당신이 좋아서 난 삐딱하게 흉물스럽게 그림을 자꾸 그리고, 난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나를 그리는 당신을 보고 싶어졌어. 당신을 그리다 말고 포즈만 생각했어. 나는 우뚝 멈추고 백치처럼. 피부를 긁어대며 백지처럼. 당신이 나를 그리고 나를 팔고 나의 왕국을 차려줬음 좋겠어. 무지개가 철거된 지하 단칸방이라도 좋겠어. 그러면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당신으로 살이 툭툭 터지는 나의 왕국을 무심히 따돌리는 당신. 그런 당신이 좋아서 난 삐딱하게 흉물스럽게 포즈를 자꾸 바꾸고, 휴일의 기상청이 봉합하는 해일에 불탄 어깨와 모래에 으깬 무릎. 지루하게 잇댄 밤과 낮의 해안선처럼 우린 정말 같은 왕국에 있을까. 누군가 그걸 알려주려면 그가 우리를 그려줘야 해. 그만이 우리의 왕국을 차려줄 수 있어. 당신은 사슴 같은 백성의 눈빛으로 아이를 구걸하네. 나는 백지장 같은 유방에서 융기된 붓 하나를 당신의 입에 물리고, 난 당신이 좋아서 누군가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로 했어. 포즈를 취하다 말고 누군가만 생각했어. 낯선 그에게 꼭꼭 여몄던 붓을 꺼내주네. 당신을 잠시 미루고 포즈를 살짝 풀고서 그에게 그림을 가르쳤어. 그가 우리를 그리고 우리를 팔고 우리의 왕국을 차려줄 거야. 여름의 해변과 겨울의 고양이에게도 붓을 꺼내주네. 파르르 떨리는 살점을 찍어 그들이 덧칠하고 지우는 캔버스에 일파만파 이식되는 우리의 왕국. 그러면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난 당신이 좋아서 온몸엔 물고기가 넘치고, 뻐끔뻐끔 피를 빨며 피부 위로 솟구쳐 오르고. 우리는 평생 부패하지 않는 연인처럼 식욕이 넘치고, 누군가 우리를 나란히 겹쳐놓고 창밖으로 첫눈 같은 소금을 뿌리네. 그런데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손끝의 소금기를 말리고 잠시 창문을 들여다 보는 우린, 갤러리에서 광장으로 이어진 끝없는 캔버스 밖에 있기는 할까.

 

개랑 프라이/ 이민하

 

 당신이 툭, 깨뜨리기 전에

 난 이미 깨질 만큼 깨졌다.

 

 껍데기 안에 멍든 살이 고여 있지만

 난 감각이 빠르다.

 

 당신이 나를 지목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번들번들 때에 찌든 미끄럼틀.

 

 당신이 이리저리 퍼뜨리기 전에

 난 이미 퍼질 만큼 퍼졌다.

 

 껍데기를 빼앗기고 바닥에 감염되었지만

 난 용서가 빠르다.

 

 허기진 새벽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부산을 떨더니

 기념품 가게를 지나 드라마 촬영장을 기웃, 새로

산 접시에 눈물을 촛농처럼 쏟고

 계절의 네거리에 겨우 당도하지만

 아래로 굳은 손가락,

 너는 포크로 진화하지 못한 시간의 갈팡질팡.

 

 휴지통에 버려진 상반신과 하반신을 용접하고

 난 변신이 빠르다.

 

 진짜 내 몸은 껍. . . 털갈이를 하듯

 비워낸 내장을 새로 끼우기 위해

 

 당신이 잘근잘근 씹기 전에

 난 이미 씹을 만큼 씹었다.

 땡볕에 익은 반숙의 살덩이를

 개랑 사이 좋게 나누어 먹는 두 개의 혀.

 

 당신이 지글지글 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지질 만큼 지졌다. 짖을 만큼 짖었다.

 

가면놀이 / 이민하

 

  정거장도 없는 기찻길처럼 팔이 자라요

  어디 갔니 얘야, 엄마는 백 년 전부터 찾고 있지만

  소용없어요 다람쥐통에도 끼일 만큼

  나는 너무 자라 버렸고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해

  공중에서 놀고 어둠 속에서도 놀지요

  롤러코스터를 타고 호수 위를 빙글빙글 건너는 레일 끝

  튤립 꽃밭엔 의붓아이들이 와글와글 피고 있어요

  보여 줄까요? 유령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어

  귀신처럼 멈춰 서 있는 나의 특기

  사람들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지요

  그들이 무심코 스쳐지나는 관 속에

  아흔아홉 개나 되는 가면을 나는 가지고 있어요

  흉내내는 꼬마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물 뿐

  겁주거나 괴이한 분장을 즐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나도 한때는 비누 같은 엄마 손을 놓치고

  어둠 속의 악마들 틈에서 발을 못 뗀 적 있지요

  유아를 보호하라는 수칙을 어기고 어른들은 벽에 붙어

  눈을 너무 가늘게 떠요

  하늘도 자전거도 아닌 하늘자전거를 끄는

  공중운행이 유랑도 탈주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후

  시시한 손잡이를 버리고 두 발을 묶는 긴 고무줄처럼요

  저길 보아요, 회전목마가 지겨운 사람들은 딱딱한 말을 버리고

  외마디 비명을 챙겨 번지점프대로 오르지요

  날개를 일찍 포기한 그들이 날고 싶어하는 건

  추락하는 순간에도 믿음을 주는 공포 때문이에요

  그들의 왕복은 믿음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죠

  안전벨트가 없으면 불안한 상상의 지지대

  가면을 수십 개 바꿔 쓰는 나는 그들의 상상 속에 이미 없어요

  나는 너무 끝없이 자라고

  해가 지고 있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당신이 보채는 사이에도

  몇 개의 가면이 내 얼굴을 스쳐 갔는지 몰라요

  입을 맞춰도 소용없어요

  가면을 버리고 당신은 너무 빨리 늙어 버렸는걸요

  벽돌처럼 굳어버린 얼굴엔 악몽조차 기웃거리지 않는 걸요

  물론 이건 사라지는 고백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하는 말이지요

  어둠 속에서 가면을 고르는 동안 내 무릎에 손을 얹는 사람마다

  손등을 문질러 보며 나는 묻곤 하죠

  당신이 내 엄마인가요?

 

사진놀이 이 민 하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 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난간에 매달려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

출렁이는 필름을 타고 앳된 얼굴의 어머니가 오셨다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보셨다 어머니에게 렌즈를 맞추었다 눈을 깜박이던 어머니가 벽에 걸렸다 시계바늘이 꽂힌 어머니의 팔이 액자 속에서 바닥으로 길게 내리뻗었다 발디딜 틈 없이 쌓인 사진들을 비집고 가위를 집어 올렸다 나는 어머니 아래 웅크리고 앉았다 어머니는 손에 잡히는 대로 사진들을 오려냈다 눈을 감은 어머니는 가위질 솜씨가 대단했다 물집을 도려내자 사진들은 오븐에 구운 것처럼 금세 바삭해졌다 다리가 잘린 아버지가 목이 없는 아이의 무릎에 포개져 방바닥에서 웃고 있었다 감탄한 나는 자꾸 사진을 찍었다

더 이상 인화할 몸뚱이가 없자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를 찍었다 거울 속을 헤엄치는 파랑새도 찍었다 심장 대신 램프가 달린 냉장고를 찍을 땐 눈이 하얗게 탔다 제법 능숙해진 나는 두 눈을 책갈피에 꽂아 두고 사진을 찍었다 손가락을 공중에 매달아 놓고 입으로도 사진을 찍었다 토막난 사진들이 보기좋은지 어머니는 자꾸 오렸다 눈은 뜨지도 않으셨다 푸른 날개를 단 반 토막의 기차가 방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위질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이 오자 사진들은 분말이 되어 흩날렸다 어머니의 가위를 피해 습자지처럼 얇아진 나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창가에서 떠돌다 끈적한 천장에 들러붙었다 난자당한 사진들 속에 흩어져 있던 나의 눈들이 천천히 걸어나와 나를 찍었다

 

서 있는 의자  /이민하

 

앉으면 발목을 휘감아 오르는 의자

당신을 휘감고 어둠의 정수리에 오르지

굳은살뿐인 온몸으로 하루 종일 넝쿨을 만들지

담벼락을 빨아먹는 줄장미처럼 피가 흐르는 의자

앉으면 당신의 몸에 불을 지피지

검은 천막을 얼굴에 덮어 시간의 뒤편으로 당신을 납치하지

나풀대던 두 눈은 발끝으로 흘러내리고

당신은 쿠킹호일처럼 구겨져 하룻밤 단꿈에 겁탈 당하지

몸을 구기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의자

앉으면 물이 되어 바닥으로 흐르지

의자 위에서 물거품 되는 당신의 비대한 모자

흰 염소의 피를 묻히고 돌아온 당신을 통째로 세탁하는 의자

틀니처럼 딱딱거리며 핏물을 탈수하는 의자

당신을 알알이 펴서 포도밭에 널어 말리지

햇살이 죽창으로 생살을 헤집는 날

나무가 된 의자는 당신을 다른 의자에게 대물림하지

태양의 홀씨인 당신이 훌훌 날아가 버린

볕 좋은 창가에서 죽었던 의자

새파랗게 죽어서 영원히 사는 의자, 여자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이민하

 

  안개의 거리 끄트머리에 모퉁이가 있네

  옆구리에 빵냄새를 겨누고

  붉은 피톨을 터는 빵가게가 있네

  맛보지 못한 무수한 빵의 종류와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티비가 있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이 있네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이 있네

  천천히 유리창을 닦다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이 있네

  안개에 절인 여자들을 곱게 갈아

  반죽을 빚는 주방이 있네

  문드러진 음부까지 바삭하게 굽는 토스터가 있네

  비닐 포장된 여자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어디론가 발송하는 하루가 있네

  오토바이가 첨벙거리며 횡단하는

  샛노란 고름투성이의 저수지가 있네

  울렁거리는 새벽비에

  나뭇잎들을 토해내는 가로수가 있네

  유리창에 튄 녹색 토사물을 씻어내는

  오늘 처음 배달된 여자가 있네

  여자가 엎드려 닦는 바닥에

  기억 속으로 전송된 여자의 남겨진 핏자국이 있네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창 밖의 여자가 잇네

  그녀들을 이야기하는 길가의 여자와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길 밖의 여자가 있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길모퉁이가 있네

  손을 대면 사라지는 한 칸의 유리가 있네

 

유년의 전설/이민하

 

   버스를 탔지요 밤이었지요 껍데기 까칠한 창문에 어둠의 노른자가 달라붙었지요 뭉글뭉글 손끝으로 핥아졌지요 달의 솜털이 샛노랗게 몸에 돋았지요 막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나는 어지러웠지요 버스를  탔지요 아침이었지요 개나리 깃털을 꽂은 골목길이 내 손을 끌고 학교로  갔지요 다리를 지날 땐 바람이 불었지요  깃털이  휘날려 내  눈을 가렸지요 더 멀리 낯선 길을 더듬고 싶었지만 굳은살투성이 추장의 손에 넘겨졌지요 당도한 마을의 새장 속에서 아이들은 합창을 하였지요 귀가 어두운  나는 헐렁한 구두를 타고 강변으로 달렸지요 버스를  탔지요  낮이었지요 물의 신이 찰랑찰랑 태엽을 풀고 있었지요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이 허우적거리며 구두를 물어뜯었지요 구두 안에서 잠에  빠지던 나는  멀미를 앓아야 했지요 간밤에 교과서를 챙겨주던 엄마도 배를 움켜쥐고  돌아온  나를 어쩌진 못했지요 자라지 않는 발 대신 발가락 수를 늘리며  허둥지둥 강물을 건너다녔지요 버스를 꿰고서 집에서 마을로 줄다리기하던  길도 노랑 까망 깃털의 색깔만 바뀌었지요 버스를  탔지요  밤이었지요 구멍이 많은 버스는 밤새 구토를 했지요 사람들이 펑펑 쏟아졌지요  달이 내 몸에 마지막 빨대를 꽂았지요 나는 노란 분화구가 되어 불멸의 이름을  얻었지요 낯선 시간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마구  팔았지요 잘게 쪼갠  얼굴로 함께 버스를 탔지요 생면부지인 나를 마주 보며 여행을 떠났지요

 

13월의 산책/이민하

 

  당신이 민하씨, 하고 부를 때 나도 함께 그녀를 부르는 느낌이야. 그녀의 환타색 이불이 왼쪽 끝자락부터 걷히는지 오른쪽부터 걷히는지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부르면 뒤돌아보는지 나도 궁금해지는 느낌이야. 당신이 우리, 하고 입을 뗄 때 나도 두근두근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 혹시라도 들킬까 봐 테이블 밑에라도 숨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여의치 않으면 눈이라도 질끈 감아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손이 떨려 땀을 닦던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당신이 이런, 하며 바닥까지 내려가 동그란 등을 섬처럼 밀어올릴 때 도벽처럼 몰래 쓸어보고 싶은 느낌. 당신이 여기, 하며 손수건을 훨훨 털어 내밀 때 민하씨의 손에 내 손을 얹어 당신 손끝을 겹치는 느낌. 손수건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 때 그래서 손과 손 사이 낯선 간격이 생길 때 내 손은 폭설 퍼붓는 공동경비구역 한가운데처럼 양 날개가 무겁게 찢어지는 느낌.

 

  뜬금없이 당신이 안녕, 하고는 민하씨가 매달린 아랫입술을 창문처럼 꽉 닫을 때 창밖으로 구천지하까지 떨어지는 그녀를 견디는 두 배의 느낌. 당신이 아뿔싸, 하고는 걸음을 되돌려 그녀를 어깨에 떠메고 끝도 없는 계단을 기어올라갈 때 당신의 어깨를 누르는 두 배의 느낌. 당신이 깊숙이 그녀의 허파에 혀를 집어넣고 인공호흡을 할 때 아아 그녀의 입술에 벤다이어그램처럼 내 입술을 이리저리 포개는 느낌. 내친김에 그녀와 나 사이에 당신의 검은 피부를 먹지처럼 끼우고 누워 물컹물컹 문지르면 그녀의 내장까지 고스란히 내 몸에 복사되는 느낌.

 

당신과 함께 눈을 뜬 민하씨가 나를 두고 천천히 멀어질 때 천둥 같은 머리를 전봇대에 번쩍번쩍 박아 대는 느낌. 그녀를 미행하며 차라리 죽어버리자 찰나의 느낌. 어느 날 늙은 당신이 그녀가 넘겨 주는 달력을 훑으며 12사도를 초대하는 최후의 만찬. 일광욕을 하는 눈사람처럼 입술이 녹는 당신이 우리의 앞날을 위해! 외칠 때 빵을 나르던 민하씨가 조용히 달려온다. 포도주를 따르던 내가 당신의 늘어진 귓불을 빨며 그녀를 슬쩍 곁눈질하는 느낌. 그러면 당신도 당신의 뒤통수를 훔쳐보며 나를 지나 그녀를 지나 거울 속으로 영영 사라질 듯한 그 느낌.

 

나비병동 / 이민하

 

하얀 탁자에 팔꿈치를 스치지도 않고 문병객들은 흩어졌다

이따금 꽃을 안고 오는 사람이 있었으나 두리번두리번

화병을 찾다가 떠나갔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하얀 벽

텅 빈 눈으로 마주보는 그가 거울처럼 놓여 있었다

 

약물을 체크하고 간호사는 돌아갔다

염색되기 좋은 하얀 유니폼이

백지처럼 다려진 뇌주름 같았다 

 

그를 하얀 시트에서 뜯어내 일으켰다

허공을 찌르는 갈고리에서 끌어내린

  링거 병에 꽃을 꽂자

 

  우수수 꽃잎이 떨어져

  그들의 썩어 가는 부위에 연고처럼 달라붙었다

  꽃향기가 붕대처럼 그들을 휘감았다

 

  몸 속에 다른 피를 섞었지만

  돌발적인 사고에 대해 그는 묻지 않았다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문병객들은 응급처치처럼 스친 연애에 대해 귀를 들이댔다

  그녀는 그들의 귀를 깨물며 속삭였다

  내 피가 더럽니

 

  파킨슨병을 앓는 예순 개의 초침을 떨며

  낡고 두꺼운 얼굴로 달랑달랑 시계추를 흔드는

  시간의 병실

 

  수요일의 동물원처럼 서랍은 물어뜯긴 구두를 잠재우고

  메마른 밤의 사료를 준비한다

  폭설 같은 어둠이 내리고

  연락 두절된 문병객들은 창밖에 파묻혔다

 

  말이 없는 자음과 모음처럼 나란히 앉아

  허기는 종양처럼 자라고

  조용히 몸이 끓고

  수증기처럼 표정이 섞이고

 

  기억을 퇴원하기 전

  삼킬 수 있는 단 한 알의 하루

  사면이 백지인 벽 안에서

  탁자 위의 꽃이 붉은 점막을 밀어 올릴 때

 

  국수 한 가닥을 입에 문 멜로 주인공들처럼

  시인 양과 독자 군이 두 개의 혀로 물고 당기는

  한 가닥의

 

  두 사람의 내장 속으로 흩어지고 남은

  시의 탱탱한 마지막 행을 향해 그들은 입술을 포갰다 서로의 뉘앙스를핥았다

  하나의 발음을 射精하고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국수 국물을 비우듯

  조용히 행간을 삼키고 그들은 사랑에서 빠졌다

 

  트림 같은 나비 한 마리

  딱지처럼 앉은 꽃잎에서 솟아 창밖으로 사라졌다

 

키스   /이민하

 

붉은 빙산을 떠받치고

마른 성냥을 그어대는 두 개의 분화구

 

오른쪽엔 바다로 가는 계단, 왼쪽엔 용암에 타는 나무

찢어질 듯 양 날개고 헤엄치는

목 잘린 나비 한 마리

 

이민하 시집" 환상수족幻想手足"[열림원]에서

 

이민하 시인의 시집 "환상수족"을 읽어 보면 대체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그런 산문형 시들이다 "너와 나"라는 개념이 해체된 듯한 의식에서 출발하는 주제들은 마치 설치 미술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다양하게 읽는 독자들 마음을 이끌어 낸다 어쩌면 현대적 사고, 현대적 의식에 충실한 삶의 표정들이다라는 결론이 앞선다 그 중 가장 짧게 그러면서 리얼하게 사람 삶의 현실감을 묘사한 작품이" 키스"다 붉은 빙산처럼 녹아나는 마음에 두 분화구에서 뿜어 오르는 열정, 사랑에 빠지는 계단과 제 몸을 태우는 사이 키스할 때 입모양을 거울에 크로즙시켜 놓은 듯, 목 잘린 나비가 그려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 목 잘린 나비는 어느 한 쪽의 열정이 사라지면 죽어버리는 생명체다 키스의 의미가 열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샘물 같은 시다

 

문제작

 

1

 

 허공에 커다란 손 하나가 걸려 있다.

 팔이 연결돼 있지 않으므로 무엇이 그것을 지탱해주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꿈틀, 핏발을 모두 한끝으로 모은 검지손가락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2

 

 나는 1을 만든 사람이다. 설치한 사람이다. 배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실험맨이다. 그 아래를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며 손가락 끝에서산책의 기능을 보고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이름을 에이치로 할까 엠으로 할까 하다가 나로 부르기로 마음먹는다.

 ''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동등한 닉네임이다.

 

3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없습니다.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4

 

 나는 가끔 엽총 한 자루를 어루만지지만, 그건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준하는 데 쓰인다.

 가령, 어젯밤엔 허공이 손가락만 뚫어지게 살피다 아무것도 없군. 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 하나를 사살했다. 당신은 한층 가벼워져야 하리.

 

5

 

 --이 손가락은 문제가 많아요. 나의 간편한 혀로

비난하거나 공격할 수 있어요. 군중의 물결 위를 누

비는 부드러운 서핑 보드처럼요.

  --무엇이 문젠가요?

  --허공에서 내려올 줄을 몰라요. 가리키는 것이 눈에 띄지 않고 뜯어볼 수가 없어요. 결정적으로 용도가 없어요.

 --최소한 날림치는 아니니까요. 바람 불면 손가락

방향이 흔들리도록 제작된 거예요. 용도는 무수한 통로 안에 있으므로 하나의 열쇠로, 집약되지 않아요. 빛과 합창으로 세공된 당신의 취향은 어눌한 나의 혀보다 짧군요.

 

6

 

 .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그걸 둘러싼 허공을 보세요. 허공에서 보자면 벽과 문이 하나의 금에 불과하죠. 호기심 많은 당신은 풍문을 타고 여기 왔겠지만 당혹감을 트집으로 바꿀 순 없지요. 무턱대고 먹어치운 입가의 여운을 설명하지 못해 지배인을 불러

이 빠진 접시를 타박하는 사람 같군요. 흔들리는 손가락을 측정하려고 헐떡거리는 당신의 비닐 같은 혓바닥이야말로 날림치. 두 눈은 여기 있지만 아직 요람에 싸인 당신은 천장의 모빌 따라 고개를 저으며 빙글빙글 끄덕끄덕. 당신이 움켜쥔 제작의뢰서를 취급하는 상점을 알려 줄까요.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 아래 수만 갈래 길을 내며 떠나갔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추적하거나 관여하지 않아요. 설익은 바람의 요리를 먹을 때의 표정에만 관심이 있죠. 그들이 아주 맛있게 먹을 때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다양할수록 진짜인 법이죠.

 

7

 

전진도 후퇴도 없이, 어둠 속에 거머리처럼 웅크린발가락들의 지루함이여 어눌함이여.

긴긴 백주 대낮의 무용담으로 입이 닳는 립싱크를 우뚝 멈춘다면 당신은 백지처럼 남아 돌까.

당신은 文을 제작하는 사람.나는 門을 제작하는 사람. 문 제작이라는 간판을 걸고 이 거리와 다정해진 사람.

   영업장이나 광고문에 사활을 걸지 않는다.

   나는 1의 문에 붙일 적당한 이름을 고르는 중이다.

  허공의 문. 충분치 않다. 그냥 문이라 부르기로 마음 먹는다.

  ''은 어디서나 가질 수 있는 동등한 닉네임이다.

 

8

 

  , 당신이 부탁하는 사용설명서에 대해서라면,당신은 이미 사용 중이시다. 규칙 같은 건 애당초 제작 과정까지만 개입한다. 우리의 소통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사용되며, 당신은 이미 문을 통한 산책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

 

 문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손잡이를 만들어달라고요? 손가락 사이 행간을 더듬거리는

 고집쟁이 당신. 옆동네에 편리한 손잡이만 만드는 제작공이 있지요.

 소개서를 써줄 테니, 다음에 올 땐 구두약을 입술에 바르는 장난일랑 하지 말아요.

 

뫼비우스가 사라진 뫼비우스 맵 /이민하

 

  등 뒤에서 누군가 칼금을 긋는다.

  갈라진 틈으로 차가운 액체가 흐르는 순간. 눈을 떠

  창 밖을 본다. 검붉은 암벽이 뒷짐을 지고 M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릴 적에도 거대한 암벽은 늘

  그의 이마를 짚어 주며 요람을 흔들어 주었다.

  문드러진 귀. 꽉 다문 입술은 왁스를 바른 듯 번질거렸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연주자가

  눈을 뜬 채 죽었다. 란제리처럼 나부끼던

  M의 귀에 바이올린 소린지 비명 소린지 구분이 안 가는

  연주자의 마지막 발음이 새겨졌다.

  그 후로 바이올린 활에 꿰인 사람들이 줄줄이

  암벽 너머로 사라졌다. 네 발로 오르는 그들의

  뒷모습. 그는 태연하게 때론 뭉클한 향수에 젖어 그걸 지켜봤다.

        간헐적으로.

  그들이 두고 간 낡은 악보들이 핏물이 새는

  벽을 타고 넘어왔다. 그 때마다 벽쪽으로 기운

  그의 귀에 돋아나는 뽀얀 속잎을 뜯어냈다.

  속잎은 자꾸 생겨났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자꾸 사라졌고

  그 때마다 바이올린 소린지 비명 소린지 모를 그들의

  마지막 발음. 그는 여린 속잎에 받아 적었다. 익숙해진

                    짧고 둔탁하고 비릿한 발음으로.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쉴 새 없이 연주를 들려줬다. K는 창문을 닫고.

  손뼉을 치던 S는 모자로 코를 막고.

  친절한 L은 그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음표들이 뛰쳐나간 악보처럼 그의 속잎들은

  귀를 덮기도 전에 뜯겨졌다.

                                 왼쪽 서랍.

  권총으로 뜯어낸 속잎을 차곡차곡.

  왼쪽 서랍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뜯어낸

  속잎에는 고물거리는 실지렁이들이 뒤엉켜 있다.

  실지렁이들은 서로 엉겨붙어 주름진 이마의 아기로 변신했다. Opus. 1.

  뱃속에 고래를 품은 여자, Opus. 29.

  악보의 흔적은 진화의 알리바이.

  두 눈의 용광로에서 끝없이 사슬을 뽑아내는 노인, Opus. 73. 이윽고

  네 개의 벽이 원형극장처럼 빙 둘러 앉았다.

       오른쪽 서랍.

  M은 오른쪽 서랍에 남은 탄알을 세어 본다.

  아침마다 오른쪽 서랍을 물에 비추어 보면

  맑은 날과 비오는 날 셈이 맞지 않는 탄알들을 한데 뭉쳐

  관자놀이를 향해 레퀴엠을 장전한다. 기억의 정육점에 매달려 있는

                  사랑스런 육체들이여 안녕. .

  M의 앞다리 두 개가 밀폐된 영사막을 뚫고 반사적으로.

  창 밖으로 이어진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암벽의 귀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

  경쾌하고 느슨하다. 수억만 개의

  태양이 천천히 핥고 지나간 끈적한 귀.

                                                    끝없이 올라가.

  온몸으로. 문드러진 암벽의 귓구멍을 쑤셔댄다.

  지상에서 배운 최초의 발성법으로. 아―

  두개골이 파열되듯

  그는 급속하고 부드럽게 절벽 끝으로 밀린다. 캄캄한 절벽

  아래로 붉고 따뜻한 안개가 낭자하다. 골짜기마다

  바이올린 소리가 실지렁이처럼 뒤엉켜 있다. 발을

  헛딛는다.

         끝없는 추락.

  M은 따뜻한 골짜기에 웅크리고 있다. 입을 오물거린다.

  그의 몸 한 부위에 길다란 줄이 꽂혀 있다. 그 줄을 타고 내려온

  바이올린 선율이 비닐랩처럼 온몸을 감싼다.

  그는 거꾸로 태아처럼 매달려 있다.

  손 대신 두 개의 서랍이 팔 끝에 붙어 있다.

  귀에서 여린 속잎이 돋아난다. 긴 여행이 시작된다

 

천문학자는 과거를 쇼핑한다 / 이민하

 

  눈앞에 있는 별은 아주 오래 전의 별이지요.

  수년 전의 별부터 수만 년 전의 별들을 보고 있는 거라며

  그는 걸음에 잠깐 쉼표를 찍고

  나는 아아아 하품을 한다.

 

  우리가 죽은 후에나 당도하는 별빛의 현재 따위는 산책로 옆으로 치우며

  우린 나란히 꼬르륵거리며 걷고 있네.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이미

  사라진 눈. 사라진 어둠.

 

  골목 입구에 차린 구름약국의 아이들이 전신주에 걸터앉아 전화선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너무 멀리 떨어져 빛이 닿지 못하는 별처럼

  아스라한 허기로 잠시 이사를 고민할 즈음

 

  그가 문을 열었고, 난 벼룩시장을 접었다.

  물컹물컹 천체망원경으로 짓무른 그의 눈알에 연고를 다 발랐을 때

  그가 손짓한 지상으로의 저녁 초대.

  어제 낯설게 소매를 스쳤던 마트에서

  오늘은 함께 새로운 메뉴를 고른다.

 

  다 안다는 듯 관심 없다는 듯 고향 대신

  나의 취향을 당신이 물어보는 사이 나는 똑 딱 똑 딱

 

  빛이 30만 킬로를 달리는 1.

  소리가 340킬로를 달리는 1.

  그리고 기억이 수십 년을 달리는 1초만큼씩 멀어진다.

 

  당신은 이미 사라진 빛 속에 남아

  사라진 내 목소리를 듣고 있네.

  사라진 이빨, 사라진 키스,

  볕 좋은 치과에 모여 쌍둥이 뻐꾸기 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전속력으로 관측되기 위해

  수명을 다해 부풀어 오르다가 폭발한 초신성의 잔해들,

오천광년을 걸어 잠시 들른 이 별에서

  끝없는 불꽃놀이로 꺼지지 못하는 사람들, 믿지 못 하겠니, 우리는

  잠들지 않는 냉동 수정란처럼 둥둥 탯줄을 끄는 해파리성운.

 

  밤하늘에 목을 맨 모빌이 되어 수수만년

  우리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편지를 수거해 간 우편배달부는 버즈 두바이*에서 밤마다 참수당하고

  진열대에는 저녁에 쓰일 햇반 같은 활자만 남아

  쇼핑할 수 없는 엄마가 하나 둘 지나간다.

  나는 쇼핑 카트에 잠들어 있네.

 

*버즈 두바이:세계 최초의 인공구조물

 

거식증 /이민하

 

골격만으로 표정을 짓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할 테야. 아이스크림처럼 살 살 녹는 너의 살. 살을 모두 발라내고 연애를 할테야. 날마다의 저녁은 성찬. 은촛대와 접시를 나르는 하얀 머릿수건과 에이프런을 두른 여자들. 그녀들은 달빛 엉덩이를 흔드네. 나풀거리며 우리는 끝도 없이 긴 사각 식탁에 모여 핏물이 덜 빠진 양고기를 씹네. 허기와 요리의 접경인 허리에서 살과 살은 섞이네. 불어나는 허리 아래 뒤축 닳은 구름. 당신의 부피가 죽이는 것들. 당신은 너무 별처럼 헤퍼. 당신이 모은 눈물은 화려해서 식도를 토해내는 소화불량. 부드러운 뼈대를 혁대처럼 날려봐. 섬세한 그림자의 각도. 관절마다 따뜻한 어둠의 유배. 골격만으로 울음을 우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할 테야. 뼈 끝에서 비누방울처럼 톡 톡 부서지는 눈물. 뼈와 뼈가 다리를 포개고 뼈와 뼈가 잔을 들고 창을 바라보네. 온몸의 창살은 육질의 우리를 안으로 밀어넣고 내장같은 아침을 게우네.   

 

밸브 /이민하

 

   한 남자가 밸브를 잠근다 만찬을 펼쳤던 푸른 불꽃이 손 안에 수거된다 남자는 풍경의 생살을 천천히 씹으며 창문을 본다 입 안에 수거된 살점들과 한 몸이 되어 가는 동안 겨우내 나비 떼처럼 달라붙었던 유리창의 성에가 텅 빈 눈 안에 고스란히 수거된다

 

   남자는 식탁 위에 흉터처럼 남은 빈 그릇들을 닦아 놓고 그림자를 걷어 침대로 간다 거울을 건너가려면 잠시 몸을 적셔야 한다 암초에 엉켜 나부끼다가 뜯겨진 비단풀처럼, 해면 위로 떠오른 그의 흰머리 몇 가닥이 기억 속으로 수거된다

 

   남자의 손가락을 지켜보며 소파에 앉아 수군거리던 하얗고 검은 건반들이 하나하나 피아노 속으로 들어간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첨벙대던, 그가 뻗었던 수만 갈개의 손길이 되돌아와 눈이 스미듯 두 손 위에 녹아 들어간다

 

   남자는 침대에 엎드린다 온몸을 바닥에 밀착하고 활주하기 시작한다 창틈에서 식칼 같은 달빛이 날아와 그의 등에 날개처럼 꽂힌다 만삭의 피가 누출되기 시작하자 벽에 걸려 있던 시간이 내려와 신속하게 남자를 잠근다 그 집의 유일한 불꽃이었던 남자가 어둠 속으로 안전하게 수거된다

 

스쿨 오브 락() / 이민하

 

옷을 만드는 학교에 다녔어요. 재봉질이 재미나서 새벽녘까지 남았어요. 유령이 복도를 떠돈다는 루머가 학교에 퍼졌어요. 그건 내 발소리가 아니에요. 밤마다 그림자를 박는 재봉틀 소리. 몰래 남아 입을 꿰맨 아이도 있다지만, 이건 옷에 관한 얘기.

  구름을 만드는 학교에 다녔어요. 방과 후엔 경비 아저씨가 구름 밖으로 밀어냈어요. 여기서 놀면 안 되나요? 학교는 놀이터가 아니란다. 거미처럼 붙어만 있어도 안 되나요? 학교는 집이 아니란다. 엄마가 없는 건 마찬가진데 뭐가 달라요? 따뜻한 요람도 산뜻한 알람도 여긴 없잖니. 눈뜨고 서서 자는 아이도 있는데 뭐가 어때요? 길바닥에서 부패한 아이도 있다지만이건 구름에 관한 얘기.

  계단을 만드는 학교에 다녔어요. 단조로운 원단이 지루해서 노루발 밑에 알몸을 슬쩍 집어넣었어요. 나를 입양한 도시에선 별스런 일도 아닌데 상식도 없는 애라는 소문이 거리에 파다했어요. 근육 쓸 일도 기록 낼 일도 없는데 날마다 도핑 테스트를 했어요. 난간에서 점프턴을 하다 목이 잘린 아이도 있다지만, 이건 계단에 관한 얘기.

  거울을 만드는 학교에 다녔어요. 늙은 언니들이 졸업 작품을 내라고 닦달했어요. 이것도 작품이니. 쓸모가 있겠니. 즐거움은 주니. 졸업 따윈 어림없어. 들여다보렴, 투명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너의 진로를. 눈물은 안 났지만, 난 순진한 신입생처럼 호들갑스럽게 훌쩍거렸어요. 수업 시간엔 짝꿍과 장난치다 책상에 금을 그었어요. 매직으로 긋다가 나이프로 긁다가  도끼로 찍었어요. 쫓겨나 복도에서 벌을 서는 내게 첫 번째 선생님이 손 높이 들어! 팔을 툭 치고 지나갔어요. 두 번째 선생님도 같은 말을 하고는 팔을 툭 치고 지나갔어요. 세 번째 선생님도 흘러내리는 팔에 용기를 주었어요. 팔이 대나무처럼 자라는 동안 스쳐 가는 선생님들은 앵무새처럼 간지러울 뿐. 웃음은 안 났지만, 난 발랄한 신입생처럼 호들갑스럽게 깔깔거렸어요. 입가에서 웃음이 주스처럼 흘렀어요. 그러자 실밥이 터지는 것처럼 온몸이 가려워서 이리저리 팔다리를 비틀었어요. 고약한 아이구나. 표정이 안 떠올랐지만, 난 공손한 신입생처럼 호들갑스럽게 안면근육을 뒤틀었어요. 교무실에 불지른 아이도 있다지만, 웃다가 숨넘어간 아이도 있다지만, 이건 거울에 관한 얘기. 눈덩이처럼 불어난 당신에 관한 얘기. 눈 녹듯 사라진 당신에 관한 얘기.

 

* 영화 혹은 방송 프로그램 제목을 빌림

 

지하철 3호랜드

 

아기들의 뺨은 푸르고 윤이 납니다

턱에 엉킨 갈기를 만지작거리는 사내들의 눈빛이

어슬렁어슬렁

육아낭에 담겨져 아기들은 단내에 겨워 눈이 풀리고

입가로 새어나온 과즙을 닦아주며 엄마들은

짧은 앞발을 치켜들고 사방을 향해 눈을 부릅뜹니다

 

꽃다발을 뒤집어쓴 위풍당당 청년은 장식깃의 포

스가 독보적입니다

그가 한껏 펼치는 오색찬란한 깃털을 배경으로

모래먼지가 덕지덕지 낀 긴 속눈썹의 여자가 쭈그러

든 쌍봉을 추어올리며 기념 촬영 포즈를 연출합니다

무거운 배를 뒤뚱거리던 나비넥타이의 남자는

무늬만 날개인 지느러미를 치겨 들고 연신 땀을 닦

으며 흑백사진처럼 웃습니다

사막과 남극의 기후를 조율하지 못해 에어컨은 쿨

럭쿨럭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다

 

호객행위를 하는 인공조명은 순발력이 뛰어납니다

신비주의 야행성 시인들이 관람객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낮엔 적색광으로 잠을 깨웁니다

밤엔 잠들 수 있도록 대낮처럼 불야성을 꾸미거나

사료에 알코올을 섞습니다

 

늪에서 막 나온 남자가 요란하게 하품을 하며 잿빛

의족을 끌고 첩첩산중을 지나갑니다

새장에서 성대모사에 실패한 조그만 여자는 녹음

기가 달린

수레바퀴를 타고 립싱크를 하며 따라갑니다

홍해처럼 갈라지는 한강을 건너면 꿀이 흐르고

꼬리를 날리는 검은 줄무늬의 여학생들이 발굽들

의 수다를 피우며 뛰어다닙니다

 

하늘에는 비행접시가 둥둥 떠 관람 중입니다

오늘은 우아한 발톱들이 떠돌며 시체를 물어다 주

는 장면을 보기에 알맞은 날씨입니다

비행접시에서 광선이 쏟아져 죽은 사람을 직접 끌

어올리는 영화 같은 날도 더러 있습니다

유령을 다른 행성으로 입양해 가는 그들 역시 이곳

에서 입양된 자들입니다 뿌리를 찾아서 오는

우주 입양인들의 보법을 고려한 사파리 운행과 24

간 개방이 시급합니다

더 많은 우주학회와 통역협회들이 나서야 합니다

수십억 년째 닦고 있는 통행료엔 양탄자 같은 구름

이 깔려 있습니다만

 

폐장 시간입니다

사육사들이 토사물을 치우고 사람들을 울타리로 들여보냅니다

내일은 좀더 차별화된 테마파크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동선에 따른 설계가 요구됩니다

문이 닫힙니다

 

욕조의 시간/ 이민하

 

  멀리서 부케처럼 날아오는 빛을 향해 달렸다. 끝없는 지하계단이 함께 달렸다. 깨진 무릎의 피를 담아둔 화병들이 선반 위에서 차례로 고꾸라졌다. 나는 어둠의 턱시도에 튄 얼룩을 닦아주며 천천히 포복했다. 여긴 꿈속이구나. 촛불을 켜고 중얼거리는 당신이 땅을 텅텅 울리며 뒤돌아 섰다. 하얀 원피스의 들러리들을 앞세우고 나의 축가가 끝나기도 전에 식당으로 갔다. 서둘러 국수를 입에 문 하객들도 기념사진에 박히지 못했다. 서약(誓約) 또는 화약(火藥). 서로를 추월하지 않는 포만감과 허기의 양면테이프처럼 깔끔하게 봉해진 시간의 축의금. 촛불은 왜 켰니. (껐다 켰다, 언제든 유용한 내 몸의 스위치를 사람들은 왜 모조품으로 생각할까.)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았다. 시한폭탄을 장착한 박쥐들이 덕지덕지 벽에 붙어 있다. 빈틈이 사라지면 어둠은 폭발 할까. 박쥐 떼가 유영하는 공기의 물결을 가르며 동굴 속을 질주한다. 총부리를 겨누고 당신이 함께 질주한다. 너의 불결한 엽총이 짜릿한 건 죽음의 습관 때문이 아니야. 한 마리 짐승처럼 비명은 암흑 속에서 생포된다. (만유의 목소리가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는 건 제 목소리만이 자신을 찌를 수 있기 때문.) 수백 톤의 비명이 저녁 식탁에 오르고 반짝이는 공포의 비늘이 목구멍을 막을 것이다. 거리의 시정배처럼 계산을 하며 우리가 거래하는 것들. 부드러운 항문이 쏟는 비늘처럼 빠르게 동굴 속을 빠져 나왔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동굴을 벗어나자 라돈강에 이른다. 강의 님프들이여. 이제 어디로 가나이까. 시링크스야, 너는 무엇을 따라 여기까지 왔느냐. 낯선 목소리를 따라 왔나이다. 그건 네 목소리. 전생을 바꾸고 싶다면 강물에 몸을 던지거라. 길은 반복되고, 전생은 수정되지 않는다. 목소리만 수정될 뿐. 이명(耳鳴)에 갇혀 천 개의 음계를 잃었나이다. 구원하소서. 공중에 걸터앉자 발가락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이빨들을 흘리고 서서 갈대 같은 뼈대를 한 움큼씩 꺾이지만 네가 만든 피리 속에 살지 않는다. (당신의 손에 잡히기에는 나의 속도는 형태를 초과한다.) 바람의 칼날이 내 입술을 깎았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여덟 시간의 들숨과 열여섯 시간의 날숨. 밤과 낮의 매듭은 끊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불현듯 갓난아기의 울음이 떨어져 내렸다. 외벽을 타고 후드득 피부로 스몄다. 나는 창문을 열고 꿈의 애드리브처럼 시선을 휘둘렀다. 검게 닫힌 아래층의 창들은 벽과 구분되지 않았다. 창턱을 지우는 장맛비가 내 방에 흘러 들었다. 얼마나 많은 비가 차 올랐는지 나는 욕조처럼 방 안에 잠겼다. 발목이 잠기고 허벅지가 잠기고 갈비뼈가 잠기고 머리털 빠진 정수리가 수면을 들락거렸다. 열 달 동안의 들숨과 백 년의 날숨. (이브에게 배꼽이 없었다면, 물에서 진화한 나의 태생은 어떻게 설명할까.) 낡은 욕조에 잠겨 퇴화한 탯줄을 만지작거린다. 가위를 움켜쥔 물살이 배꼽에서 싹둑싹둑 요동쳤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

  한 무리의 짐승이 우르르 복도를 지나간다. 벽은 균열을 온몸으로 막으며 비켜앉고  물 위에 뜬 두 눈의 나부낌. 빛바랜 선반이 살짝 흔들린다물뱀의 혀처럼 손가락들이 날름거린다. 비늘을 반짝이는 몇 마리의 빛선반 위에는 화병화병 속에서 뼈대 몇 줄기 솟구치고  뼈끝마다 붉은 심장이 핀다다음은 드라이플라워의 시간. 길고 긴 날숨에 말라 가는 눅눅한 창틀에는 거꾸로 매달린 중천의 드라이플라워

 

 

원근법-우물    /이민하

 

나는 그대의 입술에 대고 말을 건다. 내 배꼽까지 샅샅이 만지던 입술, 동그란 배꼽에서 문드러지는 자둣빛 그대의 혀, 아가미 너덜대는 축축한 라디오.

 

주파수를 잃은 칠월의 계단은 겨드랑이마다 반짝이는 피어싱을 하고 지하에서 바다까지 달렸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계단을 몸 속에 접어 넣으면 숨을 고르고 있다. 서걱거리는 모래살점들을 풀어 말리는 해변.

 

그대의 입술에는 그대가 아직 못 만진 내가 있다. 내가 아직 못 만난 내가 있다. 나는 그것의 행방이 궁금하여 떠나지 못한 내 마을의 이방인, 숲과 언덕이 내 몸을 꾹꾹 누르며 다 지날 때까지 똬리를 틀고 천식을 앓는 뱀.

 

혀에서 갈라진 꽃잎들이 우주를 항해한다. 정교한 살의와 달콤한 죄책감으로 침몰할 때까지.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온 집단폐사한 피라미떼 가득 안고

 

기쁜 나머지 나는 튼살을 기워 두레박 짠다. 불어터지는 자둣빛 나의 혀. 언니들이 도망간 축축한 인형가게. 나는 바람에 대고 말을 건다. 가만가만 비켜설 뿐인 공터의 탄력.

 

불타는 모래 위를 뛰어다니는

검은 발바닥의 오후.

 

안락의자            /이민하

 

노파는 실타래를 내려놓고 벽을 둘러본다. 행군하는 시계들의 군화 소리가 눈앞에 다가온다. 창가에 포복해 있던 검은 손들이 일제히 투항했다. 노파는 안경을 벗으며 안락의자에서 일어난다. 모자를 풀어 새로 짠 목도리를 깁스처럼 감는다. 진열장 위에서 장난을 치는 고양이에게 손짓을 한다. 노파는 고양이가 물고 있던 시계를 받아 손목에 찬다. 고장난 거라며 아침 일찍 시계를 교환해 간 미용실 여자의 체온이 손목에 달라붙는다. 손목에 멈춰 있는 시간 속을 벽시계들의 행렬이 막 통과하고 있었다. 노파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유리만 손잡이를 돌리다가 기어올랐다. 뭉게뭉게 엉킨 구름의 잎맥들을 더듬는 새들의 뭉툭한 부리. 문 너머의 세상은 끝이 없을 것처럼 고요하다. 노파가 손잡이를 마저 돌리자 물수제비 뜨는 돌멩이처럼 튀어오른 새들이 노파를 끌고 유리문을 빠져나온다. 재빨리 뛰쳐나오는 고양이가 노파의 그림자를 물어다 준다. 골목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이리저리 부딪쳤다. 봉제선이 튿어진 목들이 음식물쓰레기 봉투처럼 역한 냄새를 쏟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로등이 어둠을 벗기고 불심검문했다. 노파는 주머니에서 문드러진 형체도 없는 얼굴을 내밀었다. 집에 당도하자 담을 넘은 고양이가 문을 열고 있었다. 노파는 고양이가 물고 있던 열쇠를 받아 서랍에 넣는다. 목도리 속에 실타래처럼 둘둘 말린 몸에서 손목시계를 끌러 팔걸이에 떨구며 안락의자에 앉았다. 선반 위의 고장난 시계들이 왁자지껄 노파를 에워쌌다. 금세 잠이 든 노파를 펼쳐놓고 사슬뜨기가 좋을까 고무뜨기가 좋을까 수군거렸다. 노파의 윤곽이 합의되자 고양이는 재빨리 노파의 손을 흔들었고 털실이 풀려나간 텅 빈 배꼽은 앙상한 새들을 끝까지 삼켰다

 

책 속에 낀 노란 버스의 그림   /이민하

 

파란 근육이 뜯겨진 하늘. 삐걱삐걱 관절을 꺾던

별들은 검게 삭아 앙상한 새들을 떨어냈다. 후두둑!

나는 우산처럼 책을 펴고

책 속에 들어간다.

남겨진 가스불 위엔 압력밥솥 가득 유정란 속에서 부화하는 잡담들.

 

책 속의 몸을 뒤지며 나는 자막의 순서를 배열하고

추락 직전의 괴력으로 유리창에 매달린 새들은 거리의 순서를 배열한다.

부푸는 초점과 엉겨붙은 부리들

사이에서 탱탱한 봉제선처럼 뜯어지는 창문들.

 

깃털들의 밀물에 결박되는 시간의 자막.

수천 개의 탈주로를 밴 만삭의 타이어가 하혈을 하네.

바퀴를 쪼며 태동에 귀기울이는 새들아. 바닥을 구르게 하는 건

흉곽을 물어뜯는 천둥 같은 목젖이 아니다.

 

온몸의 초목을 종이날로 대패질하는

행간 속에서 떨어져나간 근육을 조립하고 있어요.

무수히 창을 뚫어놓고 여름내 시동을 건

나는 강 건너로 실어 나를 그대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책을 펼치면 노란 버스는 웅크린다.

책을 덮으면 노란 버스는 달아난다.

 

불 위에 두고 온 아기들은 먼지처럼 익어 거리에 내다팔렸다.

 

 샤이니하우스 /이민하

 

심야의 소음을 항의하며 입주자들이 불면을 호소했지만

불레로를 멈추고 물의 장난으로

906 DJ 라벨 씨의 선곡이 바뀐 오후 무렵

굳이 방음벽은 필요없다며 침대로 돌아간 그들의 입담으로

철거 위기를 넘긴 집들은 오수에 잠겼지.

 

이삿짐을 아직 들이지 않은 사색가여, 그대는 황금분할을 연구하느라

거리에서 백야를 견디고 있구나. 거리가 짓무르도록

은행나무 가로수가 고름을 터뜨리는 동안

무수한 선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피치카토는 기록되지 않는다.

 

수도꼭지에서 핏물이 새는 809호의 습관은 여전해도

거미줄치는 얼룩보다 더 빨리 페인트 가게들은 자란다.

일요일마다 옥상에서 침대를 볕에 말리는

404호에게는 미안하지만 관리실 모니터에는 초경의 흔적도 남아 있지.

내가 가진 천 개의 비상키는 인테리어 잡지에 베스트하우스로 꼽힌

이 건물의 외관보다 마음에 들어.

해가 지면 층층이 저벅거리는 소리. 현관에 비치된 철쇄 달린 발자국을 끌며 귀가한

사람들은 단단하고 윤이 나는 상아를 끌러 벽에 건다.

나는 벽들을 순찰하며 보송보송한 악기를 발굴하고

그들은 유골을 화병에 꽂아 두고

사진들 속에 살을 분배하고 누워 어둠처럼 태워진다.

 

하얗게 달려오는 앰뷸런스는 아침마다 눈을 찢지만

만월처럼 부풀어 몸을 날린 여자들은 폭신한 정원수 위에서 전생을 빠져나오지.

그 후 뒷산 약수터에 시신을 남긴 602호는 약수통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사라졌지만 그래서 수년간 그 방은 비워 두었지만

망자의 냄새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 원한다면

당신에게 그 방을 줄 수 있어. 수평으로 흐르는 흰눈의 물결이 압권인

커다란 붙박이 통유리창이 아름다운 방이야.

 

하지만 알아두길 바래.

깨어진 창문을 달빛으로 용접하는 죽음의 복화술.

지축을 흔드는 바람의 지휘봉은 경멸이 아니라 반전일 뿐. 아래위로 종횡무진 펼쳐지는

끝없는 시간의 아르페지오!

엉겼다 흩어졌다 물의 장난처러 증발하면서 출토되는 천 개의 방.

 

배고픈데 우리 점심이나 먹고

어제 작동이 멈춘 301호 벽시계나 함께 고르러 갈래?

 

내면연기  /이민하

 

그렇게 우물거리지만 말고 이리 와 무릎에 앉아보렴.

대화 말고 휴식이 필요한 일요일.

오늘은 말을 배우지 않아도 돼. 맘껏 멍멍거리렴.

아저씨는 길게 누워 배터리처럼 소파에 꽂혀 있네.

 

 

이웃집 니키는 오늘도 야근을 하네.

그녀는 너무 성숙해서 소리를 지르지 않네.

옆집 남자에게 넘겨준 건 변덕스런 체온이 아니라 매뉴얼.

생명이 없다고 해서 진짜가 아닌 것은 아니야.

 

영화에선 배우들 대신 피 흘리지만

대사가 필요 없다면 그들과 구분되지 않는 우리의 피.

관객은 모르지, 우리가 웃지 않는 건

당신들과 닮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야.

말이 없는 인형이지만 시나리오는 있네.

 

그들과 우리, 우리와 관객, 관객과 그들 사이 아무도 대본을 바꾸거나

엔지를 내지 않네.

트랙을 달리는 아이들처럼 시간의 바통을 꼭 쥐고

누군가를 향하여

 

그들은 눈물연기의 베테랑.

우리는 신체 변형의 달인. 극의 효과를 위해

특수분장을 하고 색과 화면을 연구하지.

관객의 배역은 배우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입 다물기.

 

아무도 서로의 연기를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게 지루할 뿐이야

 

풀밭의 율법 이민하

 

  바람의 목소리로 속삭여줄게

  사라짐과 일요일에 대하여

  풀 뜯는 소리와

  풀 밟는 소리

  저 푸른 초원 위에

 

  늑대들이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서

  주섬주섬 양들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

 

  목자(牧者)께서 가라사대

  그대로 멈추라

  양떼 사이에 잔뜩 천사채처럼 깔아놓은 기절염소들

  목장의 오후

 

  늑대들이 엉금엉금 천년을 기어다니며

  풀썩풀썩 고꾸라지는 기절염소들의 나무다리를 주워 막대사탕처럼 입에 물 때

 

  장바구니에서 뛰쳐나온 양들은 구름처럼 흩어져

  목장의 평화

 

  갓 태어난 목동들은 석양이 뚝뚝 떨어지는 요람에 누워

  늑대다 늑대가 온다

  까르르까르르 옹알이를 시작하고

 

  뻗정다리로 휘청휘청 어둠의 끝까지 달려도

  검게 깔린 늑대밭과 귓가의 지뢰들

  그대로 멈추라

  몸뚱이에 입력된 목소리는 누구 꺼니

  아빠 꺼니 엄마 꺼니

  맨발의 늑대들과 양치기 소년

  너는 누구니

 

  늑대들이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방연속무늬 유리풀밭

 

  멋진 역사야 신기하게 맛있게

  무릎이 녹아 거울 속으로

  나는 자꾸 사라져

 

오지 탐험―蜜林속으로  -이민하 (월간 현대시/2000 6월 당선작: 등단작품)

 

 

썩은 나무 속 손으로 파헤쳐 꿀 같은 애벌레를 꺼내요

 

끔찍했던 기억들, 싱싱하게 통통하게 살아 있는 단백질로 보일 때까지

고놈 참 맛있겠다 까칠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초롱초롱 빛내는 눈만 큰 아이처럼 군침을 흘려 봐요

 

품 안에서 어리광부리던 예닐곱 살 어린 풀들

혼자 숲속에서 사흘을 살아 돌아오면 완전한 성인이 되는

 

맨발로 자라는 열매들

살균처리하지 않은 기억이 왜 우리에겐 없나요

 

나뭇가지 척척 늘어진 아마존 밀림처럼

봉긋 내밀었던 가슴을 축 늘어뜨리며 묶었던 심장을 끌러 봐요

 

, 이제 월계관을 써 봐요

참 잘했어요

 

*蜜林 : 의도적 표기임

 

데칼코마니-관계에 대한 고집/ 이민하

 

  물이 뛰쳐나와 꽃병을 엎지른다

  여자 몸을 뛰쳐나온 아이가 물방울 눈을 뜨고 두근거린다

  아이가 기르던 프리지아 한 마리가 바닥에서 꿈틀,

  여자를 두른 앞치마가 싱크대에서 달려와 바닥을 훔친다

  오후를 잘게 다지는 도마 위 칼질 소리

  텔레비전 채널이 아이의 손가락을 돌리고

  아이가 은하철도를 타고 티비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브라운관에 머리가 낀 아이를 끌어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장가를 부른다

 

  아이는 쿠션처럼 쌕쌕거리며 잠이 든다

  여자는 눈이 내리는 마을로 가는 책 속의 마차를 탄다

  책 속에서 담배를 태우러 보라색 입술만 나온다

  가끔은 담배가 입술을 태우고 책이 담배를 문다

  글자들이 연기를 뿜고 연기가 가구들을 태워 버리고

  탄내 가득한 천장에서 밀랍 같은 숯덩이가 뚝뚝 떨어진다

  맞닿아 있던 여자와 아이의 피부가 까맣게 들러붙는다

  수십만 킬로를 날아온 흰쥐들이 숯무덤을 파헤치자

  아이의 무릎 위에 여자가 잠들어 있다

  흐물거리던 살 껍데기가 옷걸이에 걸려있다

 

 혈류血流/ 이민하

 

  벌거벗은 아기가 말을 탄다

               나는 멀미를 한다

 

  벌거벗은 소녀와 소녀가 마주 보고 말을 탄다

               나는 멀미를 한다

 

  벌거벗은 처녀들이 둥글 게 말을 탄다

               나는 멀미를 한다

 

  벌거벗은 엄마들이 물독을 내려놓고 말을 탄다

               나는 멀미를 한다

 

  물독에서 넘친 수천 방울의 태아들이 말을 탄다

               천지사방 터지던 혈관들이 바다처럼 젖어

나는 멀미를 뚝 맘춘다

 

  무한대로 질주하던 말들이 멈추자

맨몸에서 꿈틀,

               벌거벗은 여자들이 멀미를 한다

 

나룻배를 샀어요 / 이 민 하

 

나룻배를 한 척 샀어요

강을 건너는 일보다

굽이를 따라 흐르는 일이 많았어요

 

내가 자라면서 나룻배는 구두가 되었어요

나는 구름까지 닿았어요

 

굽이굽이 산천초목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구두가 망가지면 잠시 뭍에 올라

허리를 굽혀 손질했어요

 

주머니가 무거워지면서

물결이 하나 둘 구두 속에 잠겼어요

챙이 넓은 모자가 물 속에 잠기기 시작했어요

 

물결을 모아 그 속에서

안경점을 차렸어요 꽃가게도 열었어요

뭍으로 연결되는 계단도 만들었어요

 

계단을 오르내려도 발자국은 남지 않았어요

어쩌다 찾아오는 빗물도 발톱이 없었어요

 

우체국이 없는 이곳을 사람들은 찾지 않았지만

눈이 어두운 박쥐들이 수시로 다녀갔어요

 

가끔은 뭍에서 보낸 고지서가 배달됐어요

맨홀 뚜껑처럼 끄응끙 봉투를 뜯으면

마르지 않는 시간의 폐수가 까르르 쏟아졌어요

 

나는 나룻배 대신 내 몸을 조금씩 지불했어요

내 몸은 점점 가벼워져

소문이 되었다가 전설이 되었어요

 

둥근 달이 물의 살갗을 물어뜯는 밤이면

나룻배를 샀어요

내 몸을 조금씩 지불했어요

 

몽유 이민하

 

몸을 팔아 하얀 꽃바구니를 샀네 골목 어귀 눈에 띄는 담벼락에서 검은 장미를 한 웅큼 꺾었네 꺾인 장미는 웃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 담벼락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끄적이고 걸음을 재촉했네 검은 장미는 하얗게 변해 갔네 나는 꽃바구니를 검은색으로 칠했네 바구니에 꽂자 장미는 깃털을 흩날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네 상심한 나는 꽃바구니에 신발을 담았네 담배도 담았네 뚱뚱한 당신은 담기가 힘들었네 팔과 머리칼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네 당신을 다시 꺼내 운동을 시켰네 심부름도 시켰네 검은 장미가 피었는지 골목 어귀에 가 보라고 했네 천 일이 지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네 골목 어귀에 다시 갔을 때 나는 검은 담벼락에 눈이 부셨네 담벼락을 휘감은 당신의 몸에서 검은 꽃잎이 아직 자라나는 중이었네 하얀 장미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고 있었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팔아 몸을 샀네 당신의 팔과 다리를 꺾어 내 몸에 꽂았네 빈 꽃바구니를 들고 허둥대던 장미가 내 몸에서 당신을 꺾었네 나는 피를 흘렸네

 

이야기 이민하

 

천 년의 하늘을 떠받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촘촘한 가지 사이로 노란 버스가 걸려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물로 짜여진 길 위로 노란 버스가 내려왔는데, 부리가 푸른 새가 핸들을 돌리고 있었는데, 버스는 불룩해진 배를 끌고 엉긍엉금 허공을 건넜는데,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목이 긴 여자를 접어 트렁크에 넣고 의자에 천천히 몸을 풀었는데, 새의 날개에 그려진 노선표를 들여다 보았는데, 개구리 알 같은 눈알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잠깐씩 문은 열렸고 사람들이 올라타 트렁크를 하나씩 안겨 주었는데, 그때마다 창 밖으로 너무 멀리 고개를 내민 가장 긴 목을 꺾어 트렁크에 넣었는데, 은행나무 가지마다 목을 매단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웃고 있었는데, 장난감 가게들은 귀를 막고 있었는데, 부리가 푸른 새는 핸들을 놓지 않았는데, 나는 차창으로 트렁크를 하나씩 내던지며 내릴 곳을 찾는 데 십 년을 써 버렸는데, 길을 얽은 무수한 그물코는 올이 풀려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노란 버스는 색도 바래지 않았는데, 이야기는 끝도 없는데.

 

흔적 없는 흔적이민하

 

안개의 거리 끄트머리에 모퉁이가 있네

옆구리에 빵냄새를 들이대고 붉은 피톨을 터는 빵가게가 있네

맛보지 못한 무수한 빵의 종류와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티브이가 있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이 있네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이 있네

천천히 유리창을 닦다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이 있네

안개에 절인 여자들을 곱게 갈아 반죽을 빚는 주방이 있네

문드러진 음부까지 바삭하게 굽는 토스터가 있네

비닐 포장된 여자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어디론가 발송하는 하루가 있네

오토바이가 첨벙거리며 횡단하는

샛노란 고름투성이의 저수지가 있네

울렁거리는 새벽비에 나뭇잎들을 토해내는 가로수가 있네

유리창에 튄 녹색 토사물을 씻어내는

오늘 처음 배달된 여자가 있네

여자가 엎드려 닦는 바닥에

기억 속으로 전송된 여자의 남겨진 핏자국이 있네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창밖의 여자가 있네

그녀들을 이야기하는 시 쓰는 여자와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시 읽는 여자가 있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길모퉁이가 있네

손을 대면 사라지는 한 칸의 유리가 있네

 

哀人 -이민하

 

그는 나를 애인이라 불러요 거미줄 쳐진 내 몸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그를 거미라 불러요 아흔 개의 다리로 옭아매는 그를 무심하게 키워요 그는 나를 불구라고 불러요 팔레트에 물감만 뒤섞는 손을 망치로 탁탁 두들겨 화병 속에 꽂아 두어요 나는 그를 마부라고 불러요 그의 허리를 감고 창가로 달리면 그는 시커먼 망토로 창문을 불길러 버려요 그는 나를 피아노라 불러요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 이어지고 끊어지는 나의 숨결을 아주 좋아해요 새파랗게 비가 오는 날엔 그와 나의 몸에서 우수수 피아노 건반들이 떨어져 내려요

 

그는 나를  ?라 불러요 나는 그를 ?라 불러요 내몸에서 반음들을 빼먹으며 그는 나를 사랑해라 불러요 나는 그를 몰라라 불러요 그는 나를 영원히라 불러요 나는 그를 못살아라 불러요 그는 나를  ?  불러요 나는 그를  ?  불러요 그는 나를 영안실의 국화라 불러요 나는 그를 쿠쿠라 불러요 그는 나를 안녕이라 불러요 나는 그를 그래라 불러요 그는 나를  ?라 불러요 나는 그를 ?라 불러요 그는 나를 부르기 위해 종일 좇아다녀요 나는 그를 버리기 위해 종일 좇아다녀요 서로의 앞모습은 볼 수 없어요

 

시의 난해함에 대한 변론
이민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1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시를 읽을 때면 내가 읽고 있는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말하자면 시의 내용이 무엇일까에 초점을 맞춘다. 이민하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보자.


편지를 읽기 위해 우린 문맹퇴치학교에 모이지만
말의 시취가 새지 않도록
이빨을 재갈처럼 물고 있습니다.
「합창단」 부분


가장 먼저 나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시취,’ 즉 시체 냄새라는 말이다. 시체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그 말은 죽은 말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말의 시취라는 말에서 시인은 말도 죽은 말이 있고, 살아 있는 말이 있다고 여기는가 보다고 생각을 한다(말과 말이 마구 뒤섞이니 좀 혼란스럽다. 여기서의 말은 뛰어다니는 동물이 아니라 우리들이 입으로 떠들고 외치는 바로 그 말이다). 물론 아직 시인이 생각하는 죽은 말이 무엇인지, 또 살아있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 시에선 짐작하기 어렵다. 시인은 우리가 말을 하면 그 죽은 말의 시체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 시체 냄새가 나니 말을 하기가 싫다. 그래서 시인은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이빨을 재갈처럼 물고 있다는 말은 내게 있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제 이를 정리하면 그것이 바로 시인이 이 구절을 통하여 내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된다. 즉 시인은 우리들이 학교에서 문자를 깨우치면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러면 편지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지만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말은 죽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그 죽은 말에서 풍기는 시체 냄새가 싫어서 학교 다닐 때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시의 한 구절은 이렇게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이민하의 시가 모두 이런 식으로 풀려나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희망과 달리 그의 시는 부분부분은 어느 정도 읽히지만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해독이 되질 않는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버스를 탔지요 밤이었지요 껍데기 까칠한 창문에 어둠의 노른자가 달라붙었지요 뭉글뭉글 손끝으로 핥아졌지요 달의 솜털이 샛노랗게 몸에 돋았지요 막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나는 어지러웠지요...
「유년의 전설」 부분


밤에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의창문에 어둠의 노른자가 달라붙어 있었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무리 없이 시를 읽어나갈 수 있다. 물론 조금 이상한 부분은 있다. 버스의 창문이라면 유리문일텐데 시인은 그 매끄러운 질감의 유리창을 가리켜 껍데기가까칠한창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시인이 버스에 오를 때 버스를 마치 병아리를 그 속에 품은 알 같다고 생각한 것이라 여겼다. 시인이 펼친 그 상상의 질감은 대단히 강력하여 달걀 껍데기의 까칠한 질감이 유리창의 매끄러운 질감을 덮어버리기에 이른다. 나는어둠의 노른자는 진한 어둠으로 환치하여 이해를 했다. 아마도 버스 안의 불을 껐나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어둠의 노른자가뭉글뭉글 손끝으로 핥아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 노른자의 질감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둠의 질감이 아니라 실제 달걀 노른자의 질감이다. 지금까지 내가 타고온 흐름으로는 쉽게 그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결국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시인과 함께 다시 버스에 올라본다. 이번에도 물론 밤버스이다. 밤버스이니 바깥이 어둡다. 나는 이번에는 시인이 버스가 아니라 세상이 어두워지면 그 어두워진 세상 전체를 달걀처럼 느꼈나보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둠의 노른자를 차창에 비친 달로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시인의 눈에 달은 어둠의 노른자이다. 이렇게 타고 나가면뭉글뭉글 손끝에 묻어나는 노른자의 질감까지 무리없이 흐름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까지이다. 나는 또 길을 잃고 만다.
소문대로 이민하의 시는 난해하다. 잘 읽히질 않는다. 물론 쉽게 읽혀야 한다는 것이 시가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덕목일 수는 없다. 너무 쉬우면 공부에 대한 자극이 되질 않고, 너무 어려우면 절망을 안겨주는 시험 문제의 난이도처럼, 시의 난해성은 어느 한쪽으로 그 좋고 나쁨을 쉽게 결론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민하의 시는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시를 읽어가는 내내 나는 끊임없이 해독되지 않는 문구들 앞에서 당혹감에 내몰리곤 했다. 시인은 그렇듯 당혹감에 휩쌓여 있는 내게 놀리듯 한마디 한다.


...(
전략)호기심 많은 당신은 풍문을 타고 여기 왔겠지만 당혹감을 트집으로 바꿀 순 없지요(후략)...
「문제작」 부분


그는 내가 당혹감을 무기 삼아 그의 시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미리 입을 막아버린다. 다시 그의 시를 찬찬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2
나는 일단 그 난해함이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이민하의 시 속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시를 살피면서 나는 놀랍게도 그의 시속에서 시인이 시인과 우리의 관계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신은 文을 제작하는 사람.
나는 門을 제작하는 사람.
「문제작」 부분


시인은 글은 우리 몫으로 해놓고, 대신 그 글이 이룩한 성채 속으로 들어갈 통로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으로 해놓고 있다. 나의 상식에 의하면 시인과 우리의 관계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시인은 문자로 시의 성채를 이룩하고, 우리는 소통로로서의 문을 찾아내 그 성채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기억을 들추어 보면 이민하는 그의 첫 시집 『환상수족』에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때 그는 시집의 첫머리에 열리는 문이란 이름을 붙여 문을 열어놓고 사람들을 맞으면서 그 문에文에 기대지 마시오라는 주의 사항을 붙여놓았었다. 문자로 된 시를 읽어야 하는데 그는 문자에 기대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만 문()에 기댄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번에는 아예 그 문자를 시집을 읽는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소통로로서의 문()만을 자기 몫으로 삼았다.
문자는 이중의 속성을 갖고 있다. 문자, 또는 확대하여 언어는 세상으로 가는 소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즉 언어는 열리면서 동시에 닫힌다. 가령구름표범이란 말은구름표범나비를 구름과 표범이란 말로 열어주지만 동시에 그 나비의 세상을 구름과 표범 속에 가두어 버린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제한과 규제는 그 언어가 일상 언어일 때는 더더욱 심해진다. 그렇지만 그 규제가 심할수록 우리는 언어가 지칭하는 것을 더욱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 규제가 느슨하면 우리는 언어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이것을 지칭하는 것도 같고, 저것을 지칭하는 것도 같으며, 심할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 조차 짐작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마도 그 규제가 가장 완고한 공간을 꼽는다면 국어사전이 되겠지만 우리는 사전을 펼치고 그 뜻에 따라 소통을 하진 않는다. 그 규제는 일상 생활 속에서마저도 이완되어 있으며, 인터넷 세상에선 더더욱 이완의 폭이 크다. 그리고 시에 이르면 그 규제는 더욱 더 큰 폭으로 느슨해지고 만다. 시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시 덕분에 우리는 국어사전 속에 갇히지 않고 그 틀을 탈출할 수 있으며, 또 일상 언어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그 틀을 탈출할 수 있다.
이민하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언어가 갖고 있는 그 닫혀있는 속성에 대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구름표범나비를개미라 부르기도 하고, 제비라 부르기도 하면서 한 나비의 세상이 구름과 표범이란 언어 속에 갇힌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심지어 그렇게 개미나 제비라고 불러도 그것 또한 또 하나의 규제가 되고 만다. 시인은 그 규제를 구름표범나비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구름표범나비에 지워질 수 없는 문신을 새기는 행위로 본다.


바늘이 되어 나의 이름에 꾹꾹 文身을 하는
너를 자꾸 통과하여 門身이 되는
나는 죽어서도 구름표범나비
표본실에 묻혀 사각사각 날개를 펴고 접으며
찍을 테면 찍어봐! 포즈를 바꾸며
「구름표범나비」 부분


사실 시는 일상 언어가 가진 그 규제의 테두리를 넘어 또다른 세상을 열곤 한다. 그러나 이민하에게 있어선 그렇게 또다른 세상을 여는 시마저도 언어가 갖는 그 규제의 속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구름표범나비는 죽어서도 열려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언어는 표현되는 순간 그 언어의 영역 안으로 나비를 닫아버리려 든다. 그는 그 규제를 지워질 수 없는 문신을 몸에 새기는 행위로 본다. 그것은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면 쓰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름표범나비를 말하는 시의 말미에서 시인은 결국 나비를 표현의 대상, 즉 문()의 대상이 아니라 들고나는 통로, 즉 문()의 대상으로 바꾸어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그냥 지켜보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적 대상과 시인과의 관계를 시인과 우리의 관계로 옮겨오면 읽는 행위 또한 시인의 쓰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열면서 동시에 닫히는 행위이다. 읽으면서 해석된 내용으로 시의 세상을 규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민하가 문()의 몫을 쓰는 자에서 읽는 자나 보는 자에게 넘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쓰는 자가 시를 써서 세상에 내놓는 순간, 이제는 그것이 문()이 되고, 그것을 읽는 우리의 행위는 해석된 내용으로 그 세계를 규제하는 행위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민하에서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그와 반대로 무엇인가를 지우는 일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자라면서 일정한 상징 체계 속으로 내몰린다. 그 상징 체계 속에서사과는 백설공주를 떠올리게 하면서달콤한 키스를 부르는/독이 든 사과와 이어진다. 사과의 상징적 의미는 그런 식으로 닫히곤 한다. 이민하는 그런 체계의 세계를 항상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해피엔드로 끝을 맺는 세계로 보며, 그런 세계는 닫힌 세계이다. 시인은 그 세계를 지우고 싶어한다. 그리하여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워가는 해피엔드”(「해피엔드」)의 세상을 새롭게 구축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기존의 상징 체계를 지워버리면 사실 시의 문은 더 넓게 열린다. 그러나 시의 문이 더 넓게 열리면 열릴수록 시는 더욱 읽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좁은 문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그때 방법은 단 하나이다. 시인이 시적 대상을 문으로 삼아, 그 대상의 속을 드나 들었듯이 우리들도 시를 문으로 삼아 그 속으로 몸을 들이밀어야 한다. 그건 마치 시인이 시적 대상에 대한 표현은 시도해 보았듯이 시에 대한 해석은 시도해보더라도 그것으로 시를 규제하려 들지 말고 시인이 시적 대상을 눈앞에 두고 가졌던 고민을 우리들도 그대로 수용하여 시를 문()으로 삼아 자꾸 그의 시를 통과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민하가 가진 그 열린 세상의 언어를 한번도 가진 적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의 시는 난해하고 어렵다. 그러나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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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쓰는 행위가 닫는 행위일 수는 없다. 좋은 시들이 기존의 닫힌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많은 경험들에 의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하가 쓰는 행위나 읽는 행위가 모두 세계를 닫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러한 닫힌 방식으로 시를 쓰거나 읽게 되면 시가 펼칠 스펙트럼의 폭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즉 그런 태도 아래서는 시의 스펙트럼이 좁아질 수 있다. 읽는 행위 또한 시의 세계를 닫는 행위라기보다는 시의 세계를 여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하가 읽는 행위가 세계를 닫아걸고 있다는 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 읽는 행위가 종종 읽을 대상마저 규제하려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문을 열어보려 하지 않고 손잡이가 달린 편리한 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얘기이다. 말하자면 한번 읽어보면 알 수 있게 좀 쉽게 쓰면 안되냐는 불만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그런 요구에 대해 이민하는 이렇게 말한다.


고집쟁이 당신. 옆동네에 편리한 손잡이만 만드는 제작공이 있지요.
「문제작」 부분


말을 풀면 쉽게 읽히는 그런 시들도 많으니 그런 시를 원한다면 그런 시들을 읽어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된다. 그의 말대로 이민하의 시는 이민하의 시로 읽어야 한다. 아니 이민하의 시 세계는 그가 내놓은 문으로 들락거려야 한다. 이민하의 시들을 읽는 것은, 아니 그가 내놓은 문으로 들락거리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관계의 고집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로 엮어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한 몇 편의 시와 실연의 상처를 달래는 데 그만인 「개랑 프라이」절반은 개에게 던져주며 먹는 계란 프라이이다를 비롯하여 몇 편 혹은 단 한 편의 시가 일정한 이야기의 흐름이나 단편적인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흐름으로 시집을 말하는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읽어낸 해석은 내 몫으로만 남겼다. 내가 들락거린 그 문에서 보았던 풍경은 따로 말할 기회가 생기면 아마도 그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지금은 그의 시에 문신을 새기기 보다 그의 시를 문()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그의 시집이 지금 문을 연채 내 앞에 있다. 종종 들락거릴 생각이다.

 

이민하 시인의 "환상수족"

1. 이민하 시의 전제적인 특징

 

언어의 신뢰성(주술성) 파괴, 상실

후기 산업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복제, 대량생산이다. - 문명의 논리, 복제의 논리

이민하의 환상수족은 처음과 끝이 없는 무한이 반복되는 순환적인 세계, 사방 연속 형태의 시이다. - 순환적 구조(처음과 끝이 반복)

탈 중심적 세계관 - 인간의 고정적 중심의 세계관이 아닌 주체에 중심을 두지 않음.

 

2. 사방연속물결무늬(60)

 

제단 위에서 내려온 여자가 유리구두를 벗고

바다 끝으로 달려간다. 바람을 찢고

되돌아오는 발굽 소리, 축제는

자정에 시작한다.

이빨이 자라는 손가락 위에 노란 장갑을 씌우고

노란 리본으로 얼크러진 갈기를 동여매던 여자는

바다 끝으로 달려간다. 바다 끝에는

동그란 창이 세 개 나있다. 여자는

집시들의 공장에서 사온 기타줄로 배를 가르던 청어를 끌고

바다 끝으로 달려간다. 달려가

첫 번째 창을 오른쪽 눈에다 끼운다.

남자를 꽂은 틈새에서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뻗쳐오를 때도 여자는

바다 끝으로 달려간다. 달려가

두 번째 창을 왼쪽 눈에다 끼운다.

여자는 손가락을 뾰족하게 깎아 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계절은 바뀌지 않는다.

다섯 달 동안 날이 가물어도 안개조차 스미지 않는다.

한낮의 늪지와 밤의 불기둥을 지나 여자는

바다 끝으로 자꾸 달려간다.

세 번째 창은 유일하게 하늘을 향해 있다.

여자는 또 그림 한 장을 세 번째 창 너머로 던진다.

석양처럼 소각되는 물의 정거장.

그림을 빠져 나온 물이 쏟아져 내린다.

주룩주룩 풍경을 지우며 화살을 박는 빗줄기.

온몸을 뒤집는 바다.

여자는 청어와 남자는 무화과나무를 싣고 수평선을 끌고서

또 다른 오늘로 넘어간다.

축제는 시작되지 않는다. 끝나지도 않는다.

자정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첫 번째 창을 오른쪽 눈에다 끼운다는 것은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수평적 저차원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반면, 세 번째는 수직적으로 총체적 회복의 창을 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축제는 시작되지 않는다 / 끝나지도 않는다

- 처음도 끝도 없는 반복적이고 파편적인 단상을 의미한다.

- 축제가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기 때문에 사방연속적이고 어는 곳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세계를 의미 하는 것이다.

 

3. 세상에서 하나뿐인 수리공 K의 죽음(36)

-8요일,

 

태초에 삼라만상이 있기 전 지중해만한 작업실을 가진 난쟁이 K가 있었습니다

 

1요일에 K는 산책을 나갔습니다

대지를 둘러보고 바람의 세기를 측정했습니다 46억 년 전의 일입니다

(황금색 태양의 기록과 달리 그의 후계자인 시인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쯤 후로 추정되기도 함)

 

2요일에 K는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도면 위로 구르는 순간 그의 눈알은 부화하였고

그의 식탁은 야위어 갔지만 달빛 넝쿨로 출렁거렸습니다

 

3요일에 K는 거대한 손수레을 만들었습니다

천천히 도면의 배를 가르고

산과 바다를 꺼내고 바퀴 달린 책을 꺼내고 화살과 모자를 꺼내고 거울을 꺼냈습니다

수백 종류의 꽃과 수천 마리의 짐승들도 손수레에 실었습니다

 

4요일에 K는 아직 무게가 없는 손수레을 끌고 다니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황금색 태양의 길이 처음 만들어졌고

그가 땀을 흘릴 때 태양은 그의 모자 뒤에 숨었습니다

 

5요일에 K는 길들 위에 고운 모래알로 집들을 지었습니다

산의 집 바다의 집 바퀴 달린 책의 집 화살의 집 모자의 집 거울의 집...

집과 집 사이에도 허공의 집을 세웠습니다

 

6요일에 K는 무척 바빴습니다

간혹 빈 집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 집에 들어갈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집마다 새로운 이름이 적힌 문패을 달아야 했습니다

제 집에서 살을 찌우고 있는 짐승들을 불러모았고

그는 아주 많은 그를 복제해야 했습니다

 

7요일에 K는 수리공이 되었습니다

길이 수시로 바뀌었으며 집들은 스스로 이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K의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녹슨 바람 소리가 났지만

떨어져나간 바다 한 귀퉁이를 눈물로 뽑아 메꾸는 일이나

가파른 비탈길을 갈비뼈 꺾어 망치질하는 일이나

빗물이 새는 지붕들을 살가죽을 떼어 꿰메는 일 따위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8요에도 무언가를 만들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K는 팔이 아홉 개 달린 짐승의 돌담집에 이르렀을 때

무더기로 핀 맨드라미에 선홍빛 피를 쏟고는 그만 고꾸라졌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서로 할퀴는 짐승들을 만난 게 화근이었습니다

살을 찌운 짐승들은 집들을 통째로 삼켰고

서로의 담장 너머로 화살을 겨누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장을 모두 꺼내 빚은 반죽을 고르게 분배해야 했습니다

 

K가 죽자 그의 몸 속을 빠져나온 어둠은 삽시간에 전염병처럼 퍼졌고

짐승들은 피 묻은 손톱으로 만든 건 시간의 생식기였습니다

 

언어의 신뢰성과 동일성을 믿지 않는다.

 

 난쟁이 K가 세상을 수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침.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세계. 도착적인 세계가 영원히 반복될 수 없다.

 성경의 원전을 뒤집는 해체적인 형상의 방법.

 총체성 회복이 유보된 사회

8요일 - 문제의 발생 근원

난쟁이 - 신의 위치로 격상, 주체 중심에 대한 반격(탈 중심적 세계관)

시간의 생식기 - 끊임없이 반복되는 양식.

                 도착적인 세계의 영원성을 의미

 

4. 계단을 오르는 사과나무(115)

 

계단을 올라가네

한 계단 한 계단 흰색으로 칠하며 올라가네

첨벙첨벙 계단을 올라가네 미끌미끌 계단을 올라가네

갈기를 늘어뜨리고 밤늦게 약국을 다녀오는 계단

잠든 이빨로 질겅질겅 껌을 씹는 계단

난간에 앉아 계단을 쑥쑥 순산하는 계단

계단을 밟는 순간 지워야 하는 것이네

흰색 페인트는 어머니가 주고 간 유일한 유산

계단 틈에 웅크린 저것,

자기야 왜 그러고 있어 왜 발목을 붙잡는 거야

사랑하는 자기야 뿌리가 썩고 있어

나를 관통해줘, 자긴

내가 십 년 전에 잉태한 사과나무야

불룩한 뱃속에서 사과즙이 출렁거리네

발목 아래로 흰색 바다가 출렁거리네

백태 낀 혀를 갈가리 찢어 만든 붓으로

계단을 칠하며 올라가네

층마다 단칼에 잘려나간 하늘이 모서리 끝에서 덜렁거리네

무거운 몸뚱어리를 바다에 끌러 놓고

구름이 핑 도는 실핏줄만 남아

계단을 지워가네

한 계단 한 계단 흰색으로 칠하며 지워가네

첨벙첨벙 계단을 지워가네 미끌미끌 계단을 지워가네

나뭇결 머리에서 다시 계단이 생겨나네

계단 틈에서 다시 사과나무가 뿌리를 뻗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계단을 지워나가는 것 - 반복적이기 때문에 곧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계단과 사과나무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사과나무는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이 만난 세계를 의미하고 그래서 일그러진 형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적인 의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워 놓은 관념들을 깨버리는 해체적인 시이다.

 

5. 이야기(131)

 

  천년의 하늘을 떠받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촘촘한 가지 사이로 노란 버스가 걸려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물로 짜여진 길 위로 노란 버스가  내려왔는데, 나는 노란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부리가 푸른 새가 핸들을 돌리고 있었는데, 버스는 불룩해진 배를 끌고 엉금엉금 허공을 건넜는데,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목이 긴 여자를 접어 트렁크에 넣고 의자에 천천히 몸을 풀었는데, 새의 날개에 그려진 노선표를 들여다보았는데, 개구리알 같은 눈알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잠깐씩 문은 열렸고 사람들이 울라타 트렁크를 하나씩 안겨 주었는데, 그때마다 창밖으로 너무 멀리 고개를 내민 가장 긴 목을 꺾어 트렁크에 넣었는데, 은행나무 가지마다 목을 매단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웃고 있었는데, 장난감 가게들은 귀를 막고 있었는데, 부리가 푸른 새는 핸들을 놓지 않았는데, 나는 차창으로 트렁크를 하나씩 내던지며 내릴 곳을 찾는 데 십 년을 써 버렸는데, 길을 얽은 무수한 그물코는 올이 풀려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노란 버스는 색도 바래지 않았는데, 이야기는 끝도 없는데,

 

허구가 지배한 세계 - 천상의 이미지

 하나님이 물질화 되어서 지상에 내려왔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이 내가 지나가는 길.   

트렁크 - 사람의 목을 꺾어 집어넣는다는 것은 인간을 사물화 물질화 구조화 시키는 것임.

은행나무와 노란버스 - 화려함과 경고의 이중성을 가짐.

버스가 지나가는 길 = 내가 지나가는 길

(사회 관습, 통념 = ‘의 의식 구조)

탈중심적인 세계인식

출처 : 젊은 단어들의 축제
글쓴이 : 외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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