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법칙 (외 4편)
김 륭
사자에게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살찐 너구리는 통통 무사했을지 몰라.
엄마, 저거 먹는 거야?
—먹을 순 있지만 너구리 엄마가 얼마나 슬프겠니.
악어에게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어린 누는 무사히 강을 건넜을지 몰라.
엄마, 저거 먹는 거야?
—먹을 순 있지만 누 엄마가 얼마나 울겠니.
새의 발견
누가 팽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았을까? 누군가 잃어버린 손지갑 하나
새 한 마리 가만히 제 작음 몸을 지갑처럼 열어 울음을 꺼내고 있다
지렁이는 우산을 쓰고
나는 지렁이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꽥꽥거리는 오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흙을 뚫고 나오지 못한 씨앗의 아픔을 전하기 위해 나는 지렁이가 구둣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잠든 밤에야 퇴근하고 돌아오는 옆집 아저씨처럼 뚜벅뚜벅,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씨앗들의 슬픔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는 꾸불꾸불 온몸으로 편지를 썼지만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눈물겨운 그 마음을 모두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나는 울먹울먹 지렁이가 할 수 없이 개미들을 불러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씨앗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개미들에게 온몸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렁이가 하늘에 잠자리들의 길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깜깜한 땅속에 웅크린 씨앗들의 말을 여의주처럼 물고, 지렁이는 나비들의 꿈속에도 잠시 들렀다 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징그럽다며 얼굴을 찌푸리겠지만 나는 지렁이에게 우산을 빌려 줍니다. 저만치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지렁이가 보입니다.
노란 우산이 참 잘 어울립니다.
눈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발은 없는데 발자국을 가졌지요.
내 발자국도 내 동생 발자국도 옆집 민구 발자국까지
제가 벗어 놓은 신발인 양 앞에 놓고 우두커니 서 있지요.
그러니까 눈사람은 발이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엄마도 아빠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르지요.
하느님도 모르지요. 봄이 올 때까지,
눈사람도 눈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지요.
책상 위의 개구리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기로 한 날
밤새 울었다
물 밖으로 두 눈을 내놓고
개굴개굴 밤새워 우는
개구리처럼,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었다
책상 위의 손거울이 무논 같다
무덤처럼 볼록 솟은
개구리 두 눈 속에 엄마 아빠가
다 들어가 있다
—동시집『엄마의 법칙』(2014. 7)에서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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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동시집『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별에 다녀왔습니다』『엄마의 법칙』,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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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동시문학상, 그 의미 깊은 두 번째 성취_ 김륭 『엄마의 법칙』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의 대상은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등을 통해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도 인상 깊은 동시 세계를 펼쳐 온 시인 김륭에게로 돌아갔다. 수상작 『엄마의 법칙』에서는 한층 무르익은 시인 특유의 기발한 상상은 물론, 공감을 기반으로 그린 여러 존재의 내면들이 자연스럽게 깃들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사위원 권오삼은 동화적 서사가 있는 작품, 일상을 동심적인 익살로 풀어낸 작품, 대상을 개성적인 관점으로 표현한 작품 등 시적 묘사의 범주가 넓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고, 이재복은 날개를 단 듯 여기 현실의 세계와 저기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적 형식에 주목했다. 안도현은 수상작을 두고 “앞으로 우리 동시가 나아가야 할 어떤 지점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반가웠다.”는 뜻 깊은 소감을 밝혔다.
날개를 달고 존재와 존재의 숨겨진 내면을 연결하는 언어
시인 김륭은 지금 동시단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이다. 시인은 전작들에서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던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보고 싶었다. 울퉁불퉁 이야기가 있는 동시를 쓰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인은 그 바람을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2009, 문학동네)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2012, 문학동네)『별에 다녀오겠습니다』(2014, 창비) 등을 펴내며 꾸준히 그리고 분명히, 스스로 증명해 왔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엄마의 법칙』에 이르러 마침내 괄목할 만한 지점에 도달하였다. 이번 동시집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시 세계를 받치는 두 축은 평론가 이재복의 표현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날개 달린 언어’의 반짝거림과, 공동체가 사라진 시대의 아픔을 시인만의 방식으로 그러모아 구축한, 단단한 서사가 주는 울림이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연대가 사라진 시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 아래 모든 의무와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고,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존재마저도 스스로 증명해 내야만 하는 처지에 처했다. 공동체의 역할은 구성원 모두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 시대의 심각한 현실과 아픔은 아이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시가 이 시대 아이들에게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공감의 힘으로만 가능한 기적이다.
안경을 쓰고 똥구멍까지 들여다보는 고양이의 눈
시인은 책머리에, 같이 사는 고양이 ‘무티’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들려준다. 무티는 벽에 붙은 날벌레와 무려 참치를 주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시인은 한낱 날벌레와 자신을 똑같은 눈빛으로 응시하는 무티에게 약이 올랐다가 이내 진짜를 꿰뚫어보는 무티의 심안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티의 안경을 빌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밤새 하늘로 머리를 밀어 올리다 꽁, 달에 머리를 찧은 해바라기, 깜빡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기차 꼬리에 매달려 새털구름이 된 오리, 팥이나 좁쌀은 생각도 못 할 질문을 세상 바깥으로 던져야만 하는 콩, 신발 가게에서는 팔지 않는 신발.
무티의 눈으로 발견하여 『엄마의 법칙』 안에 담아 놓은 ‘존재’들의 면면이다. 죽은 비유를 벗고 날개 달린 언어로 다시 태어난 이야기들은 빠르거나 느리거나, 작거나 크거나, 각자의 모습 각자의 속도 그대로 책장 사이를 날아다니며 노래한다. _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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