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 보기(12)편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니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詩
평평한 밋밋한
어눌한 느슨한
납작한 헐거운
엷은 얕은
오그라든 찌그러진
찌들어버린 빵꾸 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리듬의
김빠진 맥 빠진
기진맥진한 기고만장을 잊어버린
이런 시!
언젠가 나는 한 시에서
"애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라고 쓴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이 속에, 이 시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이런 시나 쓰는 마음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나는 다시 그 구절을 써본다.
얘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
문학동네 (2002년 봄호)
그릇 똥값
노량진 어느 거리 그릇 세일 가게
쇼윈도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그릇 똥값"
순간 충격적으로, 황금색으로
활짝 피어나는 그림 하나.
신성한 밥그릇 안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김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똥 무더기 하나,
아니 쇼윈도 안 모든 그릇들 안에 담겨
폴폴 향기로운 김을 피워 올리는 똥덩어리들.
그 황금색의 환한 충격.
입과 항문이 한 코드로 연결되듯
밥과 똥이 한 에너지의 다른 형태들이니,
밥그릇에 똥을 퍼담은들,
밥그릇에 똥을 눈들 어떠랴,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담배 한 대 피우며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이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태평양도 아니었고
대서양도 아니었다
다만 이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다
(그래도 미래의 時間들은
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읍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가을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최승자 시인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수도여고와 고려대 독문과에서 수학했다. 계간 『문학과지성』 1979년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등장한 그는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와 시선집 『주변인의 초상』 등을 상자했다. 그 밖에 번역 시집 『죽음의 엘레지』를 비롯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 『자살 연구』 등의 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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