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부활과 재생의 감각

시치 2012. 7. 11. 00:08

부활과 재생의 감각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9)
기사입력: 2012/06/26 [08:35]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하품
 
     김륭

 사월, 벚꽃나무 아래 김밥 싸놓고 싸웠다 김밥 한 줄 먹여주지 못하고
애인이랑 싸웠다 명박이 때문에 싸웠다 병든 아비걱정 까먹고 공부 못하
는 자식걱정 팽기치고 명박이 때문에 싸우다니,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햇살이 쿡, 쿡쿡 눈구녕을 찔렀다
 
 씨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거지발싸개 같은 봄날이엇다 서로 살을 섞
었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이 비겁한 눈구녕, 이 치졸한 눈구녕, 이
더러운 눈구녕, 썩고 썩어 곪아터진 눈구녕 가득 애인이 폭삭, 늙었다
 
 저만치 개나리 샛노랗게 웃었다. 눈구녕 깊숙이
 
 봇짐 내려놓고 나비를 풀어주었다.
 
 
# 삶은 비루하고 대책 없고 가망 없는 한판 싸움인 것을 내면에 구성되는 감각의 질서와 형상을 통해 확인한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이며 몽매와 무지와 혼미의 세월을 감당하는 몸의 내부는 왜 항시 들끓고 있으며 처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 현실을 대면하는 화자가 만들어놓은 알레고리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무도 모르게 발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그 발은 관리를 잘 해야 할 것. 때론 갈 곳을 잃고 허공 속을 방향 없이 떠도는 발도 있어 저게 뭐지, 뭐지 하며 한 나절을 허송할지도 모른다. 시적 언술은 밤의 뒤통수를 쳐서 대낮을 만들기도 하고, 삶의 공고한 질서를 전복하여 늙은 소나무를 거북이로 만들어 엉금엉금 기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간혹 삶은 웃기는 것.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 것. 벚꽃 흐드러진 사월에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애인과 싸우는 화자의 삶은 한 편의 코미디다. 그런데 그 코미디는 너무 슬프다. 세상에 이런 슬픈 코미디를 본 적 있는가. 그 슬픔이 끝나기도 전에 화자는 자학의 충동에 몸을 떤다. 폭발하여 산화하는 존재의 쓸쓸한 초상이다. 그것도 봄, 환장하게 황홀한 마리화나 같은 몽환의 봄날에 말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과하면서 화자는 제 몸을 찔러버린다. 죽음을 앞당겨 사는 것. 주저 없이 눈앞의 삶을 던져버리는 행위를 통해 ‘가보지 못한 곳’을 기억하고, 비겁하고 치졸하고 썩어 문드러진 ‘눈구녕’을 본다. 봄의 끝, 거기에 들통 난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처 보지 못했던 실체가 있다. ‘보다’의 행위를 통해서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늙은 애인을 직면한다. 생의 질서가 돌연 죽음의 질서로 전회하면서 애인이 생의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비겁과 치졸이 보이지 않는 곳. 슬그머니 고개 들면 ‘저만치’ 보이는 곳.

 그곳에 “거지발싸개 같은” 봄 대신 새로운 생의 전경을 들여놓는다. 봇짐을 내려놓는 행위는 하품 나는 일상을 폐기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회귀의 몸짓이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나비는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풍경으로 도약하면서 생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나비”가 시사하는 세계는 죽음과 오욕의 현실을 관통한 시의 알몸이면서 독해의 한계 밖으로 못처럼 삐져나간 부활과 재생의 감각이다. 낯선 감각의 기호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은 홀연 노란 색으로 물들거나 흰색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 지점에서 일부는 눈이 멀거나 다시 길을 잃고 헤매게 될 위험도 있지만 일단 현상의 저편으로 방향을 잡은 시의 몸은 한결 경쾌하게 날아오를 것이다.

 시인은 고백한다. “다시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너무 오래 피 흘리는 법을 잊어버리고 산 것”이라고. 상상의 지평이 광활한 그의 시가 앞으로 어떤 문양과 색깔을 갖게 될지 궁금하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출처 : 마산대학 시창작반
글쓴이 : 마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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