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신영배 시 보기(7편)

시치 2011. 11. 9. 23:56


블루, 당신이라는 시공간적 배경,外/신영배

세면대 위에서
콘택트렌즈를 빼내다 한쪽을 떨어뜨렸지
파란색 렌즈는 욕실 벽 타일 위에
둥근 몸을 말고 있어 살짝 떼어내자
그 푸른빛 속에서 말랑말랑 흔들리며
집 한 채가 딸려 나와
그 속에서 다시
네모난 방 하나가 딸려 나와
그 속에서 다시 푸른 점 하나가
나오더니 검은 뒤통수가 나오더니
펼쳐진 이불이 나오더니 이불 속에 누운
주검이 나오더니 그 차가운 방
여자와 아이들이 병풍도 없이 누운 주검과
삼 일을 마주하고 있어

당신이 죽은 공간에서 먹는 음식과
당신이 죽은 공기 속에서 나누는 말과
당신이 죽은 한기 속에서 자는 잠
푸른 물결이 한 겹 지나가고 방 안엔
한 남자가 움직이고 있어
투명한 살 속에 푸른 심장이 비치네
그 푸른 물속에서 내가 뛰놀고 있어
삼 일 동안 완성되는 연애

푸른 물결이 한없이 지나가고 방 안엔
푸른 몸의 내가 누워 있어
병풍도 없이 차가운 방에 내가 누워
삼 일 동안의 잠과 삼 일 동안의 말과
삼 일 동안의 음식을 만들고 있어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옥상에 앉아 있던 태양이
1층 유리창으로 내려온다.
유리 속을 걷는 구두는 반짝인다

귀가 접힌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으로는 지상에 없는 음악이 올라온다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는다

나의 아름다운 바지는 다리가 하나이다
지퍼 하나, 주머니는 넷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여섯 시 꽃에 닿는다

닫히는 문에 손을 찧으며
여섯 시 꽃으로 들어가 여섯 시 꽃에서 나온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주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잠겨 있을
내 그림자의 끝으로



    불타는 그네 

 
그네는 붉다
노을이다
쇠줄은 차갑다
노을이 붉은 얼음상자를 끌고 간다
혀가 얼음에 붙어 따라간다
머리카락이 날리고
그녀의 쇄골이 드러난다
혀가 빠져나간 입 구멍이 그녀의 가슴에 붙어 있다
노을이 파 놓은 그 구멍 속에 부리를 박고
저녁의 이면을 통과하지 못한 새가 죽어 있다
당신이 뒤에서 그네를 민다 천천히
노을 핏빛을 뿌린다 그네는 불에 탄다
활활 그녀의 치마가 하늘로 전진하며 붉게 퍼진다
활활 새의 날개가 가슴에 파고든다
활활 입으로 말을 한다
그녀의 가슴이 괄다 구멍이 커진다 허공에서
그네가 머문다
삐걱거리는 쇳소리로 저녁이 내려올 때
그녀의 등이 탄다 뒤통수가 군밤처럼 벌어진다
당신의 손이 더 세게 그네를 민다 당신의 손도 탄다
그네와 함께 저녁을 젓는 손
당신의 혀는 당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다
몸에서 뽑아내어 보여주고 싶던 것이
손바닥 위에서 혼자 퍼덕거리는 저녁
그네는 붉다 노을 속으로 날아 들어간
가벼운 소녀다 첨벙 뛰어든 처녀다
화장되는 노파다
붉은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입을 다문 당신이 돌아간다



     저녁의 점

   베란다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베란다에서 자란다 보도블록 위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보도블록 위에서 자란다
테이블 앞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테이블 앞에서 자란다 엘리베이터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엘리베이터에서 자란다
침대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침대에서 물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물속에서 거울 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거울 속에서 꿈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꿈속에서, 자란다, 손아귀들의 한낮

   검은 바람결이 목을 감는다 손아귀들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저녁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들이 죄다 머리가 잡혀 저녁의 점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얼어붙어 집으로부터 떨어진 점이 된다
둥근 나무들의 여백 사이로 발 없는 여자가 달린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검은 식물 속으로 모공의 꿈속으로
침대와 엘리베이터와 테이블과 보도블록과 물빛이 함께 있는 거울 속으로, 달린다. 점이 될 때까지


   나의 아름다운 방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오후 네 시 방향으로
나는 물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흠뻑 젖은 주둥이로 다리를 조금 흘린다
관 뚜껑을 적시는 문장

화분은 고양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깨진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할퀸다
씨앗이 퍼진다
갈라진 손등에 고양이를 묻고
해 질 녘 손의 음송

오후 여섯 시 방향으로
나는 기다란 악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붉은 손가락으로 관 속의 다리를 연주한다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물사과 

 

 

푸르지 않은 것에서 시작해

돌아가고 싶지 않은 유년이 있고

나무 없이 열리는 그것처럼

나는 몸뚱이 없이 두 방울의 눈물로 서 있네

 

부풀지 않은 젖에서 가슴을 시작해

쏟아지는 검은 손가락들을 평평하게 묻고

얼어서 울어서 얼어서 울어서

얼울거리는 얼울거리는

얼음의 유두

 

비늘로 덮인 곳에서 사타구니를 시작해

 

둥글게 둥글게

 

열리는

 

물방울 물방울

 

시큼하지 않은 것에서 혀끝을 시작해

물방울로 빠져나온 머리, 물방울로 따라나온 꼬리

울며 잠기며 울며 잠기며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게 누워

가라앉으며 가라앉으며

머리가 꼬리를, 꼬리가 머리를

물고 도는 물고 도는

물어서 울어서 물어서 울어서

물울하게 물울하게

회전하는 물

 

사과

 

달콤하지 않은 것에서 소녀를 시작해

 

발끝의 노래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창문을 열면

귀에서 귀로 냄새가 퍼졌다

 

그 발바닥을 보려면

얼굴을 바닥에 붙여야 하지

아무도 공중에 뜬 자국을 보지 못한 때

문자가 내려와 땅을 디디려는데

바람이 그것을 가져갔단 말이지

 

구더기처럼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 줄 남기고 다 버려 우리들의 문학 수업

시외로 가는 차량 근처에 너를 떼어버리고 오다

멀리멀리 가주렴 문장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야

살갗 같았던 문장과 이별하고도

아름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는 

목만 끊었다 붙였다

 

태양 아래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내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판다

내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내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내 그림자 무덤에 두 번의 절

그리고 축문

 

오늘 나는 그림자 없이 일어선다

흰 눈동자의 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내 발목을 잡는 검은 손

어제 장례를 치른 그림자가 덜컥 붙는다

발끝을 내려다봐

끊은 목 아래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이별은 계속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붙이고 붙인 살덩이를 끊고 끊어

차분히 내려놓을게

공중에 뜬 발바닥 아래로

 

다 내려놓을 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

 

신영배 시인
1972년 충남 태안 출생.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시집 『기억이동장치』『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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