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서리」감상 / 권혁웅
서리
문태준 (1970~ )
겨울 찬 하늘 한 켜 살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 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은 동천산(産)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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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라는 말 좀 들어보세요. “살껍질”이 보여주는 찰과상이네요. 하얗게 일어난 버짐 같고 안 드는 칼이 면도한 턱 선 같아요. “꽃살문”에 아로새겨진 섬세함이기도 하죠. 세상에서 푸석푸석해진 당신이 문을 열 때마다 꽃밭을 펼쳐 보이는 정인(情人)의 마음이에요. 새 문풍지에 기어이 구멍을 내는 손가락이 정인의 것이라면, 그 손길에 녹아 지나는 바람에도 떠는 문풍지야말로 당신일 테죠. 서리는 가을하늘의 끝물이지만 겨울하늘의 “첫물”이죠. 정인이 당신을 위해 아랫목과 화로와 먹을거리를 준비해두었다는 뜻이에요.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일고 있다는 뜻이에요.
권혁웅 (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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