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강인한
내 어린 날의 몽당 크레용을 주세요.
까실까실한 흰 빛 도화지에 나를 그리고 싶어요.
밤 검은 산에서 혼자 돌아오던
아홉 살의 보랏빛 산길을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
일요일의 심심한 하모니카 소리도 그리고 싶어요.
내 어린 날의 색종이를 주세요.
불쌍한 네로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의
그 붉은 풍차를 오려 붙이겠어요.
바람 부는 날 팔랑거리는 옥색 대님도
내 손바닥을 간질이던 눈 까만 강아지 이름도
인젠 다아 기억할 수가 있어요.
소아과 병원에 끌려 들어가면
싸아하니 밀려오는 하이얀 병원 냄새
뺨 비빌 때 콕콕 찌르던 아버지의 턱수염도
안 잊혀요, 영영 안 잊혀요.
내 어린 날의 몽당연필을 주세요.
나는 적고 싶어요.
양지바른 골목길을 졸랑졸랑 달려오는
기쁜 발소리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이는 사 이삼은 육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내 어린 날의 좋은 기억을 주세요.
그 어려운 병이래도 좋아요, 아주 다 주세요.
— 시집 『불꽃』(1974년, 대흥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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