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어린 왕자/강인한

시치 2011. 6. 14. 23:20

어린 왕자/강인한

 

 

내 어린 날의 몽당 크레용을 주세요.

까실까실한 흰 빛 도화지에 나를 그리고 싶어요.

밤 검은 산에서 혼자 돌아오던

아홉 살의 보랏빛 산길을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

일요일의 심심한 하모니카 소리도 그리고 싶어요.

내 어린 날의 색종이를 주세요.

불쌍한 네로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의

그 붉은 풍차를 오려 붙이겠어요.

바람 부는 날 팔랑거리는 옥색 대님도

내 손바닥을 간질이던 눈 까만 강아지 이름도

인젠 다아 기억할 수가 있어요.

소아과 병원에 끌려 들어가면

싸아하니 밀려오는 하이얀 병원 냄새

뺨 비빌 때 콕콕 찌르던 아버지의 턱수염도

안 잊혀요, 영영 안 잊혀요.

내 어린 날의 몽당연필을 주세요.

나는 적고 싶어요.

양지바른 골목길을 졸랑졸랑 달려오는

기쁜 발소리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이는 사 이삼은 육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내 어린 날의 좋은 기억을 주세요.

그 어려운 병이래도 좋아요, 아주 다 주세요.

 

 

                       — 시집 『불꽃』(1974년, 대흥출판사)

'必死 筆寫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미/이면우   (0) 2011.06.19
바닥/박성우  (0) 2011.06.17
아무르 강가에서/박정대  (0) 2011.06.09
천지간/김명인   (0) 2011.05.24
이것이 날개다/문인수  (0) 201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