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 유병록
그러니까 어떤 힘이 염소를 끌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난간에 묶어두고
내려와 사다리를 치웠던 것이다
벼랑에 서서 염소는 우두커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다 망가진 뿔로 구름을 들이받으려 했을까
곡선의 시간을 지 나오느라 한쪽으로 기운 발굽을 쓰다듬었을까
오후의 햇살 속에서 조그맣게 울먹이기도 했을까
젖은 눈으로 헤매고 다닌 길을 바라볼 때,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 뼘의 초원이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의 뒷발이 사다리를 밀쳐냈다는 사실에 놀라 흰 털들이 곤두설 때
뿔은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들이받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체온이 빠져나간 몸이 까맣게 변해가듯 흰 털을 가진 세계도 어두워갈 때, 두고 온
이름들이 염소의 눈동자 속 유적지를 향해 절뚝절뚝 걸어 들어갈 때
마지막 노을빛이 스러질 때
반짝, 발굽이 빛났던 것이다 저무는 오후의 한때를 기억해두려고 곧 제 안에서 빠져나갈 체온의 질감을 간직해두려고 염소는 빛을 구부려 매듭을 만들었던 것이다 캄캄한 길 나서기 전에 구두끈을 다시 묶듯이
** 유병록 /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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