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빈집의 약속 / 문태준

시치 2010. 2. 17. 22:42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 십년 혹은 백 년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 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같은 것이었다

 

'좋은시 다시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다/ 이대흠- 애지 2010 봄호  (0) 2010.02.24
[스크랩] 비가 오려할 때/문태준  (0) 2010.02.20
명궁(名弓) /차주일   (0) 2010.02.11
퀼트/전기철  (0) 2010.01.24
열쇠 /김혜순  (0) 2010.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