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이유 (외 2편)
김소연
흰 약처럼 쓰디쓴 고백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핏대를 세워 밤새 지르는 고함과도 같다
귀가 찢길 듯하다
차디찬 고백이 생피를 흘린다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는다
나는 우두커니로 확장된다
우리가 흘린 벙어리장갑 한 쌍이 보인다
깍지를 낄 순 없었지만
밑면과 밑면은 情死한 연인처럼
더 바랄게 없는 표정으로 포개어져 있다
못다 한 고백들이 정전기가 되어
그 사이로 스며든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흠뻑흠뻑 들린다
털이 많은 짐승 하나
아랫도리를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간다
유리창을 한 페이지 넘긴다
나는 하얗게로 지워진다
지워진다로 정확해진다
* 강정 시인에게
이것은 사람이 할 말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젖가슴에는 젖꼭지 대신 꽃봉오리
발가락에는 발톱 대신 자갈들이
이럴 때는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이럴 때는
딱 한 잔, 딱 두 잔, 딱 넉 잔
이럴 때는
달빛에 녹아내리는 벚꽃 잎처럼
흩날려 사라지면 안 되나요
퐁짝퐁짝 풍짝짝
사람들이 춤을 덩실덩실 출 때에
그 앞에서 음악이 되어 사라지면 안 되나요
목덜미에는 입술
허리에는 두 팔
머리카락에는 태엽 풀린 인형들
등 뒤에는 매미처럼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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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가톨릭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옴. 시집 『극에 달하다』(1996)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눈물이라는 뼈』(2009)와 산문집 『마음사전』(2008) 등.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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