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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김유석 시평 / 김륭

시치 2009. 12. 13. 20:55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김유석 시평 / 김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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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습속習俗 /김유석

 

 

 

멀어져가는 무리를 바라보는 누의 눈에

흙바람이 인다.

달림을 멈춘다는 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무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덮치던 극한 공포가

거친 숨을 다 몰아내고 난 뒤

누는 자신을 쫓던 것들을 슬며시 돌아다본다.

 

두려움이 빠져나간 누는 이미 죽은 누

거기까지가 누의 생이다. 타박타박

달려온 쪽을 향해 돌아서는 몸에 남아 있는 건

하이에나들의 배고픔과

쓸모없는 뿔처럼 늙은 기억들

 

먼저 등을 물어뜯는 건 기억이다.

한가롭던 초원과 무리 져 건너던 강물이

악어의 턱보다 세게 다리를 물고 늘어진다.

수천 마일 달려온 길목마다

진드기처럼 들러붙는 통증을 끊어줄

단 일격을 기다리지만

 

하이에나는 배고픔을 참을 줄 아는 짐승

제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기도 하는 누가

눈에 든 석양까지를 그림자에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려

필사적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누,

 

그 나머지를 뜯는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1-12월호

 

 

 

초자연적인 힘과 표절할 수 없는 생명들을 위한 다큐멘터리

 

                                                                                                 /김륭

 

 

  습속習俗은 미국의 사회학자 W.G.섬너의 『습속론 Folkways』(1907년)에서 거론된 folkways의 역어로 전통적인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뜻한다. 예로부터 되풀이되어 온 집단적 행동 양식을 말하는 관습慣習과는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다소 애매한 개념이다. 관습이 사회적 규범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규제이며, 공동체나 집단의 공통적 행동규범이라 한다면 습속은 여기에 ‘초자연적인’ 어떤 힘이 투사된 관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습속은, 관습과 마찬가지로 집단의 결합을 강화한다는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신불神佛 또는 이와 결부된 사회적인 힘, 권력 등의 장에서 규제되는 제사祭祀나 제례祭禮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다 깊고 구체적인 집단 행동양식의 표현이다.

 

  가뜩이나 아까운 지면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습속과 관습의 사전상의 의미와 차이부터 내려놓은 것은 김유석의 이번 작품을 읽기 전 간과하지 말아야 할 테제가 바로 이 사전상의 의미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다소 애매한 개념이지만 습속과 관습의 의미를 가르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이 바로 그것이다. 이 테제는 이번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김유석이란 텍스트를 관통하는 시 정신이자 세계관이며, 낯선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지 않는 그의 시적언술과도 궤를 같이한다. 1990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무려 15년만인 2005년 첫 시집(『상처에 대하여』)을 선보이며 꾸준히 자기세계를 걸어온 김유석이 독자들에게 꺼내 보이는 텍스트의 매력은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들을 파괴하거나 뒤흔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의식의 흐름을 선명하게 한편의 새로운 영상으로 환기시켜준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오래된 습속習俗」을 통해 그가 보여주려는 자연은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읽어온 지극히 단순하고 미학적인 자연, 혹은 인간의 삶을 배경으로 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시적 이미지로 포장하거나 인간의 꿈이 투영된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자연을 통해 그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세계를 통해 ‘초자연적인’ 힘을 통찰해내고 싶은 그의 치열한 시정신과 진정성이 일궈낸 ‘사상의 골짜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에나에게 뜯어 먹히는 누와 누를 뜯어먹는 하이에나는 자연에 깃들어 있는 인간을 대체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뛰어 넘어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때 누와 하이에나는 자연을 함께 공존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인간이자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경전’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자연의 ‘힘’과 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존재’의 의미를 간과해선 안 된다. 하이에나든 누든 둘 중 하나가 없는 자연은 존재가 배제된,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누드’와도 같은 것이다. 쉽게 말해 그는 이번 텍스트를 통해 하이에나와 누가 동시에 존재할 때 형상화되는 자연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연 속을 한발 더 걸어 들어가 ‘초자연적인’ 힘을 독자들과 함께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이 같은 세계관이 김유석이란 텍스트의 발화지점이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는 하이에나도 누도 아니다, 는 한순간의 아포리즘을 놓치지 않고 한편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상은 김유석이란 고유의 텍스트가 가진 세계관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다큐멘터리로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과 소통하는 대화의 어떤 양식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멀어져가는 무리를 바라보는 누의 눈에/흙바람이 인다.”로 시작되는 김유석의 이번 작품은 세상을 향한 발언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 나아가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이다. 그는 이 탐구를 거쳐 초자연적인 힘을 깨닫게 되고 관조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독자들의 의식을 보다 자연스럽게 견인한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누가 하이에나에게 살을 뜯기는 과정은 아름다우리만큼 담담한 어조로 약육강식의 동물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라기보다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연상케 한다. “나는 전지전능한 자세로 삶과 인간성에 대한 규범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를 사로잡는 것을 묘사할 따름입니다.” 헤세의 문장을 행간에 숨겨놓은 듯한 그의 언술은 거대한 자연에 한낱 인간의 일상을 집어넣은 듯 인간의 일상에 거대한 자연을 카메라렌즈로 압축해 구겨 넣은 듯 자연스럽게 흐른다. “두려움이 빠져나간 누는 이미 죽은 누”이며 “거기까지가 누의 생이다.” 이른바 인공적이고 분열증적인 이미지들과 파괴적 문법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들은 그가 가진 지극히 누 같은 삶과 지극히 인간적인 사유가 맞물려 빚어낸 통찰이자 시적 ‘제의祭儀’다.

 

  “먼저 등을 물어뜯는 건 기억이다./한가롭던 초원과 무리 져 건너던 강물이/악어의 턱보다 세게 다리를 물고 늘어진다./수천 마일 달려온 길목마다/진드기처럼 들러붙는 통증을 끊어줄/단 일격을 기다리지만”

 

  그는 자연 속에서 포착한 참혹한 영상을 잠시 멈춰놓고 인간사회의 감추어진 속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물러선다. 김유석의 시적미학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자연 속에 시대에 억압된 자기모멸이나 자조의 형국을 투영, 안주하기 쉬운 전통서정시의 어법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이에나는 배고픔을 참을 줄 아는 짐승/제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기도 하는 누가/눈에 든 석양까지를 그림자에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려/필사적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누,//그 나머지를 뜯는다.”

 

  아름다우리만큼 참혹한 풍경을 통해 그는 다분히 ‘제의祭儀적인’ 의미구조를 통해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존재를 전면화한다. 이는 자신의 시적 공간을 보다 새롭게 상승시키기 위한 자기반성과 날카로운 자기투사로 얻은 결과물이다. 그는 약육강식이란 말로 대변되는 동물의 왕국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처참한 광경이 난리법석을 떨만한 어떤 ‘비상사태’가 아니라 삶의 상례(常例)임을 깨닫게 한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인간적인 사랑은 지순하며 고집스러웠을 것이다. 눈이 멀도록 애틋하고 집요했을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을 추구하지 않으며 존재론적 울림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초자연적인 힘을 포착해 그 울음으로 삶을 지탱한다. 얼마나 뼈아픈 일인가. 김유석이란 텍스트의 감동은 여기서 온다.

 

 

  <현대시 2009.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