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 한 꺼풀 벗기면, 모든 사랑은 드라마
사랑의 미안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익숙한 풍경이다. 한 여인이 울고 있다. 비겁한 사내, 그 앞에서 참담해 하면서도 사랑을 부정한다. 하지만 시인의 ‘광각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니 사내 역시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속이 탄다. 겉으론 통속적으로 보여도 사랑의 안쪽에서는 이런 드라마가 펼쳐진다. 비유와 상징이 빼어난 이영광 시인의 시편은 대개 “낭만적 우수와 현실 감각이라는 이중 장치에 의해 씌어진다”는 평을 받는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이씨는 “미학적 설계나 계획 같은 건 없다. 무기력하게 기다리다가 집중력이 높아지고 한편으로는 멍한, 시적인 상태나 기분이 되면 자연스럽게 시가 나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에 영매(靈媒)처럼 몸을 빌려주는 일. 이런 시작법은 다른 시인들도 얘기하는, 새로울 것 없는 노하우다. 이씨는 “시 1년 쓴 사람과 20년 쓴 사람은 다를 것”이라며 “빈틈 없이 언어를 운용할 수 있도록 문장을 단련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미안’은 이런 단련을 거친 시다. 신준봉 기자 ◆이영광=1967년 경북 의성 출생. 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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