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시인 공광규

시치 2009. 8. 24. 20:55

                                          시인 공광규 (孔光奎)

                                   




 
   약력  
◇ 1960 서울 돈암동 출생, 충남 청양 성장 
◇ 1986 『동서문학』신인상 등단 
◇ 시집 『대학일기』(실천문학, 1987년), 『마른잎 다시 살아나』(한겨레, 1989년), 
  『지독한 불륜』(실천문학, 1996년), 『소주병』(실천문학, 2004년) 
   아동전기 『성철스님은 내 친구』(재능출판, 1993), 
  『천진한 부처 성철스님』(북앤피플, 2003년), 『마음동자』(화남, 2004년) 
◇ 논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 전자주소: kkkong60@hanmail.net 
◇ 블로그: http://blog.daum.net/funandcool(살림살이 들이는 중 ^^*)
 
  대표시   
어머니께·1 
어머니 
겨울 강가에 갔었지요 
흐르는 강물 앞 
모가지 드리우고 
마른 풀잎에 베여 신음하는 
바람을 보았어요 
강과 만나는 것들은 
강물 따라 시늉하며 
강 모습으로 
바다를 만나고 싶어하데요 
속으로 타는 불기둥도 
강에게 기울어 
강물로 흘러들기를 
하여, 어떤 평원과 만나기를 
그리고 어머니 
강 풀섶 
마른 갈대들도 보았지요 
키 큰 몸짓으로 
겨울을 태우는 모습은 
끝가지 제 하늘 지키는 
꽃보다 아름다운 
반란이었어요.  
  - 시집 『대학일기』에서
갈대로 서서  
세상 갈대로 서서 
한번 흐느껴보자 
누가 더 섦고 애통한지 
옆 갈대와 슬픔의 키도 대보자 
바람 심한 날이면 
같이 부퉁켜 안고 울다가 
저기 먼저 바람에 꺾여 
강물에 실려가는 갈대가 보이거든 
잘가라 손 흔들자 
내가 먼저 꺾여 실려가도 
미련 없이 떠나자 
먼저 떠날수록 
더 넒은 평원에 먼저 닿으리. 
  - 시집『마른잎 다시 살아나』에서
아름다운 기둥  
법당 받치고 있는 
저 기둥 참 아름답다 
한때 연약한 새싹이었으나 
아름다운 법당 받치고 있다 
나 어렸을 때 
세상 받치는 기둥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것도 못되고 벌써 
한 가계에 등이 휘었다 
내 휜 등에 상심하다 
저 법당기둥 보고 
누구나 세상 한쪽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임을 안다 
그러고 보니 원망만 했던 우리 아버지 
법당 기둥이었다 
가난한 가계를 힘겹게 받치다 
폐가 썩어 일찍 지상에서 무너진 
아름다운. 
  - 시집『지독한 불륜』에서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시집『소주병』에서
월미도 
낡은 포장마차가 우울을 달래고 가라며 
양철 연통으로 입김을 호호 불어댄다 
가게에서 흘러나온 흘러간 노래가 
해변의 곡선을 따라 흘러 다닌다 
흘러간 세월을 파는 가게는 없는 걸까? 
잘못 걸어온 나이가 막막하여 온몸을 떤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안 된다며 
허공의 뺨을 후려치는 선창의 깃발 
맞는 건 허공인데 내 뺨이 더 아프다 
카페의 붉은 등이 충혈된 눈으로 
기우뚱거리는 난파선 한 척을 바라본다 
흐린 별도 내가 측은한지 
눈물을 글썽이며 내려다본다 
그래, 너는 정말 잘못 살고 있어! 
파도가 입에 거품을 물고 나에게 충고한다 
나의 개 같은 삶을 물어뜯으려고 
이빨을 세워 부두에 기어오르는 파도 
달빛이 튀는 얼음을 우두둑 우두둑 밟으며 
회한의 뼈가 부러지는 내 몸의 지진을 듣는다.
  - 시집『소주병』에서
아름다운 사이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여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현대시학]』2004년 11월호에서
시간의 마차 위에서  


마부가 말했다.
지금 마차는 사십 오세 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항의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는 거요, 이건 내가 원하는 속도가 아니오.
마부는 말했다.
이봐요, 손님. 속도는 당신 주민등록증에 써 있소. 쯩을 까보시오.
나는 쯩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마부에게 떼를 썼다.
억울해요, 좀 천천히 가거나 마차를 멈춰주시오.
마부는 근엄하게 말했다.
이 마차는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소. 내리면 다시 탈수도 없구요.
나는 더욱 놀라서 마부에게 졸랐다. 그렇다면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찾아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어요. 몸과 영혼과 시간을 다 바쳐서 번 돈 말이오.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당신에게 주겠어요.
마부는 심각하게 말했다.
글쎄요, 이 마부조차 시간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러나 당신의 용기가 가상하니 찾아보죠.
마부는 채찍을 마구 휘둘러대고, 마차는 더욱 빠른 속도로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찾아서 달리고 달렸다. 마차의 속도는 갈수록 더 빨라졌고, 시간을 파는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너무 빠른 나머지 나는 겁이 나서 마부에게 소리쳤다.
여기서라도 당장 내려주시오, 어서! 제발...
마부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죠, 늙은이. 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신은 꽥이요.

   -『작가와 사회』 2004년 겨울호에서
꽃나무 
당신이나 나나 
겨울 산에 사는 
꽃나무였군요 
온갖 잡목과 섞여 
자기가 꽃나무이면서도 
꽃나무라고 말하지 않는 겨울 꽃나무 
이른 봄에 확! 
자기를 불지르다 
신록으로 다시 몸을 감추는 꽃나무 
당신이나 나나 
꽃나무이면서도 꽃나무라고 말하지 않고 
온갖 잡목과 섞여 사는 꽃나무. 
   -『시현실』2005년 여름호에서
 
   시집  
  제 4시집 『소주병』(2004년, 실천문학사)  
 후기 
8년만에 시집을 내게 되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 시가 어떠냐고 물어보다 늦은 것이다.
시를 이용해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기억이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괴롭고 헛된, 허위와 허상에 매인 불량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실하여 마음이 흡족하게 살고 싶다. 부드럽고 따뜻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이웃과 더불어 잘 먹고 잘 살고 즐겁고 싶다.

가정을 잘 운영하는 아내와 잘 자라는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시골의 어머니에게도.

그리고……,
                                             2004년 산수유 피는 봄
                                                            공광규
 
   해설
빈자(貧者)의 시학 
                                        장영우(평론가,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1.
공광규가 어느 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전혀 세월의 흔적이 머물 것 같지 않던 그의 수려한 외모도 중년의 기미가 느껴질 정도로 많이 변했다. 숱 많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지고 청명하던 눈의 정기는 다소 흐려졌으며 맑게 눈웃음치던 눈가에는 잔주름이 자글거린다. 언제까지라도 결기 있는 청년으로 살 것 같았던 그도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것이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공광규는 아직까지 세상살이의 의혹에서 헤매고 있다. {지독한 불륜}(1996) 이후 8년만에 상재한 그의 네 번째 시집에서 가장 눈에 쉽게 띄는 특징은 40대 가장의 가혹한 자기성찰적 고백이다. 젊은 시절 그의 시가 외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언어에 담아 표출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웅숭 깊은 내면적 성찰의 집중력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개성적인 시인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이미지나 시어를 가지고 있듯이, 공광규는 "삶의 상징으로 표상"되는 이미지로 '개(犬)란 단어를 자주 동원한다. 그의 시에서 '개'의 이미지는 "시인 자신이자 분신이요 동지며 적이기도 한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을 가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임헌영, {지독한 불륜} 해설)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조적 인식이 순결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정직하고 투명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재의 삶이 "쓰레기통을 뒤져 밥을 구하"거나 "던져주는 밥 찌꺼기에 꼬리치며 만족해하는"([개냄새]) 개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아프게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때 젊음의 순결한 정신과 열정만으로도 세상의 오염과 타락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믿음이 언제 증발되었는지도 모른 채 "발에 걷어차이면서도 모이를 향해 돌진"([닭])하는 닭처럼 "희망 없는 중년을 더럽게 버텨 가"([느티나무])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각오의 다짐이다.

맛있는 머루와 으름 덩굴을 좇아 다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날이 어둡고 산짐승들은 울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울며불며
길 잃은 것을 후회했던가

맛있는 것에 눈이 멀어
산을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 도심 골짜기에 들어 와서
길을 잃었다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다
쾌락의 토끼 꼬리만 정신없이 따라다니다가
인생을 조감하지 못한 탓이다.
― [길을 잃었다] 전문

어려서 신기한 볼거리나 맛있는 먹거리에 눈이 팔려 길을 잃었던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아픈 추억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었던 그때의 아득한 절망감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여 진땀을 흐르게 한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의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다"보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겨를조차 없다. "사육과 맹종의 우리에 갇혀/자본의 황금침대에 누워/사타구니를 벌려주는"([나는 짐승]) 일에 길들여진 현대인을 공광규는 각종 짐승의 형상으로 비유한다. 그가 현대인의 비유적 심상으로 동원하는 짐승의 종류는 개와 닭을 비롯하여 비둘기·벌레·소·개구리·지렁이·토끼·파리 등 무척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도심의 비둘기에게서 저임금·중노동에 혹사당하는 샐러리맨의 초췌한 몰골을 읽어 낸 그의 눈썰미는 정확하고 예리한 사회비판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차량의 운행마저 뜸한 도심의 보도에서 불결한 비둘기가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먹고 있다. 녀석은 "절단기에 잘려나간 인쇄노동자의 손목처럼"([을지로에서]) 뭉툭한 발로 깡총거리면서 "취객이 게워낸 밥알을/열심히 주워먹"다가 운 나쁘면 행인의 "발길에 채였거나 갑자기/날아가려다 시멘트벽에 부딪쳐"([추운 밥]) 목숨을 잃기도 한다. 도심의 비둘기는 이제 더 이상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 아니다. 도심의 비둘기에게는 생존경쟁에서 밀려나 오갈 데 없는 걸인이나 노숙자의 이미지가 누더기처럼 걸쳐져 있다. 그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은 산수유열매도 아니고 향긋한 빵 부스러기도 아니다. 을지로 인쇄골목의 인쇄공이나 종이집 사환, 혹은 실연한 태양다방의 미스 김이 토해 놓은 토사물이 그들의 하룻밤 성찬 메뉴이다. 시인의 눈에는 인쇄골목의 일꾼들이나 비둘기 사이에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남보다 많이 먹으려고 부지런을"([을지로에서) 떨다가 "돈버는 기계/자본의 소금에 절여진 파김치/밥을 찾아 굽실거리는 벌레"([휴일, 권태])가 되어 "악취 나는 개 같은 삶"([월미도])을 살아가는 "짐승"([나는 짐승])이거나, 그도 못되어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기계([기계])처럼 상투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유적 심상들이다. 이처럼 시인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소외당하는 미물의 행태에서 "사상의 정부(政府)도 마음의 정부(情夫)도 없이"([대천 바다]) 속물화되어 가는 40대 중년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공광규가 40대 중반의 자화상을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기계" 혹은 "눈깔도 대가리도 뼈다귀도 없이/주둥이와 똥구멍으로만 기어다니는(…) 지렁이"([지렁이])로 비유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학이거나 엄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자기인식은 밥과 쾌락만 좇다 "인생을 조감"하지 못하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의 소나무로 남지 못한 채 "절벽에서 내려"([다시 절벽으로]) 온 나약함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만능 사회를 살아가는 자신을 마른 흙더미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지렁이로 비유하는 시인은 "배는 고프나 광야와 대해를 넘보는/빈 입이기 일쑤이나 자유로운"([나는 짐승]) 야생의 삶을 꿈꾼다. 그러한 삶은 세속의 물질과 허명에 대한 욕망을 비워야 가능한 삶이다.


2.
공광규는 엄혹한 자기반성을 통해 비움의 철학을 터득한다. 인간의 욕망은 아귀의 뱃구레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가 지는 법이다. 그것을 가득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욕망을 비우는 것뿐이다. 비우고 나눔으로써 우리의 삶이 더욱 따뜻해지고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내적 성찰의 과정을 통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눌수록 풍요해지는 비움의 역설을 공광규는 빈자(貧者)의 미학으로 풀어낸다. 빈자의 미학이란 가난한 사람의 궁상스런 삶의 치부를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생활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정신을 말한다. 그것은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여유와 화합의 미학이다.
공광규는 사소한 일상에서 비움의 철학과 빈자의 미학을 발견해 내는 비상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는 도살장에서 도륙 당하는 돼지의 비명소리를 "동네 사람 모여 내 몸 나누어 먹으라고/동네방네 소리를 꽥꽥지르며 시위"하는 것으로 새겨 듣고, 고사상(告祀床)에 오른 돼지머리의 콧구멍에 지폐를 쑤셔 박아도 "재채기 한 번 안하며 웃기만 한다"([돼지])고 시치미를 뗀다. 그가 보기에 돼지는 "털이 벗겨지고 머리와 발목이 잘려나가고/창자가 소금에 씻겨 가마솥에 던져지고/간이 잘게 쪼개서 고춧가루양념소금 묻혀/소주와 우물우물 썩은 이빨에 씹히면서도/잘린 머리가 반달 눈을 하고 째지게 웃는" 보살의 화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돼지]는 육신이 갈기갈기 해체되는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존재의 비움을 채우는 빈자의 미학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에 반해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은 자기를 온전히 비움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을 얻은 세기의 미녀를 진솔하고 평이한 어조로 풀어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흰머리 쭈그렁탱이 할머니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인간 막대기를 안고
세상을 슬프게 응시하고 있다
영풍문고판 {TOEIC超학습법} 48쪽에 실린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로 번 재산을
기아의 아가리에 털어 넣고서야 천사가 되다니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해져서야 아름다워지다니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부분

탱탱한 몸매의 젊은 여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외모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형외과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외모를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풍조 때문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 한 편으로 세계 남성의 심금을 울렸던 세기의 미녀배우 오드리 헵번은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해져서야" 진실로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세계적 배우로서 얻은 재산과 명성을 모두 버리고 굶주리는 아프리카 흑인 어린아이를 위해 봉사하는 노년의 오드리 헵번은 한창 젊었을 때보다 몇십 배나 아름답고 고귀하게 빛난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한 마더 테레사의 거룩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더 테레사가 실천해 보여준 삶이 비우고 버린 뒤에야 비로소 채워지는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었다면, 말년의 오드리 헵번이 소말리아에서 보여준 희생과 봉사의 삶 또한 그 못지 않게 성스럽고 찬란한 것이다.
비움의 철학 혹은 빈자의 미학은 마더 테레사나 오드리 헵번 같이 먼 나라 사람들이나 성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에게서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집 앞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종종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기대고 보태다/설움과 울음이 되기도 하고 따뜻함이 되어/옆 사람 옆 사람의 마음까지 울려주고 데워주던"([흘러가는 실내포장마차]) 가난한 이웃끼리의 인정과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으며, 성공한 사업가나 공직자 신도가 없어 가난한 것 같지만 "채소장수 빵장수 행상들이 팔고 남은 것을/모두 교회에 가져다 주"([향기가 나는 집])어 더욱 풍성한 장애인교회에서 가난한 이웃끼리 서로 나누며 베푸는 따뜻한 삶을 확인할 수 있다. 나누어 베푸는 생활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인의 시선은 산수유 열매 하나를 사이 좋게 나누어 먹는 콩새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선명하게 붙잡아낸다. 그의 눈에 비친 콩새 부부는 양말도 신지 못할 만큼 가난해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다닌다"([겨울 산수유 열매]). 하지만 콩새 부부는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가장 보기에 좋"을 만큼 다정하고 화목하다. 그들의 정겨운 모습은 하늘도 감동시켰는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산수유 열매는 콩새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며 빨갛게 익어 간다. 겨울의 빈 나뭇가지에 앉아 나무 열매를 쪼아먹는 콩새의 모습에서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온화한 빈자의 미학을 일구어 낸 시인의 감수성은 모든 사물을 향해 열려 있는 긍정과 포용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비범한 안목과 통찰력은, 가령 마루에서 뒹구는 소주병에서 아버지의 고독한 말년을 발견한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소주병] 전문

병(甁)은 그 속의 내용물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참기름병은 박카스병에서 청주병까지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지만 그냥 참기름병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주병에는 소주가 담겨 있어야 제격이고, 소주병의 본분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소주병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빈 소주병은 가차없이 버려져 쓰레기로 취급된다. 물자가 귀하던 예전에는 빈 소주병이 다양하게 재활용되었지만 요즘엔 엿장수도 별로 반기지 않는 폐품일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뒤 냉정하게 버려지는 빈 소주병처럼, 우리들의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때 우리 사회와 문단의 일각에 극단의 아버지 부정 풍조가 만연했던 적이 있었다.
80년대의 일부 젊은이들은 남북 분단과 군사독재정권의 창궐 등 한국 현대사의 왜곡과 파행이 모두 아버지 세대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떤 수모와 굴욕을 겪었는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늙고 기력이 떨어진 아버지들은 자식들의 가혹한 비난에도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곁방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한때 아버지를 비난했던 자식들도 이제 아비가 되었을 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옛말처럼, 40대 중반에 접어든 시인은 마루에 버려진 소주병에서 문득 예전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의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슬픔과 좌절을 소주로 달래왔던 것일까. 그분들은 오직 가족에게 따뜻한 밥과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세상의 온갖 멸시와 굴욕을 인내하며 자신을 비웠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모두 주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처절한 회한과 그리움을 이 시인은 "속썩어 썩은 내장과 진이 빠져 푸석푸석한 살/온 식구가 이미 빼먹은 등골과 경화에 걸린 동맥국수/스트레스로 강화된 쫄깃한 뒷머리의 근육/뼈골 빠진 구명에서 불어오는 슬픈 인생의 맛"([아버지 시체를 먹어보자])과 같이 그로테스크하고 섬뜩한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겐 봄의 꽃과 신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바로 꽃이며 신록인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에겐 아버지가 늘 왜소하고 비굴하게만 느껴진다. 자식들에겐 불의에 굴복하지 말고 부정과 타협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당신은 적당히 굴복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그냥 살다 가신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끝내 실패"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냥 실패만 하신 것은 아니다. 큰 비로 무너진 논둑을 고치려다 문득 발견한 썩은 말뚝은 아버지가 박아 놓은 것이다. 논둑이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것은 모두 그 말뚝 때문이다([썩은 말뚝]).


3.
공광규는 "비굴하게 견디고 길들여져/밥은 굶지 않"게 된 40대 중년의 삶을 "천대받은 짐승의 세월"([나는 짐승])이라 자학하면서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칠갑산에 여쭈러 가다])라는 자연의 꾸지람을 듣기 위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가 덕유산이나 지리산, 칠갑산 등 산을 자주 오르고 원적사나 개심사, 무명암 등 사찰을 즐겨 찾는 것은 더러운 속세의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기 위해 운수행각을 하는 수도자을 닮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산정에 오르면 오를수록
초록은 키를 낮추고 있다

벼락맞아 부러진
능선의 키 큰 고사목들

신문 방송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고관대작들 벼락맞는 이유를 알겠다

높이 올라가더라도
절대 까불지 말고

척박한 고지에서
키를 낮추고 견뎌야겠다
― [덕유산] 전문

높은 산에 오를수록 나무가 작아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기압이 낮고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는 교목(喬木)이 성장하기에 좋은 조건이 못된다. 공광규가 산을 오르거나 사찰을 찾는 까닭은 "도심에서 안달하는 욕심의 철사 줄 끊"([칡덩굴 끊으러])고 "나를 묻고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칠갑산에 여쭈러 가다])서이다. 다시 말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몸과 마음이 투명하게 맑아지기를 바라며 산을 오르는 것이다.
탐욕을 버려 투명해진 시인의 눈과 귀에는 "산죽이 눈 속에 혀를 처박고/햇볕과 섞어 맛있게 핥아먹"([겨울 지리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파란 혓바닥으로 햇빛을 베어먹는/목련나무 이파리의 말 없는 말"([개심사])이 들린다. 뿐만 아니라 겨울철 앙상한 가지에 말라 비틀어진 채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고욤이 "어머니의 젖꼭지"([겨울 고욤])처럼 보이기도 하고 겨울 하늘에 걸린 수많은 별들이 "추위에 떨다 하나 둘/불을 쬐러 마을로 내려가/처마 끝이나 가로등에 매달려 있"([겨울 대관령])은 것처럼 보인다. 공광규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장점 가운데 하나는 자연 풍경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매우 독창적인 상상력과 비유에 의존하여 사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어느 분이 봄소식 전하려고 하늘에서
풀쩍 뛰어내리다 바위에 상처를 입어
산등성이마다 피가 번져 진달래여요
신록은 그것이 산불이 이는 줄 알고
출렁출렁 능선으로 파도쳐 가서는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벚나무 가지에
하얀 물거품을 눈처럼 얹어 놓았어요
―[봄병] 부분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 [새싹] 부분

봄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를 봄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늘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천사의 피로 비유한 [봄병]이나 막 움이 돋아나는 새싹에서 "병아리가 밟고 지나가도 뭉개질 것 같"고 "입김에도 상처를 입을 것 같"은 연약함과 부드러움을 읽어낸 [새싹] 등의 작품은 이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대단히 비범함을 입증해 주는 좋은 보기들이다. 그는 어린 새싹에서 "장차 뭐가 되리라고 짐작이 가지 않는" 놀라운 잠재력을 발견하기도 하고, "사람의 욕심을 물리쳐 천수를 누린 (미루)나무"([미루나무])에서 '무용(無用)의 용(用)'의 장자적 철학을 배우기도 한다. 외적 현실에 대한 그의 시적 대응은 "숯불처럼 뜨겁고 벼린 날[刃]처럼 섬뜩"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자연을 관조할 때의 그의 시에서는 수묵화처럼 그윽한 여백의 미와 눈 맑은 수좌의 청량한 선풍(禪風)이 느껴져 정신마저 쇄락해진다.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 [수종사 풍경] 전문

이 시에는 지금까지 논의한 공광규 시의 몇 가지 장점들이 모두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부근에 자리한 수종사는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사찰이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수종사의 빼어난 풍광에 있지 않고 법당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에 집중된다. 잘 아는 것처럼 풍경은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는 불교에서 용맹정진하는 수좌의 비유적 상관물로 쓰인다.
강물에 사는 물고기는 피둥피둥하게 살이 올라야 예쁜 법이지만 절 안의 물고기[風磬]는 종이처럼 얇아야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풍경의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눈과 비에 얇아진 몸"이란 표현은 깡마른 몸매로 선정(禪定)에 든 수좌의 기품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에 깡마른 몸은 마구 흔들리지만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처럼 청아하다. 속세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으로 정신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우고 희생함으로써 더욱 큰 사랑을 일궈내는 공광규의 빈자의 미학이 불교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천의무봉에 가까운 작품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집에서 공광규는 자연과의 친화가 빚어내는 언어의 아름다운 숨결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가난한 어머니가 끓여준 멀덕국에서 달과 별을 건져 올리기도 하고([별국]), 겨울 지리산의 눈속에서 산죽(山竹)이 따스한 햇볕을 받아 자라는 모습을 포착해 내거나([겨울 지리산]), 겨울 태백산에서는 "달빛을 핥아먹는 산죽 잎새"([겨울 태백산])를 용케 찾아낸다. 그의 시선이 이처럼 자연의 은밀한 교감에 집중되는 것은 세속적 욕망을 비우고 정신적 자유와 화합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연유한다.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천지의 호흡과 대화로 이해하는 그의 사유는 동양적 무위사상 혹은 선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젊음의 열정과 분노는 사그러 들었지만 그의 순결한 정신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등단한지 근 이십년 만에 네 번째 시집을 엮어 낸 그의 시적 행보는 소의 그것과 닮았다. 그 소는 "뿔로 안개를 들이받으며/(…)/지고 올라간 아침해덩이를/언덕에 부려놓고는/허공에 목적 없는 울음"([알혼섬])을 우는 원시적 힘과 웅혼한 상상력을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정진할 것이다.



 
   단평    
 시와 함께
공광규 ‘아름다운 사이’
아름다운 사이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여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마더 데레사를 닮았다.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데레사 할머니가 보인다. 빈민가 골목길에 세워둔 조그만 게시판이 보인다. 굽은 등과 주름 잡힌 손으로 할머니는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믿음, 믿음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베풂, 베풂의 열매는 평화"라고 당신 생각을 가만가만 적고 있다.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지 않는, 쓰러질 때 받쳐주는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더없이 고요하고 마침내 평화롭다. -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공광규의 <아내> 
아내를 들어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두 마리 짐승이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고 
또 한 마리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다 
먹이를 구하다 
지치고 병든 암사자를 업고 
병원을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먹고 사는 것에 한정해 생각하면, 시인의 아내처럼 불우한 아녀자도 없을 것이다. 제 식솔들의 일용할 양식보다, 하찮은 풀벌레와 들꽃들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족속들이 시인이니 말이다. 몇 천원의 통장 잔액에 아랑곳없이 뼈다귀해장국에 소주를 한잔 걸치고 온 날,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웃다가 울다가 했다. 나의 아내 역시, 두 마리 짐승이 몸을 찢고 나간 흔적을 갖고 있는 지치고 병든 암사자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아내 역시 누가 속을 다 파먹은 헌 가죽부대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숫사자들이여, 병원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당장 아내를 업고 달려보기로 하자. 아내가 마른 풀단처럼 가벼운지 어떤지. - 최영철(시인)

 시인이 시로 안내하는 수종사의 풍경 
[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곳이 양수리다. 그곳 어디에 수종사라는 절이 있다는데 풍광이 빼어나다는 소문만 들었지,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양수리의 푸른 물과 그 옆의 푸른 산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 봄이 가기 전에 꼭 그 절에 가서 풍경소리를 듣고 와야겠다.
어제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이라는 시집을 읽다가 갑자기 그런 감동을 받았다. 제목도 ‘수종사의 풍경’이었는데, ‘양수강이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처마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수종사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 물고기의 살과 뼈는 햇볕에 날아가고 몸은 눈과 비에 얇아지고,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로 풍경이 운다고 했다.
그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빈 병 밑바닥에 남아 있는 몇 방울의 소주처럼 투명하면서 아렸다. 시인은 시를 쓰는 동안 자신을 그렇게 소주병처럼 비워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 한 편으로 수종사 풍경 아래에 서 있다.(소설가)

 대학인들에게 드리는 편지
난, 나의 주인일까? 
막무가내인 바람과 약한 나무가 많아 
세상이 슬픔덩어리인 양 보이지만 
헐벗은 겨울나무는 미풍에 울지 않는다 
작은 바람 앞에서 
쓸데없이 자주 울어버리는 나무들 사이에서 
쉽게 자기를 흔들어 울지 말라 
바람은 우리를 
거친 들판에 몰고 다니며 구기고 찢어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치려고 애쓰지만 
소외의 크기가 같은 옆의 나무와 
어깨 서로 기댄다면 
구두발길질 따위엔 쓰러지지 않으리 
그러나 몹시 사나운 바람 불어 
우리의 슬픔이 미풍에도 자주 울어대는 
나무들의 슬픔과 같지 않을 때 
누가 나를 따라 울 것인가 살피지 않고 
슬픔의 크기가 같은 나무들과 어깨동무하고 
바람보다 더 큰 힘으로 울어버린다면 
못 견디게 그리운 이름 부르는 
우리들 함성만 남아 
세상 울리리 엎어버리리 

제가 좋아하는 공광규 님의 '쉽게 자기를 흔들어 울지 말라, 그러나'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역풍이 몰아쳐 세상이 서글프게 느껴지더라도, 그보다 더 강하게 자신을 키워나가리라'고 노래하고 있지요.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흐름을 주체적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길을 여는 올곧은 자세를 겨울나무에 빗대어 '세상 울리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 겨울 나무는 요즘의 대학인들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듯이 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취직준비라는 당면과제 앞에 모든 것을 저버리는 것이 대다수 대학인들의 일상이기 때문이지요. 사회야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일단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의 것을 챙겨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 어느덧 우리의 사회현실과 나에 대한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지요.
일전에 제가 모 대학인들을 비판한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대개 사회특권계층으로 가져야할 책임의식을 지적하는 글들이었는데요, 독자들의 반응이 참 놀라웠습니다. 개중에는 저의 글이 지닌 약점을 비판해 주신 분이나 비판을 겸허하게 듣고 공감을 표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게 날아온 메일이나 해당되는 독자분들의 말씀 중 상당수는 저의 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악의적인 반발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씁쓸했습니다. 그래도 양심과 지성이 살아있으리라 생각되는 대학인들마저도 스스로 특권층이 될 경우에는 비판에 마음과 눈을 닫아버리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하물며 다른 현실의 기득권층에 있어서랴'는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열심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고 계신 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정상적인 사회의 톱니바퀴로 들어가기에만 전력을 다하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묵인과 방치, 그리고 그 속에서 힘없는 국민들의 고통들의 증가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고,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꿈들을 이 속에서 펼쳐나갈지' 하는 고민들은 결코 가만히 있어서는 풀어질 수 없는 문제이지요. 우리가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풀리지 않는 한계들에 자꾸 부딪쳐가는 와중에서 실마리를 약간씩 찾아 나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땀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라는 안치환 님의 자유라는 노래도 있지요. 그저 지금 세상 돌아가는 대로만 끌려서 산다면 우리들의 자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나 자신의 세상과 삶을 개척하는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닐는지요?
보이는 현실에 압도되어 그에 이끌려 가버리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도전하는 용기와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소중한 자유라는 젊음의 특권을 손쉽게 저버린 처사이기 때문이지요.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시류에 휩싸여 가버리기 이전에,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나의 자리를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수열 기자)

 
   대담   
 [인물] 만나고 싶습니다
중용의 덕을 아는 시인   


예술인의 인구가 늘어나도 정작 예술인이 한데 모여 환담을 나눌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명동과 무교동을 거쳐 인사동에 크고 작은 카페가 들어섰지만 10여 년 전 사라진 ‘탑골’에 비길만한 낭만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듯 하다. 그런 차제에 낙원동의 카페 ‘시인과 갤러리’는 마치 5,60년대 명동을 방불케 하는 낭만과 정겨움이 작은 공간 가득 풍겨 나와 옛 정취를 되살리고 있었다. 조금 이른 저녁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자 시인이자 소설가인 조명인 씨가 반색으로 공광규 시인을 맞았다. 작은 공간이 몇몇 의기투합하는 화가와 시인들의 아지트처럼 낙원동 한 켠에 움을 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공 시인이 어느새 준비했는지 클래식 씨디를 하나 주인에게 넘겨주며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시와 그림이 걸려있는 소박한 카페 안에 엘가의 ‘사랑의 인사’ 드뷔시의 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먼저 그가 이번에 출간한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을 몇 장 넘겨보았다.


박 철/ 반갑습니다. 이번 시집은 8년만의 출간이라 그만큼 정성도 많이 들었을 터인데 이전의 시집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공광규/ 지난번 시집 [지독한 불륜]은 자본과 권력의 불륜 관계를 표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예언적 성격도 강했는데요, 결국 자본과 권력의 불륜이 외환위기라는 큰 국가적 파괴를 갖고 온 거지요. 남녀의 불륜은 한두 가정만 파괴되면 되는데 자본과 권력의 불륜은 전체 사회, 국가단위의 파멸을 가져오지요. 만성적 실업, 청년실업, 신용불량자, 가난은 전부 불륜의 자식들인 거죠. 시인의 눈으로 그런 불륜을 직감했지요.
이번 시집은 자본주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중년의 고백을 담았어요. 어떤 사람은 아주 처절한 고백이라 하더군요. 아무리 잘 살아보려 해도 살아지지 않는 아버지들, 제 아버지도 그랬고, 아버지가 된 저도 그렇고, 박철 시인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고 방법적으로도 전 시집보다는 세련되어졌어요.


박 철/ 시를 쓸 때 실체험에서 얻는 사상과 언어가 큰가요 아니면 깊은 사유에서 시를 이끌어내는가요??

공광규/ 반반이지요. 상상력이라는 게 원래 실체험과 사유가 행복하게 결합하는 것이잖아요. 체험 없이 쓰는 시, 사유만으로 쓰는 시는 어딘가 좀 맹물 같지 않을까요. 체험 없는 시는 건강해 보이지도 않고요. 그래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책임 없이 도피해서 쓰는 시들을 저는 안 좋아해요. 먹고사는 문제와 부딪히는 시가 참으로 잘 와 닿아요. 시는 골방에서 쓰는 게 아니라고 봐요.


박 철/ ‘소주병’이라는 시집 제목이 이채롭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소주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공광규/ 잘 살아보려고 해도 생각처럼 잘 살아지지 않는 절망한 사람들, 가계를 짊어지고 있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친구가 소주병이죠. 알코올이 잠시나마 절망에서, 가계의 무게에서 휘발하게 해주죠. 또 자신을 비워주고 버려지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빈 병처럼 마루 끝에서 쪼그려 앉아 자신의 연민에 휩싸여 우는 아버지이기도 하고요.


박 철/ 상식적인 질문 하나 하지요. 왜 시를 씁니까? ?

공광규/ 그냥 쓰죠. 써지니까. 써야하니까. 마음이 시 쪽으로 가니까. 현실을 견디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시가 없이 나를 이 세상에 맡긴다는 게 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먹고사는 생계에 매달리는 문제도 참 헛되고요. 이 바둥바둥 하는 현실도, 더러운 꼴을 보고 사는 현실도 싫고요. 도피의 방법이기도 하지요. 도피하면 안 되고 현실과 대결해야 좋은 시가 나오는데...


박 철/ 이번이 네 번 째 시집입니다. 다작도 그렇다고 과작도 아닌 편이에요. 다음 시집을 거론하기엔 조금 이른 바가 있지만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앞으로 해야할 작업으로 느낀 점이 있나요? ?

공광규/ 없어요. 의도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써보려고 해요. 인생엔 의외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부자가 되거나 알거지가 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뜻하지 않게 기막힌 연애를 시작하거나. 그런데 자본과 권력에 대한 관심은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이놈들 때문에 내가 지금 어렵다고 생각되거든요. 이놈들에게 치어서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요.


박 철/ 시에서 불교냄새도 나던데요.?

공광규/ 제가 불교종립 대학을 나왔거든요. 그래서 불경도 좀 많이 구경했죠.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일대기를 어린이용으로 쓰기도 하고요. 청담스님 말씀을 모아서 책도 내고요.


박 철/ 이번 시집에서 이 시만은 꼭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시를 스스로 추천해 주시지요. ?

공광규/ 글쎄요, 시가 다 좋아서 하나를 추천하기는 힘들군요. 하하하. 앞부터 차례대로 하면, <수종사 풍경>은 산에서 읽으면 좋겠고, <별국>은 좀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으면 좋겠고. <소주병>은 술집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읽으면 좋겠고, <월미도>는 잘 못살고 있는 자신을 학대하면서 읽으면 좋겠구... <월미도>가 어떨까 해요. 선배시인들과 겨울에 월미도에 술 마시러 가서 쓴 시거든요. 이 사람은 이 시가 좋고 저 사람은 저 시가 좋다고 해서 저도 흔들려요.


박 철/ 시인의 취미나 일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

공광규/ 그렇다할 취미가 없어요. 거실에 배 깔고 누워서 빈둥대며 책을 읽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감이 들어요. 굳이 있다면 10년 이상 맨발 산행을 하고 있어요. 소설가 김성동 선생이 영국사에 있을 때 놀러가면서 처음 시작했지요. 가까운 북한산을 비롯해서 관악산,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을 맨발로 올랐어요. 굉장하지요. 이것만은 좀 자랑하고 싶네요. 산에 갈 때는 무조건 맨발로 가요. 맨발 산악회를 만들어볼 까도 생각했었는데 번잡할 것 같아 그만 두었죠.


박 철/ 맨발산행을 하면 정력에 좋은가요? ?

공광규/ 역시 물어볼 줄 알았죠. 다 그것부터 물어요. 어디가 좋으냐고. 그건 소주를 사면 가르쳐 주지요. 하하. 맨발산행은 아주 생태적인 등산이지요. 맨발을 하면 발을 안 다치려고 조심조심 풀이나 나무를 피해 흙을 밟기 때문에 생명을 죽이지 않지요. 개미나 벌레도 안 밟아요. 징그러워서 밟을 수도 없지만요. 나무뿌리도 안 밝고요. 또 흙을 살짝 부드럽게 밟기 때문에 산사태를 예방하기도 하지요. 왜냐고요. 비가 오면 주로 등산로로 물이 흘러요. 등산화에 밟힌 땅이 딱딱하니까 빗물이 스미지 못하고 그곳으로만 모여서 흐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면 빗물이 모여서 흐르는 곳에 땅이 파이고 결국은 사태가 나는 것이지요. 큰 비가 온 뒤 등산로에 흙이 깎여나가고 바위와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박 철/ 최근 인상깊게 읽은 책이나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해주시지요. ?

공광규/ 생각이 안 나네요. 몇 권의 시집을 읽었지만 좋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뭘 좀 쓸 일이 있어서 최근에 신경림 시를 모두 봤어요. [한국대표노동시집](도서출판b)도 보고요. 홍문표의 [시창작원리]도 보고요. 시간이 없어 책이 안봐져요. 볼 책은 많은데. 빨리 돈 벌어서 실업자가 되고 싶은데 뾰족한 방법도 없구요. 평생 이렇게 살다 죽을 것 같아 겁나요.


박 철/ 연극연습을 한다고요. ?

공광규/ 네, 5.28(금) 오후 6시 장충동 현대문학관에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소설가 김원일 선생님이 문인연극을 부활시키자는 기획을 했어요. 해서 매주 토요일 모여서 연습중이죠. 대사가 안 외워져 걱정이어요. 제 시집 [소주병]과 이순원의 소설 [수색, 그 물빛 무늬], 하성란의 소설 [별 모양의 얼룩]을 각색하여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었어요. 가족극이죠. 제목은 [이 가족의 근황]이라고 노인 부부와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 소설가 부부가 등장하는데 작가들이 직접 역할을 바꾸어가며 출연해요. 저는 노인역과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 형의 역할을 하죠.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날까봐 좀 걱정스럽기도 하고요.


박 철/ 뭐 더 해보고 싶은 거 없으세요. ?

공광규/ 아주 서정적 연애소설 한번 써보고 싶어요. [사랑의 인사]나 시크릿 가든의 음악 같은, 음악과 잘 어우러진, 섹스와 폭력이 전혀 없는 순정 연애 소설을 써보고 싶군요. 히히. 낭만주의자 박 시인, 술이나 마시며 놉시다. 건강하고 깨끗한 연애 얘기나 하며.

박 철/ 시인을 만나면 즐겁다. 그만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품격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이 한 말 뒤에 쑥스럽게 웃어 제끼는 모습도 보기좋다. 거나한 술자리 뒤에도 다음날 늘 뒤끝 없이 개운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공광규 시인이다. 그의 시 또한 그러해서 슬픈 이야기라도 마음을 달래주는 매력이 있다. 적당히 나서고 적당히 물러서는 중용의 덕을 이미 익힌 듯한 그와의 밤이 길어지고 있었다.? - 박철(시인) [북센] (2004.5.25)

  
 
  인간평   
[인터뷰] 인사동 <시인학교> 교장 정동용 
"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물"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는 인사동 <시인학교>의 정동용(42) 교장이 잠시 짬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중략)


-문인들이 <시인학교>를 자주 찾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익숙하고, 편안해서 그렇겠지. 문인들의 경우는 꼭히 약속을 정하지 않더라도 동료문인들과 반갑게 조우할 수도 있고, 독자들은 책으로만 대하던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같은 것도 있을테고."

-동료문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니, 외상도 거절 못할 것 아닌가? ?

"80년대엔 외상 때문에 망할 뻔도 했다. 누가 외상을 주로 했느냐고? 그 사람 체면을 생각해서 그것까지야 말할 수 없지(웃음). 시를 좋아하고, 시 쓰는 사람들이 좋아서 시작한 장사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어려운 시절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학교>에서 술 매너가 가장 좋은 손님은 누군가? ?

"포항제철 동료였고, <대학일기>를 낸 공광규(시인)다. 경희대 강사로 나가는 맹문재도 깔끔한 매너를 가진 신사다."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술은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대화의 대원칙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아닌가? 아무리 취해도 자신의 의견만을 막무가내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비단 술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태도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나."(오마이뉴스)



출처 : 시야, 밥 먹고 놀자!
글쓴이 : 촛불시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