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 생각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아버지의 검지
-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번 한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출처 : angels62
글쓴이 : 여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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