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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배 생각/안상학 시인

시치 2009. 8. 15. 15:24

아배 생각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아버지의 검지

-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번 한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출처 : angels62
글쓴이 : 여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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