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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 2009. 7. 6. 00:58

연애의 생산성/김륭

 

 

 

  #염화미소拈華微笑

 

  어떤 날은 연애란 것이 장닭 벼슬처럼 만져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애인과 꼭 통닭을 시켜먹는다 암소갈비를 좋아하는 당신에겐 개 풀 뜯어먹는 소리겠지만 생을 탁발托鉢 중인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내게 연애란 일종의 탱화, 헐렁한 바지주머니 속을 꼬깃거리던 만 원짜리 지폐 속에서 그녀의 손때 잔뜩 묻은 미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연애는 내 몸의 가장 믿을만한 곳에서 발견된 암자 같은 것이다

 

  #달빛

 

  아직 눈물을 갈아 끼우지 못한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중이다 화장이 먹히지 않는 가난을 사면 먼지를 덤으로 얹어주는 구멍가게 지나 달동네 언덕바지 퉁퉁 불어터진 컵라면 같은 성욕을 위해 별 할 일이 없어진 나이가 이맛살 찌푸리고 앉아 팔다리를 자른다 나는 결혼 후 남편과 밥 먹듯이 관계를 가졌지만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그녀의 오르가즘을 두루마리화장지처럼 말아 쥐고 밤새 피를 돌린 적이 있다

 

  #장닭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날의 내일은 푸드덕, 털이 뽑혀서야 15층 아파트를 날아오르는 닭 날개 혹은 수영을 배우러갔다 눈이 빨개져 돌아온 그녀의 겨드랑이 같은 것이다 가끔씩 밥그릇보다 가벼운 마음이 몸을 깨울 때가 있다 백 년 동안의 가난이나 슬픔이 추파를 던질 때면 몸이 뜨거워지는지 임신 중인 그녀가 식은 밥을 물에 말고 있다 잠이 덜 깬 내 몸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 콕콕 쪼아놓는 아침, 알이 굵다

 

 <월간 우리시 10월호>

 
 
 

묘혈墓穴 /김륭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루해진 애인 네 번째 생일을 건너뛴 4일이나 13일의 금요일쯤이면 떠오를지 몰라 넥타이 꽉 졸라맨 목으로부터 시작되는 둥근 파문, 빨간 사인펜으로 달력에 동그라미 치듯

 

  38번 국도변 수박 몇 덩이 사이로 쪼글쪼글 웃는 할머니 꼭지 떨어진 얼굴에 담배꽁초 비벼 끄고 줄행랑치는 그랜저꽁무니에 매달려가는 저기, 단 한번도 지상으로 내려놓지 못한 두레박이거나 똥바가지거나

 

  아니지, 죽어도 내 것은 아니라고 이즈음 나는 울 때마다 머쓱해진다 수세기 전의 늪에도 제 얼굴을 그려 넣지 못한 물푸레나무에게 눈 작은 벌레들에게 미안해진다 애당초 내 것은 없었으니 허공에 판 구덩이였을 뿐이니

 

  새가 운다 텅 빈 둥지 하나 라면냄비처럼 밑이 그을린 나무의 얼굴 하나 허공에 걸어놓고 울어올 때 어쩌냐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당신은 또 어쩌냐 서로에게 미안해서 어쩌냐

 

  내 것도 아닌 얼굴로 자위나 하고 살았다니

  까맣게, 까마귀 떼들이 상주였다니

 

     <월간 우리시 10월호>

 

 

사과가 엄마를 골랐다/김 륭


1.
사과가 쪼글쪼글해졌다 입이 궁금할 때 깎아먹으라고 애인이 보내준
혀가 시들었다 시들기 전 잠시 지루해지는
사과는 낙관적이다 바나나처럼 미끄러지기 쉬운 고요의 시간
허공으로 열렸던 입술이 툭, 바닥으로 떨어진 방안 가득
조용히 썩어가는 사과의 새콤달콤하게 졸린 냄새가
모기향과 함께 정답게 피어올랐다
유방(乳房)부터 도려냈다

2.
박정임, 사과를 좋아하는 여자지만 사과가 싫어하는 여자
오렌지라고 좋아할 리 없는 며느리밑씻개 같은 그녀를
아버지는 개다리소반 위에 올려놓고 살았다
마른 아귀처럼,
생선에 열광하는 아버지와 그의 피를 이어받은 고양이를 위해
뼈를 발라내는 여자는 죄(罪)가 없다
사과가 그녀를 골랐다

3.
쪼글쪼글 칼도 들어가지 않는 칠순 노모를
아직도 엄마라 부르는 이즈음의 나는
아무래도 고아다 벌레 씹은 얼굴로 썩어간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등에 칼을 꽂은 애인이 킬킬거리며
썩어간다 썩는 줄도 모르고
엄마가 썩어간다 무럭무럭 한세상이
맛있게 썩어간다

 ―《현대시》2008년 10월호

 

   ♤<푸른 시의 방> 강인한 선생님의 한 줄 평

 사과가 엄마를 골랐다 … 어떤 경우든 김륭의 시는 유쾌한 상상력의 전개를 보여줍니다. 쪼글쪼글 마른 사과와 칠순 노모(박정임), 아버지와 나의 관계 속에 모든 표현이 전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슬픔도 해학으로 바꾸는 마술적 상상력을 보입니다.

 

 

 

심야深夜 /김륭

 

  달 없이 오는 밤의 젖꼭지를 꺼내던 시골집 앵두나무는 얼마나 발을 헛디뎠을까 동구 밖에 주저앉은 바람을 불러다 눈두덩 꿰매던 어머니

  먹감나무 위에 걸어둔 까마귀 얼굴로 밥상 뒤집어 하늘에 시비할 궁리가 남았는지

  출몰이 잦아진 거미들이 옭아맨 눈물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맡이

  어금니처럼 평평해지는 시간, 다세대주택 옥상에 널어둔 사각팬티가 안정을 찾아가듯

  늙어간다는 게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죄스러워지거나 말거나 구불구불

  길을 나서는 화사花蛇의 시간

 

  한 여자의 지아비로 살기엔 너무 늦어버린 몸의 가장 가파른 곳에 도사리고 앉아

  밥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지 꽃과 살을 섞고 싶을 때가 있지 가뭄 든 논둑의 뱀딸기처럼 등 돌려 우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듯

  사는 게 고마워지거나 말거나 미안해지거나 말거나 가만히 절벽처럼 앉아

  실밥 터진 목숨 한 자락 비치는 날이면 휘휘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딴전 피듯 만지작거리는

  내 몸이 절경絶景이다

 

  식은 라면냄비 속에 풀어진 달의 머리카락 한 올 건져 올리는 동안

  개구리처럼 눈만 툭, 불거졌던 성기가 죽었다

  꽃과 밥 사이를 오가던 무지렁이 사내 하나 꿈틀꿈틀

  밟히면 밟힐수록 꿈틀꿈틀

  한세상이 꿈틀한다

 

   <현대시 2008년 10월호>

 

 

 

 

비늘 (당신은 옷을 벗고 있는 중이고 나는 휘둥그레 뜬 눈을 당신의 배꼽에 매달고 있는 중이다 단추의 기원이다  당신과 나를 위세상이 잠시 눈을 감아주는 순간이 있다)

 

 

  물고기가 잘라버린 혀를 하늘에서 만진 적이 있다. 늙은 오리 한 마리 뒤뚱뒤뚱 엉덩이를 노란 물주전자처럼 앉힌 자리, 팬지꽃 코사지 장식이 달린 당신의 드레스가 물비늘로 촘촘해지는 동안

 

  나는 당신의 등 뒤에서 달을 꺼낸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의 아슬아슬하고 불온한 촉감,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숨을 팔딱거리며 부패의 각을 세운 거다. 슬쩍 그림자를 벗어던진 새떼들 아니, 바람에 꿰인 생선구이 한 접시 까맣게

 

  까맣게 떠가는 하늘 한 귀퉁이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빈곳을 떠오른 것이다.

 

  길이 뒤엉킨 거미 뱃속에 걸린 날개를 만지작거리듯 침대 밑으로 벗어던진 당신 드레스와 내 줄무늬 양복은 애당초 단추가 달려있지 않았던 거다. 둥둥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몸을 바짝, 잡아당기고 있던 죽음의 각질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서로의 몸을 물처럼 통과하는 죽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희번덕거리기 시작하는 한밤의 갈증, 제 그림자를 물에 적시지 않는 물고기들에게 비늘은 옷이 아니라 단추다.

 

  세상의 모든 눈이 반짝, 나와 당신의 급소를 꿰고 있다.

 

   <현대문학 2008. 10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현대시 2008. 11월호)>

 

 

 

바람의 육체/김륭

 

 

  몸 안에서 죽은 시간이 머리카락으로 자라

  들어 올린 머리, 팔베개 할 수 없는 달의 무덤가로 훌쩍 키만 자란

  바람이 울어 자꾸 울어 손발만 그려주면 사람이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당신

 

  털썩, 주저앉아 바닥칠 수 없는 나무를 갈비뼈 삼아 육체를 드러내는 당신은 라면박스로 집 지어준 새끼고양이 같아서 우리 어머니 죽어서도 고삐를 놓지 않을 송아지 같아서

  운다 자꾸 울어서 죽지 않는다 살아서 울며

  울어서 죽음마저 깨운다

 

  울어라, 울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울음의 솔기가 풀릴 때마다

  돋보기 쓴 어머니 바늘에 실 꿰고 나는 낮은 지붕 위로

  가만히 눈물 한 장 더 얹어둔다

 

  문 쪼매 열어봐라

  너그 아부지 왔는갑다

 

 

 

바람의 식민지植民地/김륭

 

1.

  그녀는 섬이고 그 섬은 왕만춘氏의 영토요.

  물개 번식지 같은 그녀의 잠 또한 그의 말뚝에 매인 공해상이오.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그녀의 살과 뼈는 그의 그림자 밑에서 검은머리갈매기로 완성되오.

  섬의 오랜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녀의 성대를 제거한 왕만춘氏 말을 빌리면

  그녀는 본인의 집사람이오.

 

2.

  심심한 감사를 표하오. 아내를 집사람으로 칭송하는 수많은 여러분들께,

  이쯤에서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소. 시 같은 거 때려치우고 돈이나 좀 벌어야겠소.

길바닥에 나앉은 사람들에게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집사람이 옵션으로 딸린 집을 나눠준 다음 대통령이나 한번 해봐야겠소. 집이 없어 집사람을 갖지 못한 나는

  영부인이나 얻어야겠소.

 

3.

  손바닥만한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급한 것은 집이나 땅이 아니오.

  집사람이오. 집을 나가 왈왈, 본인을 개처럼 짖어대는 집사람부터 잡아야 하오. 집값이야 뛰어봤자 벼룩이요. 왕만춘氏의 바람기처럼 잡힐 거요. 가뜩이나 흥분한 정국이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쌀농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관리들에게 나는

  노비가 딸린 감자밭과 마늘밭 또한 교지로 내릴 것이오.

 

4.

  존경하는 여러분들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려온 이 나라 집사람들께

  무한한 영광을 표하오. 집을 나간 그녀는 더 이상 왕만춘氏의 집사람이 아니오.

  식민지가 아니오. 집시가 될 뻔했던 본인의 영부인이오.

  그녀는 독도(獨島)고 독도는

  그녀의 영토요.

 

     <서정시학 2008 겨울호>

 

  나비의 발견/김륭

 

 빈 옆구리 기웃거리던 바람이 요즘은 자주 얼굴을 만지작거립니다. 그러고 보니 거울보다 먼 산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구름이 자꾸 몸을 열고나옵니다. 하품처럼 나이테가 점점 커지는 마음이 툭툭, 내 것이 아닌 몸을 뱉어놓고 파닥거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눈물 그렁거릴 때마다 한 마리 두 마리 나비 떼가 날아오릅니다. 내가 던진 말에 준동蠢動하는 당신의 구름이 여기서는 환히 내장까지 다 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가슴 칠 때마다 파랗게 질리던 입술이 오늘은 저만치 돌덩이 위에 앉아있습니다.

 

  늦게나마 나비의 날갯짓에 바느질자국이 있다는 소식 먼저 전합니다.

 

  쓰-윽 나이가 지나간 흔적이라고 그냥 한번 웃어주십시오.

 

  꽃을 낳기 전에 전화 한번 넣어주십시오.

 

   <2008 시와 문화 겨울호

 

      살부림/김륭

 

  그대를 사랑한 후 알았다 단말마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꽃이다, 칼보다 먼 곳에 살던 꽃이 쓰윽 걸어들어 오면서

  내게도 급소가 생겼다

 

  모든 칼은 한때 꽃이었다 바람의 발바닥을 도려내던 머리맡에서 피보다 진한 눈물을 도굴했다 나는, 그대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금 태어났거나 이미 죽어버린 구름이다

 

  해바라기 꽃대에 목을 꿴 그대 눈빛을 보고 알았다 바람에 등을 기댈 수 없는 꽃은 칼이 된다 악연이다 우리의 사랑은 구름 속에 꽂혀있던 나를 뽑아 나무의 허리를 베고

  새의 날개를 토막-치면서 시작된 것이다

 

  칼로 물 베기란 붉은 살을 가진 물고기비늘에 필사된 천지검법의 하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상대를 바닥에 눕히는 필살기 죽어도 사랑한다는 독침이 꽂혀있는

  애무의 마지막 초식이다

 

  늘 손잡이 없는 칼을 품고 다니며 축지법에 능통한 법 훌쩍, 한손의 고등어처럼

  그대와 내가 다녀온 하룻밤의 별을 식히는 동안 절정을 맞는 것이다

 

  피바람 몰아치는 무림천국을 흥미진진한 동물의 세계로 잘못 알고 뛰어든 멧돼지나 노루가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 꽃을 피워 올리듯

 

  변태가 불가능한 체위의 발가락과 천둥번개를 먹고 자라는 머리칼 사이로 우리는 오늘도 내일처럼 식상하게 태어나거나 어제처럼 새롭게 죽어갈 것이다

 

  그대 잠시 한눈파는 사이 급소가 사라졌다 한번 더 목숨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적의 급소가 곧 나의 급소다, 장미 한 다발 하나 사들고

  칼 받으러 간다

 

 

 

시작노트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는 낙타를 발견한 적이 있다. 급소가 사라진 육체의 내부는 사막의 형식이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내 것이라 우길 수 없는 내 몸이 소리를 낼 때 바람이 만져졌다. 아무래도 너무 상투적이다. 사랑이란, 육체의 죽음을 매개로 욕망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칼부림 같은 건 아닐까. 결국 실패한 사랑이 불러오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죽음이겠지만 이 죽음이 육체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학적이다. 꽃이 아니면 칼이 되어 급소를 찾는다.

사랑과 이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이다. 이 경계에 꽃을 심듯 칼을 집어넣은 적이 있다. 사막의 주인은 모래나 바람이 아니라고 우기는 낙타를 타고 내 죽음을 발굴한 적이 있다. 무슨 상관인가. 사랑이란 삶보다 치열해진 죽음의 척화비일 뿐인 것을.

 

 

   봄동 / 김륭

 

 꽃밭으로 유인되었어요. 칠순 엄마, 죽은 듯 숨을 고르고 있어요. 엄마 김치 엄마∼ 막내딸 성화에 헤벌쭉 입 안 가득 썩어가던 이빨을 벌레로 풀어놓아요.

 

  다 늙어빠진 할망구사진은 박아서 뭐하누.

 

  파뿌리로 변해가는 파마머리 위 똬리처럼 놓인 바람의 실밥뭉치를 발견했어요. 팔랑팔랑 그림자가 고정되지 않는 모시나비 한 마리 돌멩이로 눌러놓고

 

  찰칵, 엄마 자꾸 눈 감지 말라니깐.

 

  마른 젖무덤 속에서 아버지에게 살해된 여자가 발굴되는 한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납치된 눈물을 꽃이라고 베껴 썼죠.

 

  얼어 죽겠다는 듯 나를 걸어 들어와 배시시 볼우물만 파다 갔지. 토닥토닥 화장만 고치다 갔지.

 

  당신 아직도 피고 있을까.

  지금쯤은 지고 있을까.

 

   <시와 반시 2009 여름호

 

    

 

     새의 식탁 / 김륭

 

 

                        새는 힘껏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발이 없는 것은 새가 아니다

 

.

오늘의 메뉴는 구두입니다.

 

얼룩말은 제 몸의 얼룩이 다 지워질 때까지 달리고

 

박지성은 펄펄 등번호가 달아날 때까지 달리고

 

사랑에 빠졌잖아요. 우리는, 발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달리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놓은 곳 없지만

 

바람의 발바닥이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부르틀 때까지

 

그때까지만 우리 울지 말고

 

걸어요. 아무래도 구두는

 

새들이 걱정입니다. 내일의 메뉴는

 

날개입니다.

 

 

   독사毒蛇/김륭

 

 

독을 품고 사는 일보다 밥맛 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누군가의 목을 꽉 물어뜯는 한순간보다

 

오래 살고 싶은 때가 어디 있을까

 

저기, 대가리 빳빳하게 치켜든 독사 한 마리 질질

 

올챙이시절에 잘라버린 제 꼬리처럼 땅바닥에 끌고 가는

 

먹개구리보다 살맛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보다 치명적인 독이 어디 있을까

 

밥보다 오래된 독이 어디 있을까

 

 

 

 

   모기의 정체성/김 륭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하나뿐인 목숨마저 갖다버릴 수 있는 것은, 몸이 너무 달아 왈칵 피가 우는 순간 절정을 맞는 입술이다 그러니까 나는 뜨겁다 너무 뜨거워 울었다 맴돌았다 오로지 당신만을 울며 맴돌다 피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 밤 내가 원한 것은 수박의 붉은 속살이 아니었다 당신이 뱉어낼 씨였다 미안하다, 하나뿐인 목숨을 둘로 쪼개 파들파들 웃어주고 싶었다 눈물보다 체온이 높아진 온몸이 살살 부풀어 올라 허공에 무슨 일이라도 저질 듯

 

  꽃이라도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묘혈墓穴이다 사랑은, 오로지 당신을 뜨겁게 울며 맴돌다 절정을 맞는 모기의 가능성이다

 

 

 

   치약 / 김륭

 

  오늘은 사랑에 빠졌다는 당신의 달콤한 계단이 되어보기로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욕 대신 꽃을 퍼붓는 배고픈 짐승들의 가래침은 튜브에 담아 무릎 다친 골목의 연고로 사용하기로 한다.

 

  물간 고등어 한 마리, 달을 뒤집는 저녁 킁킁 비린내를 칫솔로 사용하는 도둑고양이 발톱 하나 숨겨 치약을 쥐약으로 발음할 수 있는 바닥까지, 사랑은 버리고 빠졌다는 말만 남겨 당신의 뿌리까지 키스를 내려 보내기로 한다.

 

  입 안 가득 퐁퐁을 떨어뜨린 상큼하고 개운한 얼굴들아 안녕 여기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의 숨 막히는 내부, 이미 부패가 시작된 목숨의 복숭아 뼈를 껑충 뛰어오른 입술로부터 푹푹 발이 빠지는 분화구

 

  반짝, 창문이라도 달아낼 듯 치통은 걸어 다니고 머리칼은 자꾸 넘어지는데 까칠해진 턱수염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이나 댕기는 당신의 아랫도리를 어디 한번 꾸-욱 눌러 짜보기로 한다.

 

 

  <시와 반시 2009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