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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규웅 - 시인과 술에 얽힌 이야기들

시치 2009. 4. 4. 00:24

 

시인과 술에 얽힌 이야기들


                                                                                                                                                                            정규웅

 

우리 문단에서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은 시인이 얼마 전 어느 시 잡지에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막말로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고 시인은 뒤이어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마시면 행복하고 깨어날 때의 황폐함, 그 황폐함에 대한 자기 회한과 환멸, 연민, 허무와 함께 하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내 시는 씌어졌다. 나는 시인에게 깨어 있기보다 취해 있기를 권하고 싶다.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시인이 이 말에 공감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의 한 시대를 돌이켜보면 분명해진다.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1970년대는 아마도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의 문인들이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1970년대와 문인, 그리고 술을 이야기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청진동을 중심으로 한 종로 일대다. 해질녘 일을 마치고 그쪽 동네로 가서 어슬렁거리면 어떤 술집에서나 문인들을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1970년대의 10년을 일선 문학기자로 일한 나에게 청진동은 가장 중요한 ‘출입처’였다. 취재원이자 후에 술친구가 된 대다수의 문인들을 그곳에서 만났으니까.
고은 시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분과는 술에 얽힌 일화들도 많이 만들었다.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문학기자로서는 아직 ‘올챙이’였고, 그래서 많은 문인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과제이던 때였다. 어느 날 오후 서너시쯤 취재를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가던 중 광화문에서 우연히 고은 시인과 마주쳤다. 고 시인이 무척 반가워해주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뒤 고 시인이 ‘돈을 좀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호주머니를 털어보니 두 술꾼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돈 몇 푼을 손에 들고 난처해하자 고 시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자, 갑시다.”

고 시인은 내 팔을 잡고 청진동 뒷골목의 어느 허름한 술집으로 끌고 갔다. 나는 좀 불안했지만, 고 시인은 호기롭게 찌개 한 냄비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가격표를 보니 이미 내가 가진 돈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소주를 두 병째 비우자 찌개가 바닥났다. 고 시인은 소주를 더 주문하고 나서 주전자의 물을 모두 냄비에 붓더니 상 위에 있는 김치 나물 등 모든 밑반찬을 냄비 속에 쏟아 넣는 것이었다. 다시 찌개냄비를 끓이기 시작하면서 고 시인은 말했다.
“이쯤 되면 안주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술이나 더 시킵시다.”


이렇게 해서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가 가볍던 시절이니 꽤 효과적인 방법이어서 술집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이 방법을 써먹었다.목탁 대신 바가지를 젓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불경을 외는 고은 시인의 ‘파격적’인 모습을 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청진동에서 고은 시인과 황동규, 김현 등 몇몇 문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의 어떤 문인으로부터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모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일행은 고 시인의 제안에 따라 곧 술자리를 걷어치우고 정릉의 박 선생 댁으로 문상을 갔다. 문상을 끝낸 다음 고 시인의 부탁으로 상청에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양푼이 준비됐고, 물 위에는 엎어진 바가지가 놓였다. 고 시인은 젓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고 시인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아무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이어서 어지간히 취했을 텐데도 고 시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목소리는 청아했다. 평소에 그와 같은 모습을 대할 수 없을 것이고 보면 시인과 술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얼마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고은 시인 외에도 청진동과 시인과 술…… 이런 것들을 연관 지어 생각하면 두 시인이 떠오른다. 한 분은 박재삼 시인, 다른 한 분은 박용래 시인이다. 나는 이 두 분을 주로 청진동의 술집에서만 만났는데 얼른 떠오르는 것은 박재삼 시인의 미소, 그리고 박용래 시인의 눈물이다. 본래 웃음과 눈물은 상반된 이미지지만 이 두 분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질적 순수성, 그리고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감성이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술이라면 무슨 술이든 즐겨 마셨던 박재삼 시인은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사랑과 추억을 이야기했고, 흘러간 옛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유독 고량주를 즐겼던 박용래 시인은 늘 음미하듯 한 모금씩 들이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이분들의 평생 시업은 술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 보이기도 한다.


박재삼 시인은 64세에, 박용래 시인은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기에 이분들의 죽음을 ‘술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술 탓’으로 돌려버리기엔 그분들의 죽음이 너무 아깝다. 물론 술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시인들도 있기는 하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에 고속 질주하던 차량에 떠받혀 목숨을 잃은 김수영 시인과 채광석 시인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것이 단순한 사고였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술 탓’으로 돌려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그들이 술을 지배했을지언정 술이 그들을 지배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술로 인한 불의의 사고였지만 1979년 임홍재 시인의 죽음은 ‘시적詩的’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그로부터 3, 4년 전 그가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하면서부터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임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이인해 시인, 정대구 시인과 동인지 《육성》을 내고 있었는데 나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이인해 시인이 동인들이 모일 때면 나를 꼭 그 자리에 끼워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가을이었던가, 나는 어느 날 이 시인으로부터 임홍재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전화연락을 받았다. 퇴근 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청량리 병원으로 찾아갔다. 동인들이 들려주는 그의 죽음의 모습은 너무나도 시적이었다. 그것은,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이백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임 시인은 그 전날 밤 술에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청량리의 뚝방길을 걷다가 마치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하듯 뚝방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목격자들의 말로는 그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 같기도 했고,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임홍재는 평소에는 말이 없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이 늘 조용한 편이었지만 동인들 가운데서 가장 술을 즐기고 술만 마셨다 하면 열정적으로 변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늘 그가 좌중을 주도했다. 시에 대한 정열도 대단해서 술을 마시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메모지에다 끄적대는 버릇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각인돼 있던 까닭인지 나는 그의 죽음의 모습을 전해 들었을 때,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영혼을 불사를 만한 어떤 ‘시혼’에 휩싸여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술 때문에’ 죽은 시인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두말않고 박정만을 꼽겠지만 만약 박정만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우선 그는 누구보다 술을 사랑했던 시인이었고, 그가 죽기 몇 년 전부터 밥 대신 술로 살게 했던 것은 이 세상이요, 이 사회였기 때문이다. 곧 그는 술의 힘을 빌어 그가 꿈꿨던, 그리고 가고자 했던 영원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그가 죽기 얼마 전 썼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단언하거니와 나는 술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가치를 안다. 그것은 누룩으로부터 발효된 술이 인간을 자연화, 식물화하고 하나의 풀잎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때의 그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한 우리들의 평화, 또는 자유, 또는 사랑.
머지않아 술은 나를 죽음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박정만은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시인이었으나, 1981년 5월의 그 끔찍했던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 이후 하루도 술을 떠나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한두 해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고는 술 마시는 일과 시 쓰는 일뿐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인사동에서 그의 마지막 시화전이 열려 마련된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마시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신기해요. 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술만 마셨다 하면 시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었어요.”


1987년 한 해 동안 박정만은 1천 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최소한 하루에 3병꼴인 셈이다. 빈 소주병을 치우지 않고 조그마한 마당에 늘어놓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피크는 아마도 그 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쓴 기사를 보면 무더위가 한창이던 20여 일 동안 소주만 1백 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백여 편의 시를 썼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박정만에게 있어서 술이란 시를 나오게 하는 어떤 묘약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만의 술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박정만이 죽은 지 약 5개월 후인 늦겨울의 어느 날 새벽 낙원동의 허름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 시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맥주 한 병쯤이 정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형도 역시 술만 마셨다 하면 변화가 빨리 온다. 평소에는 늘 어둡고 쓸쓸하고 어딘가 공허한 표정이지만 술만 들어가면 얼굴이 밝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면 서슴없이 뛰어난 솜씨로 노래를 불러제치곤 했다. 남보다 10분의 1의 술을 마시고도 10배의 효과를 낸 셈이었으니 ‘경제적인’ 술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박정만 말년의 좋은 시들은 모두 술의 힘을 빌어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박정만을 죽게 한 것은 술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술 때문에 죽었다고 보는 시인은 박정만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만 하더라도 김관식, 조지훈 시인을 비롯해서 천상병, 조태일, 김광협 같은 시인들도 모두 술 때문에 수壽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술의 속성상 술을 마시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주량이 다르고 술버릇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술로 인해서 받는 영향 또한 저마다 다를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똑같은 조건에서 같은 양의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술은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많이 마시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술을 마시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일찍이 주성酒聖으로 통하던 조지훈 시인이 술꾼의 단수段數를 바둑처럼 18단계로 나누어 내로라하는 술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급을 매겼던 것도 그 까닭이다. 주량으로 따지면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후배 시인 김관식의 뺨을 올려붙이며 겨우 ‘3단’을 부여했던 것도 김 시인의 고약한 술버릇이 주도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술만 마셨다 하면 대선배에게도 ‘군’ ‘자네’의 호칭을 마구 썼던 김 시인도 조 시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일갈을 경청하고 있었다니, 주량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주성’을 알아보는 실력만으로도 3단은 좀 약소한 단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지훈 시인은 낙주종생樂酒終生한 사람, 곧 술을 즐기다가 삶을 마감한 사람에게 최고 단수인 9단을 부여했는데, 시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직장의 책상 서랍에 항상 술병을 넣어두고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꺼내 마셨던 김광협 시인. 그가 죽었을 때 ‘바커스 주신酒神이 심심해서 불러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즐겼던 조태일 시인.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돈을 달라고 해 돈을 손에 쥐면 무조건 술집으로 달려가곤 했던 천상병 시인… 만약 조지훈 시인이 생존해 있다면 당연히 이들에게 9단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조태일 시인은 생전에 ‘나는 천상병 시인에게 술을 얻어 마신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곤 했는데 그렇다면 조 시인이 천 시인보다  단수가 높다고 봐야 할는지.


이제까지 언급한 시인들 외에도 시인 가운데서 술꾼을 꼽으려면 얼마든지 더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 이래로 시인과 술은 어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돼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오래 전에 어떤 잡지에서 술을 즐기는 각계 명사들에게 우리 역사상 주선酒仙으로 꼽을 만한 술꾼들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이를 통계로 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10위 안에 든 사람들의 대부분이 시인이었다.


1위가 조선조 중기의 기생 황진이, 2위가 변영로 시인, 3위가 조지훈 시인, 4위가 조선조 말기의 김삿갓, 5위가 조선조 중기의 김시습, 6위가 조선조 중기의 임제, 7위가 소설가 김동리로 모두 시인이거나 시를 썼던 사람들이었다(이밖에 임꺽정, 대원군, 원효대사가 각각 8, 9, 10위를 차지했다). 통계나 순위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옛날부터 시인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돼 있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정규웅  1941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저서 『휴게실의 문학』 『오늘의 문학현장』 『글동네 사람들』 등. 소설 『그림자 놀이』 『피의 연대기』 등이 있음.

출처 : 碧 空 無 限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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