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사랑시

[스크랩]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3]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 성

시치 2008. 11. 12. 23:48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3]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 성 우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 일러스트=클로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울고 있는 사람… 나를 울리는 사람…
장석남·시인·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헤어짐의 눈물을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 내 몸 안에서도 잠들었던 울음소리가 깨어난다.
어깨 들썩이며 숨죽여 우는 소리.
그녀의 어깨, 얼굴에 어른대는 두 줄기 불빛,
빈 방에 들어가 문 걸고 서둘러 이불 속에 들어 토해내던 통곡.
 
헤어짐이 아픈 것은 이별을 해도 사랑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했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울고 있는 사람이 되고,
나를 울리는 사람이 된다.

두 사람에게는 지금 나란히 걸었던 길이 보인다.
함께 보았던 영화 장면이, 자취방에 두고 간, 오랜 시간 걸려 만든 손뜨개 목도리가 떠오른다.
죽음까지 함께 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사랑한다는 말도 아낄 수밖에 없던 시간들도 떠오른다.
 
 언 손을 녹여주던 그 저녁이 바로 오늘같이 쌀쌀한 날이었을 때 뒤척임은 한이 없다.
사랑의 기억이 달콤한 것은 잠 못 이루게 하는 설레임 때문이지만, 그것이 쓰디쓴 것도 바로 그 사랑이 남기는 기억 때문이다.

박성우(37) 시인에게는 사랑이 지나간 뒤의 아픔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초승달〉)처럼 이별은 오그리고 청하는 잠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튀어 나가는 것이 있으니, 그만 베개에 떨어지는 그 물별(눈물)은 얼마나 가련한 아름다움인가.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어느 애벌레가 뚫고 나갔을까/ 이 밤에 유일한 저 탈출구//'(〈보름달〉)라 하면서도 이내 '함께 빠져나갈 그대 뵈지' 않음이 안타깝다.
그저 보름달에 희미한 제 그림자만 오래도록 바라보았으리라.
 
모든 시는 이처럼 근원적으로 '서러운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 아니고서 무엇을 시로 쓸 수 있을까.
또한 시 아니고서 무엇으로 사랑의 '물별'을 반짝이게 할 수 있을까.
청년기의 사랑은 그 무모함 때문에 절절하고, 그 순정함 때문에 눈물 난다.

박성우 시인은 '조용한 배려와 연민'의 시인이다.
시골에서 조용히 시를 쓰기 때문인지 그의 사랑시들은 자연에서 오는 열락에 대해 사랑의 형식으로 화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는 것을 반복하는 것 또한 '매운' 고추씨 같은 사랑의 기억 때문이 아니겠는가.

입력 : 2008.11.10 23:01
 
 
 
 

박성우 시인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현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 홍보팀장
전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 
2002년 시집 <거미>(창비) 발행 
 
 
 
 
 
박성우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동시

 

▲ 미역 / 박성우
 
 
엄마가 마른 미역을
그릇에 담는 모습
지켜 본 뒤에야 알았어.
바짝 마른 미역,
발등에 물이 닿기만 해도
바다 속에서 살랑살랑 놀던
자신의 푸른 옛 모습,
고스란히 기억 해 내고
풀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말랐던 제 몸을
더듬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마른 줄기 안에 바다를
꼭꼭 숨겨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엄마가 몇 번이고
맑은 물에 미역을 헹구어 내도
바다 냄새를 풍기는 푸른 미역이
내 생일을 풀어내고 있었어.

 

 

 

 

콩나물

 

     박성우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김일무선 / 박성우


처음엔 통신기기를 취급하는 가게인 줄 알았다
페인트 글씨 흐릿하게 간판이 걸린 김일무선,
나중에야 동네전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짐자전거가 받쳐지고
알루미늄섀시 미닫이문이 스륵 스르륵,
가게 앞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라디오가 나왔다
여름 한낮 더위를 참다 참다
김일무선으로 중고 선풍기를 사러 갔다
한 평 남짓한 가게에 앉아
티브이를 수리하고 있던 늙은 주인은
틀어놓고 있던 선풍기, 코드를 뽑아들더니
그것 외에는 다 팔려서 딴 건 없다고 했다
어쩌다 고개를 못 가눌 뿐
아직은 쓸만한 거라면서 한사코 내밀었다
어르신은 어떡할라구요 알아서 헐 팅게 가져가
회전을 누르면, 빠개져 금간 뒷목이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선풍기
허나, 일단 이단 삼단 바람세기에 맞춰
철썩철썩 파도소리가 나오고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도 나왔다
트로트 메들리가 나오기도 하고
겨울바람 소리가 쌩쌩 나오기도 했다
머리맡에 라디오 켜듯 선풍기 틀고 엎드려
왜 하필 김일무선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육칠십 년대에는 제법 근사하기도 했겠지?
어림짐작으로 주파수를 맞춰보면서 나는
서른다섯 내 나이 무렵의
김일씨에게 전파를 날려보았다
치익 치지직 치직 운이 좋게도 답신이 왔다
시를 쓰다가 그냥저냥 늙은 나는
서른다섯을 건너는 가전제품수리공 김일씨와
무선으로 교신을 나누며 찜통더위를 식혔다

출처 : 迎瑞堂
글쓴이 : 素夏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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