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해도 나보다 김충규시인이 먼저 ‘우체국 계단’이란 시를 썼으리라. 나는 ‘우체국 계단에 앉아’라는 시를 써서 발표한 직후에 나의 작품 ‘우체국 계단에 앉아’와 유사한 제목의 시 ‘우체국 계단’을 읽게 되었다. 처음엔 조금 가슴이 뛰었고 황당하기도 했다. 누가 누구 마음을 베꼈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물론 아래의 시편은 시 잘 쓰는 김충규시인이나 말석을 지키는 나도 이미 지면에 발표한 지 꽤 되었고, 두 편 다 개인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충규의 ‘우체국 계단’은 그의 시집『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2003년 문학동네 간. 나의 시 ‘우체국 계단에 앉아’는『슬픈 농담』2004년 문학의 전당 간)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남의 생각이나 글을 훔칠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습작초기 작품들을 보면 어딘지 모를 누군가의 이미지를 도용한 듯한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이리라. 그러나 단어나 문장을 베끼는 것은 생각을 베끼는 것과 엄격히 다르다.
이 두 편의 시를 보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우체국 계단'을 놓고 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처음 나는 비슷한 제목을 보고 놀랐지만 내용을 읽고 난 후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가 ‘우체국 계단에 앉아’라는 시를 쓰기 전에 김충규의 '우체국 계단'을 읽었다면 제목이나 내용에서 조금은 더 의식적으로 피해갔으리라. 헌데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시를 발표하기 전에 결단코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물론 이건 절대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작품을 구상하기 전 보다 많은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작가로써의 직무유기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거. 모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방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우직한 인간미를 가진 김충규시인을 알고 있고, 더욱이 나의 네 번째 시집 『슬픈 농담』은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찍었지만 한 번도 사석에서 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다. 그 모든 변병은 시인의 입으로 설명하기보다 작품이 말해줄 거니까.
가을을 깊게 하려는 듯 모처럼 비가 온다. 오늘은 우체국에 가야겠다. 비에 젖을 것을 염려해 큼지막한 우산 아래 소포꾸러미 하나, 부칠 편지 한 통쯤 가슴에 품고 베고니아 핀 우체국계단 안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체국 계단에 앉아 그에게 엽서를 쓴 적이 언제 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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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계단 /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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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계단에 앉아 / 김인자
화사한 봄날
오래된 통장을 정리하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언제부터 제비그림의 인주빛 우체국이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부치러 가는 게 아니라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러 가는 곳이 되었을까
낡은 통장을 창구에 들이밀다가
나는 문득 삶이 쓸쓸해져서
우체국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누런 포장지에 싼 소포와 항공편지를
어디론가 부치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그동안 받기만 하여서
부치는 것을 잊어버린 먼 그리움으로 목이 말라
수첩을 꺼내 주소를 찾아보지만
내 낡은 수첩은 어느새
많은 이름들을 지우고 있었다
팬지꽃이 노랗게 웃고 있는
우체국 계단에 서서
미국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는
이제는 희미해진 이름들을 떠올리며
몇 장의 엽서를 손에 쥔 나는
살아있는 한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이름들을 다시 찾은 반가움으로
우체국 계단을 내려선다
봄바람이 아니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할
내 기억의 소중한 이름들을
출처 : 마음산책
글쓴이 : 디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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