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읽기

바위의 이끼는 늙지 않았다-이어령

시치 2021. 12. 9. 08:38

바위의 이끼는 늙지 않았다

      이어령(전 이화여대 교수·전 문화부장관)

 



   사람들의 인상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동물, 식물, 광물…. 그런데 한승헌 변호사의 첫인상,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보아온 한 변호사의 이미지는 광물성이다. 몸이 깐깐하게 말라 있다는 그만한 이유에서 차돌과 같은 돌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돌이 아니라 전통 산수화에 나오는 것 같은 바위, 그러면서도 파랗게 이끼가 낀 그런 돌인 것이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라 ‘바위와 이끼’라는 말로밖에는 한 변호사의 품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겉으로는 늘 푸르고 부드러운 이끼가 돋아 있다. 그것이 한 변호사 특유의 휴머니즘이다.
   한 변호사는 만나면 늘 농담을 한다. 입술에는 막 흙장난을 하다 일어선 아이처럼 웃음이 감돌고 있다. 사람을 정면에다 대고 싫은 소리 하거나 면박을 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식물성 온정이나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이끼가 돌에 붙어 있을 때만이 비로소 이끼답듯이 한 변호사의 그 온화함은 강인한 의지와 정의감 같은 견고성 위에서만 생명력을 지닌다. 이를테면 어려운 자나 약자를 그냥 동정하고 가슴아파하는 인정에서 끝나지 않고 그는 그들을 돕고 때로는 자신의 몸을 던져 방패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바람이 불면 나부낀다. 그러나 한 변호사는 광물질이기 때문에 부서질지언정 요동하지 않는다. 부정이나 불의 앞에서 그 확고하고 엄격한 자세로 대결하는 모습은 흡사 단애(斷崖)에 버티고 선 천년의 바위다.
   이끼는 그를 시인으로 만들고 돌은 그를 법을 위해 투쟁하는 변호사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복합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필화사건이 날 때마다 앞장에 나서 팔을 걷어붙이는 경우다.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과 정의의 법을 지키려는 이성이 한데 어우러졌을 때만이 그런 재판이 가능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소설가 남정현 씨가 〈분지(糞地)〉사건으로 재판받을 때 나는 한 변호사의 청으로 감정증인으로 증인석에 앉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한승헌 변호사의 해박한 문학에 대한 지식도 아니요, 조금도 굽히지 않고 검사와 대결하는 그 꿋꿋한 자세도 아니다.
   검사가 증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반공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지〉를 읽고 누구나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증인은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떠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검사는 증인의 사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창을 내 쪽으로 돌렸다. 증인이 아니라 내 자신이 피고로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병풍에 그린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보고 놀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소설이 아니라 진짜 현실에서 일어난 신문기사처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 놀랐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반공정신의 유무가 아니라 예술적 감성 유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검사는 북한에서 이 소설을 이용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될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장미에게 뿌리가 있는 것은 자신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이지 담배 파이프가 되어 사교계 신사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법정에서 나오는 나를 바라보던 한 변호사의 표정이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검사의 얼굴을 바라다보던 그의 얼굴은 매섭고 당당하고 순교자의 그것처럼 의연하였는데,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꼭 돈이라도 꾸러 온 사람처럼 멋쩍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공연히 친구를 증인석에 앉혔다가 모멸을 당하게 한 것이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표정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닥치는 수난에 대해서는 바위와도 같았지만 남이 겪는 고통이나 불행에 대해서는 가녀린 이끼였다.

   한 변호사가 정치적인 이유로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늘 문인의 필화사건을 맡아 애쓰던 한 변호사 자신이 필화로 피고석에 앉게 되고, 나는 거꾸로 변호사를 변론해야 하는 감정증인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찰 측은 한 변호사가 쓴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가 당시 간첩으로 사형집행을 당한 아무개 씨를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데 초점을 두고 그 방향으로 증인신문을 해 나갔다. 문장상으로 볼 때 ‘어느’라고 했을 경우 그것은 구체적인 인물을 지칭한 것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막연히 일반인을 지칭한 것으로 봐야 하느냐를 ‘예, 아니오’로만 간단히 답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사학적 문제이므로 간단히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의 노래 제목에 〈어느 소년 병사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때의 ‘어느’는 이미지를 개별화하여 그 효과를 강하게 하기 위한 수사학적 효과일 뿐 구체적으로 특정한 소년 병사를 지칭하기 위한 용법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그 소년 병사가 과연 누구냐 하는 궁금증을 품거나 또는 굳이 그것을 풀이하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일기장에 ‘어느 남학생이 꽃을 주었다’라고 썼다면 그 ‘어느’는 특정인을 지칭한 것으로, 비밀을 위해 복자(伏字)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용문인가 예술문인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자 검사가 화를 냈다.
   “그러니까 한 변호사의 글은 예술문 쪽에 속한다는 겁니까?”
   치열한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필자가 주장하려고 한 것은 어느 특정한 사형수를 옹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형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 것임을 여러 문예를 인용하여 밝혀 나갔다.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경우처럼 여기에 묘사된 한 사형수는 단지 사형제도의 일반 원리를 밝히는 계기를 준 특정한 사과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에 가서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증인은 피고와 친밀한 사이로 알고 있으며 또 피고 자신이 시를 쓰는 시인이므로 같은 문인 입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말한 증언 내용이 한 변호사와의 친분과 같은 문인의 동류의식에서 나온 발언이 되고 만다면 증언의 신빙성과 객관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말에 대해 발언을 자청하여 이렇게 끝을 맺었다.
   “신성한 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그것처럼 글을 쓰는 문인과 비평가에게도 지켜야 할 법이 있고 집행해야 할 율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법이요 문장법이요 수사법이라는 법이요 운율이라는 율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그 문장법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글에 법이 없다면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함부로 읽혀진다면 글의 세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나는 이곳에서 바로 그 법을 말했을 뿐입니다.”


   남정현 씨의 재판 때처럼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 변호사의 눈빛은 미안함과 걱정에 가득차 있었다. 자신보다 그런 증언들이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재판 때 변호인단으로부터 증인 명단에서 나를 빼겠다는 전화 통고가 있었다. 한사코 출석하겠다고 했더니 한 변호사의 간곡한 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교수 재임용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비상조치법에 따라 보안법을 위반한 사람을 옹호하는 사람도 법에 걸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 변호사는 자신보다 오히려 내 일을 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불의 앞에서는 단단한 바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우정이든 무엇이든 정 앞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푸른 이끼가 된다. 아무리 가뭄에 말라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도 물을 주기만 하면 다시 피어나는 이끼, 바위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신비한 이끼다. 그 바위 위에서 피어나는 생명에 무슨 나이가 있겠는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도 바위처럼 이끼는 천년을 누리고 만년을 산다.

  칠전팔기의 삶을 살아온 한 변호사

 

   한 변호사 화갑기념문집에 쓴 글 말미에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도 이끼는 바위처럼 천년을 누리고 만년을 살 거라고 했는데, 내 생각대로 한 변호사는 단단한 바위처럼 꿋꿋이 미수(米壽)를 맞았다. 그의 삶을 다시 돌아보니, 그는 검사요 변호사요 인권운동가요 문필가요 교수요 지식인이요 고위공무원으로 다양한 삶의 모범을 보여 준 진정한 칠전팔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부정이나 불의 앞에서 확고하고 엄격한 자세로 대결하는, 흡사 단애(斷崖)에 버티고 선 천년의 바위 같은 모습을 지켜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한 변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건만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해 핍박받으며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 아니 넘어질 것을 미리 알고 뛰어들었다. 넘어지고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장래를 미리 예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다가 어느 순간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변호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장차 어떤 고난을 가져올지 ‘미리 알면서’도 그 일에 뛰어들었고, 예상대로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럼에도 변치 않는 신념을 가지고 그 일을 계속함으로써 반복된 고난의 삶을 살아온 매우 특이한 사례다.


   누구나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불타는 신념과 용기, 고난을 감내할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한 변호사의 ‘칠전팔기적’ 삶은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며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촌음(寸陰)을 아껴 쓰는 한 변호사의 또 하나의 업적이 있다. 그가 옥중에서 고통받을 때, 나는 평소 그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부지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저작권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올 것이니 힘들지만 옥중에서 저작권법을 연구할 것을 권유하였다. 지식인의 지적재산권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 저작권은 법률가요 문필가인 그가 꼭 해야 할 연구과제였던 것이다. 그 후 한 변호사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최고권위자가 되었고, 당시 정착되지 못했던 그 분야의 법제와 실무 체계를 확립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한 변호사의 《저작권의 법제와 실무》, 《정보화시대의 저작권》 등은 명저로 남아 있다.


   또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디지로그(digital+analog) 이론의 탄생 배경이다. 디지로그는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된 첨단기술을 의미하는 합성어인데, 십수 년 전 나는 디지털 기술 제품이나 서비스를 아날로그로 보완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이 생겨날 것이고, 디지털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21세기를 지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내 컴퓨터 시스템을 전문가 수준으로 구축해 주고 프로그램 운영과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한 변호사의 장남 한규면 씨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디지로그가 탄생하기까지 꽤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시장에서도 디지털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아날로그가 존중되고 풍부해져야 하며, 가장 좋은 디지털이란 감성적이고 따뜻하며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나의 디지로그 이론이 정보화 시대를 여는 핵심 키가 되고 있기에, 특별히 한규면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역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간 아버지와 아들이기에 더욱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끝으로 미수를 맞이한 한 변호사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려 한다. 나는 그보다 일 년 먼저 미수를 지냈고, 건강도 안 좋아졌다. 한 변호사도 예전 같진 않겠지만, 평생 동지로 살아온 정리(情理)를 봐서 건강만은 내 뒤를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詩)도 계속 써서 한승헌만의 시세계를 보여 주길 기대한다. 그러자면 건강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마시라. 물만 주면 바위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푸르른 이끼처럼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시길 바란다.              (*)

 

 

       ⸺산민 한승헌 변호사 미수 기념문집 『山民의 이름으로』 2021년 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