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사랑시

[스크랩]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6] 혼자 가는 먼 집 - 허 수 경

시치 2008. 11. 16. 14:16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6]
 
혼자 가는 먼 집
허 수 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일러스트=이상진
 
 
 
당신을 부르는 것이 또 한번의 상처임을…
김선우·시인
 
 
 
 


Tedium of journey
 
 
 
 
이 시는 허수경(44) 두 번째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시이다.
이 읊조림을 시라 불러도 좋고 구음(口音)이라 해도 좋다.
웅얼웅얼, 중얼중얼, 킥킥……. 뭐라 불러도 좋은데 결국은 시가 될 수밖에 없는 읊조림이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삶.
삶이 상처임을 일찍 알아버린 이에게 독기와 연민은 삶을 견디는 한 방법이니,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당신을 부르는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을 호명하는 것이 또 한 번의 상처임을.
 
그런데도 부른다.
킥킥, 가엾이 여기며 부른다.
이것은 일종의 동종요법. 상처를 상처로 견뎌가는 참혹한 치유 요법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참혹만이 아니라 생이 몽땅 상처인 것이어서
이 참혹함을 피해 볼 손바닥 만한 그늘도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나도 혼자 가고,
당신도 혼자 가고,
먼 집도 영영 혼자 가는 것임을.

1988년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허수경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처음 읽던 내 나이 스무 살.
〈폐병쟁이 내 사내〉라는 시를 읽던 기억이 난다.
시집 표지에 실린 앳된 여고생 같은 얼굴의 여자가 이런 시를 쓴 게 오싹할 정도였다.
 
샤먼의 신명처럼 간곡하고 치렁치렁한 리듬으로 가득하던 첫 시집.
그 이후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보낼 때마다 허수경의 노래법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안쓰러운 세상과 당신이 아파서 자기도 아픈 허수경의 비통함은 아주 넓은 진폭으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확장하며 공명한다.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은 두 번째 시집을 낸 직후 돌연 독일로 갔다.
지인들은 그가 곧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는 15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있다.
그간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대동방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천생연분이라 할 독일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다.
 
발굴 작업을 위해 일 년의 절반 정도를 모래 서걱이는 터키나 이집트의 변방에 가 있고, 새벽이면 모국어로 시를 쓴다.
지인에게 들으니 집 뒤란에 텃밭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수한 씨를 뿌려 상추며 쑥갓 등을 직접 길러 먹는단다.
음식 솜씨 좋기로 유명한 그의 손이 이국에서 김치를 담그고 각종 국을 끓이는 것을 상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슬퍼서가 아니라 먹먹해서. 당신도 잘 견디고 있구나, 싶어서.
그녀가 진주 남강 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그녀는 모래도시와도 퍽 잘 어울린다.

지구 위 어디든 '혼자 가는 먼 집'이니,
참혹한 절망을 통해 어떤 희망을 볼 수 있는지는 킥킥, 온전히 당신 몫이다.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울고 있는 가수〉 부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파이팅!

입력 : 2008.11.13 22:59
 
 
 
 
 
 

[애송시 100-31]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정끝별·시인

 

입력 : 2008.02.11 00:21 / 수정 : 2008.02.11 10:25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경상대 국문과 졸업하였다.

<실천문학>에 <땡볕>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하였고

1988년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간행.

1992년 두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간행하였다.

 

그해 독일로 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선사고고학을 공부하고,

현재 뮌스터대학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에 있다.

출처 : 迎瑞堂
글쓴이 : 素夏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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