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손순미 시 모음

시치 2008. 11. 4. 21:38

곰소 염전

빛의 긴 손가락이
쩍쩍, 몸을 찌르는 땡볕  
막막한 저 소금의 섬
무섭게 조용한 염전 속으로  
건너 편 풍경이 속속 이사를 든다
수묵화 한 폭이 완성되었다
피안의 그 풍경 어디쯤
만개한 도원이 있겠지
갈 수 없는 그 곳
늙은 염부가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허물며
한 됫박, 두 됫박
검은 수레 가득 사리를 수습하고 있다
저녁이 덜컹,
관 뚜껑을 열 때까지


소가죽 구두

늙은 소의 발을 굽는다
늙은 아버지의 발을 굽는다
토막난 아버지의 발을 잡고
아버지의 삶을 다듬기 시작한다
검은 육질에서 기름이 돌기 시작한다
탕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 평생의 켤레,
아버지 고통의 부위가 누릿하게 익어간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지나친 광택을 낸다
아버지 평생의 車, 아버지 구두가
모처럼 호사를 한다
반짝! 아버지의 영광은 짧았다
사람의 발을 한 짐승이, 짐승의 발을 한 사람이
아버지를 짓밞았다
그렇게, 칠십 평생 찍어온 아버지의 낙관 落款은 불발이었다
윤을 낸 구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평생 바닥이었던 아버지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신다
한밤중 
구두의 울음이 구성지게 들린다
아버지가 구두를 타러 오신 것일까


칸나


찬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배가 아프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한 벌의 양복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라

석쇠 위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저 햇살 한 장 깔아놓고
생선 한 마리 굽고 싶다
저녁의 식탁을 떠올리며 낡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보면 상인들은 훌훌 식은 수제비를 삼키는 중이다
그들이 제 몸뚱이를 챙기는 유일한 행동은 허기를 때우는 일이다
야채들은 그들의 자존심처럼 시퍼렇게 살아있다   
허겁지겁 사고 팔고, 사고 팔고를 되풀이 하는 이 판매의 공화국에
저녁이 구워진 생선처럼 온다
알고보면 이 세상의 질서는 사고 팔고에 있는 것이다  
나란 사람도 잉여가치를 꿈꾸며  
갈치 고등어 사열대를 비집고 누워볼까 누구의 주검이 최대한 싱싱한가
이 놈은 제대로 죽지 못했군, 조문객이 된 손님들은 주검을 관람하며 
이리저리 주검을 뒤진다
주검의 시즙이 아찔한 향기를 뿜어낸다
곧 완벽한 식사가 준비될 것이다
갈치가 익어가고  고등어가 익어간다
우리는 달디 단 죽음의 뒷맛이 얼마나 무서운 행복인지 알고 있다 


고등어 파는 사내

  저, 소금을 칠까요? 내가 지그시 눈을 감아주자 남자의 눈이 고등어
눈처럼 우울하게 빛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남자의 손등을 물결쳐
나갔다.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끔직한 추억이, 집 나간 아내를 향해
고등어 푸른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친다.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남자는 노련한 검객이다. 순간, 고등어 영혼이 바다로 건너가는 소리를
빗소리가 삼켰을 것이다.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철철, 눈부신 소금을 뿌렸다. 잠깐 동안 메밀
꽃이 피는가 했다. 검은 봉지를 받아들자 사내의 생애가 훅, 풍겨 나왔
다. 바다는 하늘에 떠 있고 빗물은 소금처럼 짜다. 사내와 비 사이에
서 있는 어둠이 무겁다. 우우 어둠의 무게가 버거워  비는  다시 한 번
난전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비의 파편을 피해 처마 밑에 어둠처럼 깃든
사람들. 그때, 무기력한 눈을 미안하게 켜는 알전구가 어둠을 지워가는
시각.


페인트공

 그의 거주지는 늘 허공이었다 그는 종일 허공의 벽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허공에서만 전시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 허공을 정원이라 여기며 그
에게 팽팽한 밧줄을 던졌다 그의 정원은 위작이거나 모작이었다 그의 부리가 닿
을 때마다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 붉어졌다 정원은 완전한 봄이 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이 완성된 정원을 보고 박수를 쳤다 허공에 태어난 정원은  잎이 지지 않
고 꽃이 시들지 않는 지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동해남부선

모든 것이 발열하는 청춘이었다
벌겋게 달궈진 석쇠 위를
고등어 같은 열차를 타고 달려갔다
창문으로 바다가 상영될 때마다 
우리들에게 엎드리는 세상이 보였다
비린내가 푹푹 나던 시절이었다
웃고 떠드는 것만이 청춘이었다
그것이 아픔의 변증법이란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노곤한 햇볕을 수혈 받으며
놀다가 졸다가
바람이 칸나무덤을 맴도는 사이 
고등어 붉은 칸을 열고  
한 마리의 그가 뛰어내렸다
미친 듯이 날뛰는 청춘의 완성은 요절이었다



비의 검객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저 거리에 저 건물에 활보한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자의 지붕에
불행한 자의 가슴에 더욱 세차게
무수한 칼날을 꽂는 것이다
바람의 도포를 입은 비의 검객이 기승을 부린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가로등을 쓰러뜨리고
거친 호흡의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모두가 그 비를 피해 문단속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길한 행복을 조립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지짐이라도 부쳐먹자
고양이와 개들도 후미진 구석에서 가끔 밖을 내다볼 뿐이다
그래도 저 비를 뚫고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들은
비의 공포보다 두려운 삶의 협박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과다하게 행복을 부풀리며 그들은 빗속을 뚫고 간다
비가 그쳤다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쓰러진 자리에 눈물이 흥건하다
실체도 없이 우리를 위협하던 그것이
그저 눈물에 지나지 않는 그것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콸콸 울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다
밤새도록 하수구에서 비의 울음을 들었다



시월驛


지네처럼 스르륵 기차가 오네
수수밭머리 새떼들 북천(北天)의 바다를 저어가고
벤치의 늙은이 지친 얼굴에 수고했다 수고했다
석양이 햇빛연고를 따뜻하게 발라주는 가을
당신은 보이지 않고 우물쭈물 안경을 떨어뜨리는 사이
기차는 떠났네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것이다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는 망상의 정거장
나는 그 적막을 지근지근 밟으며 무슨 슬픈 꿈처럼
역사(驛舍)를 떠나지 못하네

멀리 천일홍 언덕 너머 안적사 종소리 수풀의 벌레들을 울리고
저녁은 밭가의 농부를 말 없이 데리고 가네 모든 것을 버리게 하네
나는 전생의 길섶에 두고 온 것이 많았던가
무엇이든 보내지 못하네
나무들 하나씩 잎을 떨어뜨리네
저녁은 무엇이든 보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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