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스님의 서장 대 강좌

[스크랩] 무비스님 서장 대 강좌 제 10-3 강

시치 2008. 4. 9. 00:38

 

 

              서장 대 강좌 10강 - 3

 


  오늘 종강 기념으로 제가 아주 존경하는 영명연수선사의 “보살계를 받는 길”이라고 하는 책을 선물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합니다.

뒷면에 보면, 탐욕이 곧 道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는 소리라면 여러분들이 ‘어디서 마구니가 와서 저런 소리한다.’고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아미타불의 後身이라고 하는 영명연수선사의 말씀입니다. 또 그것도 이 안에 본문에 보면, 諸法無行經(제법무행경)이라고 하는 경전의 말씀을 빌어서 영명연수선사가 하신 겁니다. 부처님경전에는 말씀을 영명연수선사 같은 뛰어난 안목을 갖춘 이가 그것을 인용해서 “보살계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제법무행경 내용을 여기 상당히 장황하게 인용을 했습니다.


  어느 절에 어떤 비구와 법사가 살았습니다.

법사라고 해서 비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주 고집불통 비구가 있었고, 아주 대승적인 삶을 사는 법사가 있었습니다. 법사는 자기가 늘 중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친다고 시중에 나가서 설법도 하고, 포교도 하고, 신도들도 만났습니다. 자신만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늘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구가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절대 산문 출입도 하지 말고, 세상이 돌아가는 어떤 것도 보면 안 되고 들으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수행인 줄로 아는 비구입니다.

그래서 비구가 공사를 붙였어요. 목탁을 쳐서 대중들을 다 모았습니다.

어떤 법사가 교화한다고 하면서 계속 시중에 들락날락 하고,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시중에 들락날락 하면서 온갖 볼 것 안볼 것 다 보고 다니고, 이것이 수행이라고 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엄명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사가 있다가 “내가 스님을 위해서 아주 뛰어난 게송을 하나, 법문 한 마디를 일러 줄 텐데 이 법문을 들으면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고, 당신이 아는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비방할 겁니다.

비방을 많이 해서 비방을 하는 인연으로 지옥에 갈 겁니다. 하지만, 지옥에 가더라도 내가 일러주는 그 고차원적인 아주 차원 높은 훌륭한 대승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지옥에 갔다가 얼른 나와서...” 그러니까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는 것이지요. 세상 이치와 똑 같은 겁니다.


  “당신은 나보다도 어쩌면 더 빨리 성불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입니다. 좀 과장된 표현을 하면. 과장된 표현도 아니지요.

지금 거의 비슷하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게송을 하나 일러주는데, 바로 이겁니다. 탐욕이 곧 道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구는 그냥 펄쩍펄쩍 뛰는 겁니다. 탐욕은 버려야 하는 것이고, 진심과 어리석음도 제거해야 하고, 오매불망 버려야 하는 그것이 우리의 적 인데, 그것이 도라니 도대체 이것이 마구니도 보통 마구니가 아니고 이것은 외도다. ←이래 가지고 그냥 입에 거품을 물고 비방을 막 하고, 그냥 비방을 해도 보통 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들, 기존의 불교공부는 그렇게 알았지요?

탐 · 진 · 치. 삼독 내지 108번뇌. 8만4천 번뇌는 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수천수만 곳에서 불교 강의를 하고 있는데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영명연수선사가 제법무행경에서 인용하기를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쳤고, 또 영명연수선사의 마음에 아주 맞아서 그것을 여기에 소개를 했고, 저도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국은 이 책을 번역하고 해석을 하게까지 이르러서 오늘 여러분들께 법공양을 올리게 되었는데요.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불교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기존의 불교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여기에 “와!”라고 하는 이것이 뭐냐?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다.

平常心(평상심)이 是道(시도)다.

일체법도 탐 진 치 삼독 8만4천 번뇌요. 평상심이 탐 진 치. 삼독과 우리가 늘 화내고 울고불고 하는 이것이 평상심이다 하니까 그냥 간단하게 해결 되는 것을 가지고 정말 그것을 알기 전에는 저는 평상심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평상심이 공한 마음인가? 참 마음인가? 뭔가?

그것은 공한 마음이다. 참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다.

진여다. 불성이다. ←이렇게 해 봐야 그것은 名字일 뿐입니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법무행경에 이 말씀을 보고는 야~ 영명연수선사는 정말 훌륭한 선지식이고 그 말이 진짜 맞다.

평상심이 바로 탐 진 치 삼독 부리는 것이 우리의 평상심이라고요. 그것 외에 평상심이 무엇이 있습니까?

또 그것 외에 우리들에게 일체법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 외에 우리들에게 일체법이 없습니다.

평상심도 그것입니다. 우리 평상심도 그것 아닙니까?

좋은 것 보면 갖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마음에 안 들면 화나는 것이 평상심이지요.

내 잘못한 것을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남 잘못한 들추어내어 꼬집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우리 일상이 계속 그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평상심이라고요. 그것이 도입니다.

그런 것을 더 이상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없앤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탐 진 치 삼독 없앤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불교공부 4~50년 한분들도 있지요?

만약에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한 반쯤은 없어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다는 안 없어졌다 하더라도 한 반은 없어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아니, 한 10분의 1은 없어졌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그대로잖아요. 그대로.

저만 그대로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보니까 선배. 선배. 대선배. 훌륭한 분의 구체적인 이름을 들지 못해서 그렇지 면밀히 보아 왔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소개할 때 禪房(선방)을 다니면서 會衆(회중)을 가지고 있는 선지식은 제가 다 가서 한 철씩 두 철씩 살았다는 표현을 했는데, 똑 같습니다.

 

  왜 똑 같으냐? 그것이 평상심이기 때문에 똑 같은 겁니다. 그것이 도이기 때문에 똑 같은 겁니다. 단 특수한 분들이 몇 분 있다면, 그것은 그 분들이 탐욕 부리는 방향이 달라요. 중생을 많이 제도하고 싶은 그 탐욕이. 돈 많이 벌고 싶은 그 탐욕. 그것이 약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해도 좋고요.

그럼 돈 버는 것은 탐욕이고, 중생제도는 탐욕이 아니라고 해서 설득이 되겠습니까? 다 원력이면 똑 같이 원력입니다.

돈 벌어서 세상에 많이 기여 하고 싶은 것도 원력이지요. 중생제도만 원력인가요? 그것이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탐욕 버리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마십시오.


  절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림살이입니다. 평생 가져갑니다. 평생 가져가더라고요.

저만 가져가는가? 했더니 우리 선배. 선배. 대선배들도 다 평생 가져갑니다. 그래서 이 선불교는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불교의 완성이다.

불교는 최소한도 이 시대에 있어서는 더 나아갈 데가 없습니다.

최극단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소한도 불교 최 극에 달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밖에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전에 있는 말이고 알고 보면 눈 뜬 사람은 다 똑 같이 이야기 하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이 거사가 일상생활에는 선의 일곱 가지 정신에 계합한 삶을 살고, 단 “와!” 하는 이것 하나만 못했을 뿐이라는 것은 인간이 탐욕을 부리면 부리는 데로, 진심을 내면 내는 데로, 그 나름대로 지고한 가치라고 하는 것. 그리고 또 여기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질문하기를 “보살계 같은 것은 상당히 수준 높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이들에게 해당 되는 것인데,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니까 영명연수선사가 “만약에 자신이 문수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보현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불성종자를 말살하는 것이다.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만약 생각한다면 三世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놨습니다. “보살계를 받는 길”이라고 하는 이 책에요.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탐 진 치 삼독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탐 진 치 삼독이 없는 저~기 석굴암부처님 같은, 나무로 깎은 부처님. 돌로 깎은 부처님. 철로 만든 부처님 같은 그런 부처님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만약에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三世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교에서 화엄경에서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화엄경에서 분명히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고 똑 같은 것이고, 하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화엄경에서 그 말 아니 했을 것 아니냐? 그 말 왜 했느냐? 이겁니다.

어디 알지도 못하고, 문수 보현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따위 소리를 어디서 하고 있느냐고 ←이러고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짜 부처요, 당신이야말로 진짜 문수 보현이다.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 갖지 말라. ←이런 말까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그 법사가 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비구는 그렇게 비방 했어요. 사정없이 비방을 해서 결국 지옥에 갔고, 지옥에 갔다가 얼른 나와서 그 법사보다도 더 먼저 성불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여부는 놔두고,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正信이 우리가 취할 바인데,

그런 이야기가 “보살계를 받는 길”이 책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경전에 있는 이야기를 영명연수선사가 인용을 했습니다.

영명연수선사는 아미타불 後身이라고 할 정도로 송나라 때 아주 뛰어난 분입니다.


p. 190


  비록 한 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더라도 죽는 날에 염라대왕이 또한 모름지기 손을 모아 공경하고 돌아와 항복할 것이거늘,

설사 그런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확철히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의 삶이 간소하고 탈속하고 자연스럽고 유연하고 고요하고 정적하고 변화한 그런 삶이 충족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염라대왕도 당신에게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하물며 한 생각이 상응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한 생각이 상응하다. 라고 하는 말은 그렇습니다. “와!” 하는 그 소리지요. 그야말로 인간의 지고한 가치에 대한 눈뜬 그것입니다.


  제가 비록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그 일하는 것을 보건대 크고 작은 일에 맞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문득 도가 합치되는 곳입니다.

뭐든지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또 分대로 척척 물 흐르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이론적으로라도 좀 알아서 그것이 자기의 삶에 녹아든 사람들은 큰 도는 그만 두고라도 그 사는 태도가 이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또 分을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인연을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절대 분에 지나치거나, 인연을 거스르거나, 이치에 역행하거나, 이렇게는 안 산다고요. 순리대로 살 줄 알아요. 자기 분대로 살 줄 알아요.

무리수를 안 둬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자기 처지가 어떻든 자기 위치가 어떻든 거기에 큰 불만 없고, ‘아, 이것이 내 인연이다.’

좀 더 큰 삶을 살려면 거름을 좀 더 하고, 노력을 좀 더하고, 그래서 좀 더 큰 삶을 사는 길이 거기에 얼마든지 열려있으니까 그런 것이지, 자기의 현재에 있는 이 처지에서 ‘나는 왜 이런가?’ ‘내 팔자는 왜 이런가?’ 우리 불자들은 팔자타령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지요. 자기가 인연을 그렇게 지어놓고는... 인연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

제가 불교공부. 선불교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인연이야기로 돌아가고 그러는데 쉬우니까요.


  부처님 제자 중에 마승이라는 비구가 있었지요.

아주 점잖은 분입니다. 인격이 아주 고매한 분입니다.

어디서 탁발을 하고 노오란 가사를 입고 척 걸어가는데, 너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 보여요. 그래서 사리불과 목건련이라는 사람이 다른 종교를 믿다가 저기서 노란 가사를 입고 있는 사람을 봤는데, 아, 벌써 풍기는 태도가 너무 근사하거든요. ‘야~, 저 사람은 어떤 스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일까? 어떤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일까?’ 그것이 궁금하거든요.

이 사람들은 지혜가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사람을 보고는 그만, 넋 나간 사람처럼 멍~ 하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옆으로 지나가기에 붙들고는, “와, 당신 같은 사람을 나는 처음 봅니다.”


  나도 이 인도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사리불이야, 그런데 당신 같은 인격자 처음 본다 이겁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스승을 모시고, 무엇을 공부하고 일상생활은 어떠냐고 그냥 따발총처럼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 붓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승이라는 비구가 (5비구 중의 한분이라고 그러지요?)

“나는 싯달태자가 출가를 해서 깨달음을 이룬 그 분의 제자이고,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런 분이 있느냐?”고, “그 분은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나는 초보자로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들은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한 마디만 일러주세요.” 사리불. 목건련이 얼마나 학구적인 사람입니까? 놓칠 사람이 아니지요.


  붙들고 떼를 쓰니까,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떼를 쓰니까 하나만 딱 일러 주겠다고,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 모든 것은 사물이 됐든 사건이 됐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계절이 바뀌는 일이 됐든, 사람이 출세하고 실패하는 일이 됐든 전부가 인연으로부터 이뤄지는 것이다.

또 인연으로부터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 부처님 대 사문께서는 항상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어요. 이 이치를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아주 큰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가 전부 연기의 도리이고, 인연의 도리거든요.

이 현상은 연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전부 인연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불자들은 큰 것을 건진 겁니다. 그러면 부를 따라서 사는 방법이 거기 나오지요.

인연 따라서 사는 방법이 거기 있지요. 무리수 두지 않는 방법이 거기 있지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사는 길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 인연이라는 낱말 한마디 속에 다 있는 겁니다.


  선불교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높은 차원으로 이야기하다가 괜히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만, 어쨌든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일하는 것을 보건데 크고 작은 일에 맞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문득 도가 합치되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 세속 생각을 하지 말며 또한 불법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뭐 세속적인 일이다. 불법이다. 그것을 굳이 나눌 것이 없다 이 겁니다. 그것을 괜히 이름 붙여서 그렇지 어디 불법 따로 있고, 세속 법이 따로 있나요?

一切法이 皆是佛法 이라는데요.


  불법과 세속법은 모두 바깥일입니다. 명칭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바깥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기를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행동할 때에 무슨 모양이 있으며, 하는 바를 이미 판단하고는 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두루 주선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자람과 남음이 없다. 정히 이런 때가 되어 누구의 恩惠를 받았는가?’라고 하십시오.

이 “은혜력” 하는 것도 다른 타력 신앙 같은 것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恩惠力을 받았는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전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기기묘묘한 그 존재가 나인데, 나 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웃을 줄 알고 울 줄 알고 화 낼 줄 알고, 그런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 恩惠力을 받은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사람이 활쏘기를 배움에 저절로 적중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이 분은 깨달음이 말하자면 999까지는 됐는데, 1이 모자라는 표현도 나오지요. 그런데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들 인생은 이대로 완성품이다.’ ‘이대로 완성품이다.’ 불교공부해서 더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다.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도통해도 그 것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아~! 내주머니에 있었던 것을 가지고...’ ←이런 것입니다.

리 인생은 이대로 완성품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경전에서는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선불교에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저는 스스럼없이 씁니다. 이 사실을 아는 일이 간화선입니다.

우리들 인생은 현재 이대로, 현재 이대로 아무리 탐욕이 많든 그것은 따지지 말라고요. 아무리 어리석든 그것도 따질 필요 없습니다.

현재 이대로 완성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일.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냥 한 마디에 알면, 육조스님 같이 그냥

한 마디에 알고,

두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세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네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30년 40년 앉아서 공부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런데 그것을 아는 가장 좋은 방편이 간화선이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요?

도인들제자를 제일 많이 길러낸 마조스님은 馬駒踏殺天下人(마구답살천하인)이라고 그런 표현을 쓰는데, 말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다 밟아 죽인다는 말입니다. 선불교에서 죽인다는 말은 참 아주 고급스럽고 좋은 말이거든요.

유치원생들에게 그런 말을 쓰면 안 되거든요. 선생님이 그런 말을 어린 아이들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지만,

선불교에서는 죽인다는 말이 아주, 殺佛殺祖. 죽여도 파리를 죽이고 모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것이 설사 내 가슴 속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부처고 조사고 그것은 죽어야 됩니다.

그것이 부정 되어야 된다고요.

철저히 부정 되었을 때 내 부처. 내 조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이 그야말로 천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인 사람이다. ←이런 정도로 표현되는 것은 최고의 칭송입니다. “말 망아지가 천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인다.” 이것은 최고의 칭송입니다. 더 이상의 칭송이 없습니다.

그런 분의 많은 제자 중에 “대주혜해 선사”라고 유명한 분이 있지요.

그 분이 처음에 마조스님이 유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아주 먼 길을 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왔습니다.” 상당이 먼 데서 왔거든요. 몇 달이 걸려서 온 겁니다.

노자 돈도 많이 썼고요.

  “왜 여기 왔나?”

  “제가 먼 길을 많이 투자를 해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것은, 스님한테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 보물창고 버려버리고 여기까지 왜 왔느냐? 내가보기에 너무 안타깝다”는 겁니다.

  “그래요? 저에게 보물창고가 있습니까? 보물창고가 뭔데요?” 이러니까

  “자네가 지금 나에게 묻고 것 있잖아? 자네가 나에게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다는 이 말할 줄 아는 사실이 이것이 그대의 보물창고야. 이것을 일러서 부처라고 하든지 조사라고 하든지 아니면, 문수라고 하든지 보현이라고 하든지 별별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거야.” ←이 말 한 마디에 그냥 눈이 환하게 밝아져버렸잖아요.  


  선불교는 바로 이러한 사실. 우리들에게  완전무결한 현재 내 처지가 어떻든, 내가 탐욕이 아무리 많든, 어리석음이 아무리 많든,  화를 아무리 잘 내든, 걸핏하면 비관에 빠지든, 걸핏하면 잘 웃든 아무 상관없이 이 모습 이대로 완전한 작품입니다.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완전한 작품입니다.

사실을 아는 것이 선불교입니다.

그것이 얼른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까 “이 뭣꼬?” “이 뭣꼬?” “이 뭣꼬?”하고, 그렇게 참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옥아” “소옥아” 아무리 불러봤자 소옥이를 부르는 데는 별 볼일 없습니다. 婢奴素玉은 別無事(비노소옥별무사)라. 소옥이를 아무리 불러봐야 소옥이는 별 볼일 없다.


  “소옥아”라고 불렀든 뭐라고 불렀든, 그저 소리 내는 바로 그 신호. 뭐라고 불렀든, 소리 내는 그 신호가 중요한 겁니다. 소리 낼 줄 아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요. 종을 쳤든 꽹과리를 쳤든 소옥이라고 불렀든 개똥이라고 불렀든, 그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소리 내는데 의미가 있어요.  


     - 계속 -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대원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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