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이기와 시모음

시치 2008. 10. 16. 23:30

 

 

 

이기와 시모음

 


하릴없이/이기와-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내 황홀한 묘지/이기와-


낡은 서랍 가득 낡은 브래지어가 쌓여 있다
어느 야산의 공동묘지처럼
구슬피 쌓여 있는 봉분들
제 명대로 세상을 누려보지 못하고
어느새 황홀하게 망가진,
가끔은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욕정의 쭉정이 같은 것들
더 이상의 수치심도 없이
거실 바닥이나 욕실 세면대 위에
상스럽게 나앉아 있는
한때 어떤 것은 에로틱한 우상이었다
매력 없는 이 박색의 세상도 추근덕거려 보고 싶은
그렇게 실제보다 몽상의 사이즈를 더 부플리는
몽실몽실한 마력의 봉우리였다
쾌락의 육질을 감싸 안은 황금빛 실루엣이었다
이제는 터지고, 해지고,뭉개진
탄력의 감촉을 잃은 진무른 송장에 불과한 ,
시골 어느 삼류화가의 싸구려 춘화처럼
흥분시킬 그 어떤 상징도 메타포도 없이
골방 구석지기에 천박한 자태로 누워 있는 흉물
단 한 번도 희비의 오르가즘에 도달해 보지 못하고
생매장당한 내 젊음의 불쾌한 흔적인
저 젖무덤들,
푹푹 썩어드는 저 황홀한 관짝들



길바닥 생(生)에 대한 고찰/이기와-

 
잡념같은 별들이 수북히 내려앉은 밤 골목
주소 잃은 사내 하나가 오착(誤着)된 우편물처럼
남의 집 대문 앞에 떨어져 있다
풀어헤쳐진 넥타이
헐렁해진 사내의 몸을 벗어 던지고
사색의 문턱에 홀가분히 나앉은 구두 한 짝
사내의 입에선 채 곯아떨어지지 않은 독백이
타액에 섞여 흘러나오고
양복바지처럼 구겨진 그의 그림자가 몇 차례나
제 주인을 일으켜 세우려다 도로 주저앉고 만다
얼마나 고단한 삶을 이고 다녀야지만 저리 한순간
가차없이 자신을 내던질 수 있을까?
한사코 직립을 고집해 오던 생의 척추를
깔판도 없는 맨땅에 사정없이 주저앉히고
초인종 없는 아득한 꿈의 저택으로 귀가하기까지
얼마나 자주 환멸의 뒷골목을 순례하며
단단한 정신을 분질러 왔을까
그후 몇차례나 더 잠꼬대의 들을 게워내기 위해
거리의 냉담한 쓰레기더미와 마주했을까
감춰진 내면의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편집없는 적나라한 삶을 생방송하기까지
제 영혼을 망각의 대문 앞에 샘플로 내다걸고
얼마나 자주 관객들을 불러모아 왔을까
내가 고탄력 이성의 스타킹을 배꼽까지 두르고
금속 브래지어로 가슴 두 쪽을 바짝 동여매고
하루하루 철저하게 방어하는 내 집 앞 홈그라운드에
오늘은 강력한 라이벌이 먼저와 몸을 풀고 있다

 

열무 구멍 / 이기와

 

 

여러 날 뒤

텃밭에 나가 열무를 들여다보니

파란 잎사귀마다 별자리만큼 구멍이 박혔다

농약을 치지 않아

구멍은 탐스럽고도 싱싱하게 자랐다

구멍이 더 자라 허공이 되기 전

남은 구멍을 뜯어 물에 씻고 다듬는다

 

식탁 위 융숭하게 차려진 구멍들

무지렁이 벌레가 제 힘 다해

한세상 깊이

둥글게 통찰했다는 흔적

처음도 끝도 일원(一圓)이라는 벌레의 우주관

간다간다 해도 이 자리이며

도달했다 도달했다 해도 이 자리라는

텅 빈

숨통의

벌레가 남긴 구멍의 성찬식, 혀가 일어나 춤을 춘다


이기와 시인
1969년 서울 출생
1995년 행원 문학상 수상
중앙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1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발간
현재 오산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