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가난에 대하여/김승희
시치
2022. 3. 25. 01:03
가난에 대하여/김승희
가난은 전깃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반쯤 감전된 검은 까마귀들이거나
신문지로 덮어놓은 밥상
구타와 악다구니와 꽃밭 앞에 나동그라지는 세숫대야
천지는 인자하지 않단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병들어서 어느 날 밤에 누군가는 생을 떠나고
아침 골목에 내놓은
연탄재 구멍 속에 누군가 파란 손목 두 개를 꽂아 놓았네
가난은 폭삭 끊어진 계단
계단이 없으면 천사도 안 오고 약장사도 안 오고
돈도 안 오고
밤새 눈 내려 얼어붙은 빙판길에 압정같이 떨어진 별빛들
가난은 압정 같은 별빛을 밟고 걸었다
슬픔은 휘발되지 않더라
슬픔은 가라앉아 벽돌이 되기도 하더라
그 벽돌이 몸을 이기기도 하더라
벽돌 한 장만한 마당에 꼬부랑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녀와 앉아 채송화나 분꽃 씨앗을 심는 것
아욱을 바락바락 씻고 맑은 쌀뜨물에 된장을 살짝 풀듯이
어진 손이 그렇게 하는 것
천지는 인자하지 않지만
가난 속에서 어진 기운이 나오는 움틀임의 방향으로
그렇구나,
가난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월간 《현대시》 202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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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