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물 속의 사막」 평설 / 김현, 강인한, 고성만
물 속의 사막/기형도(1960~1989.3)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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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세계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김 현
이미지만을 뒤따라가자면, 밝은 빌딩의 유리창을 치는 빗줄기는 어릴 적에 본 옥수수 잎과 결부되고,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지지만(“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는 그 이미지들이 교란되는 순간의 묘사이다. 우수수는 옥수수 때문에 따라 나오고, 빗줄기와 아버지는 정상으로 회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나는 헛것을 살았다/나는 살아서 헛것이었다”의, 집을 버리고 되는 대로 쏟아지는, 그래서 다 없어져버린 ‘물/집’의 대립이 더 중요하다. 시인은 집이 없는, 방황하는 시대의 지친 넋이며, 그 원형은 그의 아버지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아니 살다 보니 나는 헛것이었다. 그런데 그 나는 바로 아버지였다! 그 인식 이후에, 나에겐 눈물도 없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저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꿈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꿈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 라는 쓰디쓴 회상의 상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 없는 미래(보라,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오래된 서적」]라고 말한다),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해설’(1989년) 중 「물 속의 사막」 부분 발췌
김 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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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속에는 슬픈 고향이 있다
강인한
기형도의 시. 그의 시는 읽는 이의 가슴을 진한 슬픔에 젖게 한다. 서른살의 나이로 그는 심야극장에서 앉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뇌졸중.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를 아껴주던 누이가 교회에서 죽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연세대 정법대학을 나온 그는 신문사 기자로 재직하며 항상 '절망'을 노래하듯 입밖에 내뱉었다. 냉소적인 성격의 시인은 불우한 가계의 일원이었다. 마치 에드거앨런포가 그렸던 몰락한 어셔 집안처럼.
신문사에서 숙직을 하는 밤이었을 것이다. 장마비가 유리창에 흘러내리고, 가로수의 푸른 이파리들이 바람에 날아와 부딪쳤다가 어디론가 떨어져내린다. 밤 세시에 빌딩에서 내다보는 도시의 길들은 물바다를 이루어 마치 온통 물의 길인 양물줄기가 사방에서 꿈틀거린다.
자다가 한밤중에 문득 눈이 떠진다. 두 시, 혹은 세 시에 갑자기 무엇에 찔린 듯이 일어나 본 적이 있는가. 그 시간이라면 전날 밤부터 잠을 안 자고 철야 근무를 하다가, 또는 악몽에 놀라 깨서 맞닥뜨린 시간이라야 한다. 새벽이라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 밤 세시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깨어서 일어나 있다. 시계에서 밤 세시를 읽는다. 두 시, 혹은 세시의 깊은 밤에 나도 문득 눈떠 본 적이 있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창자를 면도날로 에이는 듯한 무서운 통증에 놀라서 눈떠 보니 그게 두시였다. 세시라 해도 마찬가지다. 위궤양이 심했을 때의 경험이다. 한밤중,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점의 인간이라는 이름의 작은 섬. 그 절대적이고 완전 무결한 단절과 고립의 쓰라림이란....
그는 지금 빌딩 안에서 밤을 지내고 있다. 신문사의 당직인 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밤 세시에 눈을 뜬다. 그를 깨어나게 한 것이 빗소리 때문인지, 무서운 악몽 때문인지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밖에 나가서 약을 사거나 병원에 갈 수도 없는 난처한 시간이다. 상점도, 병원도, 식당도 문을 닫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깊이 잠든 도심에서의 밤 세 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일상적 행동이 '금지된' 시간이다.
여름이다. 장마비가 빌딩을 무너뜨릴 듯이 무섭게 쏟아진다. 한밤에 그는 창가에 서 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언저리로 퍼붓는 사나운 빗줄기가 보인다. 도로의 아스팔트 위를 빠르게 흘러가는 물줄기, 무어라고 악을 쓰며 빗줄기가 흘러내리지만 그는 빗소리가 말하는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다(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때로 거센 바람이 분다. 바람이 빗발을 세차게 몰아붙이고 가로수 이파리가 가지에서 찢겨져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힌다. 그 나뭇잎은 그에게 어린 시절 고향의 옥수수 잎을 연상시킨다. 성장한 뒤 누구나 떠나온 고향은 있게 마련이고 고향의 기억은 대체로 슬프다. 그의 고향 옥수수 밭이 무성하던 여름의 장마철이 겹쳐진다. 홍수로 흙탕물에 잠겨 가던 옥수수 밭.
그는 고향을 자기 의지로 떠나왔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개가 그 해 장마철에 집을 나간 것처럼 고향집을 떠나왔다. 서울에서, 보란 듯이 한 번 일어서리라 단단히 굳은 각오를 하고. 그렇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이십대 청년이 서울에서 만난 것은 도처에 절망뿐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빌딩 유리창을 뒤흔든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그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다. 유리창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어떤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마치 사람 같기도 하다. 누구일까. 아, 그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가 잠시 유리창에 대고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그렇게 슬피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 이파리를 단 찢긴 가지는 아래로 떨어져 갔다. 아버지의 고향은 북쪽에 있었고, 그 북쪽이 보이는 섬에 정착하여 살며 언젠가는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리란 생각을 잊지 않았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소망한다는 것, 그 작은 소망을 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자는 얼마나 슬픈 사람일 것인가.
나는 아버지처럼 헛된 삶을 살지는 않으리라. 그런 각오를 스스로 다짐하며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하였으리라. 밤비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유리창에 거울처럼 비치는 제 얼굴이 어쩌면 젊은 날의 아버지 얼굴 같기도 하다. 검은 유리창 거울에 비친 와이셔츠의 흰빛, 한밤의 빌딩 속에서 만난 '악몽'을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운다. 젊은 사내가 빌딩 안에서 미친 듯이 소리쳐 운다.
기형도의 시 「물 속의 사막」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슴 저리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시다. 여름 밤 장마비, 빌딩 안, 밤 세 시. 도심 속의 한 점 섬인 양 완벽하게 단절되고 구원이 닿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는 갇혀 있다. 제목에서의 '사막'은 막막한 절망의 심정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지된다,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통과하지 못한다" 등 부정 어법에서 끼치는 절망감은 흑백의 대비적인 풍경 속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 속에서 '밤, 석탄가루, 검은 유리창'과 함께 '흰 개, 비, 비닐집, 환한 빌딩, 와이셔츠 흰빛'의 흑백 대비는 어쩌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 세시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푸른 옥수수잎'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뿐, '무정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2002년)
⸺시 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 (시와사람, 2003)
강인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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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연구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고성만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성석제의 회고에 따르면 정초 세배 온 동네 사람들과 모처럼 들어온 양주를 컵으로 마시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눕게 된다. 그 결과 어머니 장옥순씨가 생계 일선에 나서고 누이들은 신문 배달 등으로 가계를 도와야했으며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기형도는 내성적 생활을 해나간다. 아버지는 타계할 때까지(1991. 8. 19) 23년을 병으로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상당 부분 축소된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 「위험한 家系·1969」
아버지는 병에 걸렸고,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험한 家系·1969」는 가족의 어려움을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하고 묻는 것으로 희망을 암시하지만, 확신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또 어디로 도망치셨는지(「너무 큰 등받이 의자」)'와 같은 진술을 낳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폭풍의 언덕」)'와 같은 부재의식으로 연결된다. 훗날 성인이 되어 회상한 아버지의 모습은 '폭풍'이라든지 '물'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슬픔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두운 기억 때문인 듯하다.
학자풍 오후 나란히 짧은 세모잠. 가난한 아버지, 왜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낡은 커튼을 열면 양철 추녀 밑 저벅저벅 걸어오다 불현듯 멎는 눈의 발, 수염투성이 투명한 사십. 가난한 아버지,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 「너무 큰 등받이 의자」
시인의 아버지는 '학자풍'이라 묘사됨으로써, 당시 시인이 살았던 농촌에 정착한 인물치고는 매우 지적인 이미지의 소유자이면서, '물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정열을 소유한 인물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을 깨우쳐주는 내적 요소로 작용한다. 성인이 된 시인은 그러한 아버지를 원망하기 보다 슬픔을 연상하는 요인으로 인식한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물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 「물 속의 사막」
장맛비 속의 빌딩에서 비는 사정없이 퍼부어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리'고, 잊었던 기억처럼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리'고 말한다. '헛것을 살았다'고. 시인이 곧 아버지가 되어 말한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고. 시인과 아버지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삶에 대한 냉철한, 뼈저린 반성의 표현이다. 즉, 아버지의 생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이며, 아버지의 생이 자신의 생과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며, 아버지가 살아왔던 생이 '헛것'이었다면 자신의 생도 '헛것'일거라고 느끼는 허무의식의 소산이다. 여유로운 유년 생활을 제공해주지 못했던 아버지를 자신 속에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이 이미 늙어버린 것 같은 허무감에 빠져든다.
기형도에게 아버지는 엄격했지만 자상한 부성 그 자체였다. 그랬던 아버지가 쓰러져서 장기간에 걸친 투병생활에 들어가자 시인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고, 어린 서정적 자아는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위험한 家系·1969」)'는 고통을 감내한다.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늙은 사람」
예전 근엄하고 자애로웠던 아버지와, 날이면 날마다 병자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현재 아버지 사이의 간극은 너무 컸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성장기에는 커다란 정신적 장애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미워하기에는 너무 안타깝고, 연민하기에는 상처를 주는 아버지를 '혐오'한다. 그러나 청년기의 자아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는 자신과 갈등한다.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 「늙은 사람」
부정할수록 냉혹하게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 서정적 자아는 자아마저 객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비극적 마음의 상태를 발견한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 「病」
회생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아버지의 존재로 인하여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가지 잘린 늙은 나무'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2003년 2월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 논문 | 고성만, 「기형도 시의 성장 모티프 고찰」에서
고성만 (시인)
P.S.
기형도의 시 「물 속의 사막」은 맨 처음 1988년 《현대시사상》에 발표되었고, 사후 유고시집에 수록(1989년)되었습니다. 시인이 변사를 한 시기가 1989년 3월이고 시집 초판 1쇄 발행이 그해 5월 30일. 아마 시인 사후 유고시집 원고를 수습하여 편집하고 전체를 통독한 다음 김현 평론가가 해설을 쓰기에도 빠듯한 짧은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시집을 내내 외면하고 지내다가 『입 속의 검은 잎』을 서점에서 내가 처음 구입한 것은 2015년 9월 2일. 간기에 보니 재판 54쇄 발행 2015년 3월 19일이라고 나옵니다. 아직도 나는 기형도의 이 시집 전체를 다 읽어보지 못한 채이며, 김현의 해설 전문을 다 읽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_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