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그 집 앞/김 륭

시치 2021. 9. 23. 21:26

그 집 앞/김 륭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방 안에 파리나 모기 대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집, 고양이는 십 년을 넘게 키웠지만 사람이 되지 않았다

 

집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죽었는지 모르는 손님들이

화장지나 식용유를 들고 문을 두드리는 집

꼬깃꼬깃 구겨져 뒹구는 유령의 그림자 몇 장을

세어보다가 돌아서는 집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무 자주

나마저 나를 기다리지 않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게임처럼 사랑을 즐기는 소년과 배달 음식처럼 사랑을 잘 받는

소녀들이 우글거리는 집으로 꾸며야지 그러려면

 

시를 써야지 사랑을 해야지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니까 내가 시인이 되어야지

 

시가 오고 있다 시가 오면

봄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그만인

 

그러나 시를 쓰려면 당신이 필요한

집, 이사를 가기 위해 지은 그런 집이 있다

어느 날 훌쩍 유령이 되기 위해 매일 밤 그 집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

 

 

 

           ⸺계간 《시인수첩》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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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원숭이의 원숭이』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외 청소년 시집과 동시집 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