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202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작 _여세실 「후숙」 외 5편

시치 2021. 8. 12. 22:14

 

 

후숙

 

 

 

흑백영화 속

주인공은 왜 자꾸 도시를 헤매는 걸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볏짚이 탄다 잉걸불이 인다 불씨는 자기를 새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새라고 믿고 날아가, 연기를 꿰어 노래를 만들었다

 

찻집이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면 공방이 나왔다 손으로 뜬 수세미와 골무를 보고 있었다 옷걸이 모양대로 빨래가 말라 있었다 부들부들했다 멀미가 났다 빚어서 만든 찻잔과 식기들

주인이 웃으며 바라봤다 다음 주에 전시회가 있으니 꼭 오라고

 

풀려버리고 난 후에도 스웨터의 모양을 기억하는 털실처럼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이 도시에서 약속을 하고

오후라고 말했다 비라고 말했다

수요일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창 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둠과 더 짙은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붓 끝을 털거나 손끝으로 밀어서 그린 듯 흘러내렸다

 

숲은

우는 사람의 옆모습을 닮아 있었다

 

눈이 쌓이고 난 후의 흰빛이 음악이 된다고 믿었다 눈은 내리고 오래지 않아 더러워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를 눈이라고 불렀다

 

 

 

이제와 미래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으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넝쿨째 자라기도 한다는 걸

 

진녹색 잎의 뒷면이 바스러졌다

시든 가지에도 물을 주면 잎새가 돋았다

 

 

 

공통감각

 

 

 

과천역에 내렸다 우리 서울대공원에 가려고 한 거다

동물원은 닫혀 있었다

 

철창 위로 올라가면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짐승의 눈인지

깨진 알인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철창 밖의 동물원 슬픔도 없는 식물원

 

우리를 열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해보려고 했다

나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밀알 하나가 굴러와, 구린내를 풍기며 굴러와, 나를 가로질러 굴러와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아

하나가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 울고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깃털이 날렸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나면 사라지는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네 손가락은 축축하고

 

약속이니까

잘하자 꼭 하자

 

같아 보이는 웃음이어도

몇 번이고

다르게 말해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친구가 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친구를 할 수 없게 되니까

 

첫차를 기다리며

땀을 흘렸다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

 

 

 

물색

 

 

 

나는 오후 네 시와 깨진 유리컵 사이에 걸쳐 있다

 

혼자 울고 혼자 그치는

커튼은 타오른다

 

이끼가 파랗게 눕고

비 냄새가 난다

 

햇볕은 나를 가로막고 끌어안으며 밀어낸다

바깥을 거둬들인다

더 깊어지는 안쪽을 들여다본다

 

나라고 믿고 싶은 것과

그 속삭임을 깨부수고 싶을 때

컵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젖게 하는 말은 이미 내 속에 있다고

 

이제는 헤아리지 않으려고 해

밖은 풀어진다 안은 입술을 달싹인다

주름을 늘인다

 

커튼은 가슴을 쳐 가슴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가슴을 쳐

 

들이켜고도 남아 있는 혼잣말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 풍경과

누구의 얘기도 될 수 있는 중얼거림이

부딪히고 껴안고

 

음악을 끄집어낸다 더 작은 흥얼거림

 

커튼은 흩날림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고

떠다니는 먼지를 본다

 

너도 내가 싫으니

 

맨손체조를 하듯이

무릎을 바짝 펼 때 무릎이 거기 있다는 것

거짓말이, 복숭아뼈가, 팔꿈치가

무사하다는 것

 

커튼은 어디에 매달려도 커튼

매달리지 않아도

바람이 위로해도 커튼, 찢어진 커튼

 

누군가는 눈동자 모양의 유리창을 상상하고

깨부수고

그 위로 걸어가고

 

걷잡을 수 없이 불어간다

 

커튼은 늘 날리는 자세 털어버리는 모양

안팎을 내맡긴다

 

 

 

일주일 뒤에는 실을 주문해야겠지

 

 

 

망가진 책들을 끌어안고 졸면

주인공과 똑같은 토요일을 맞게 될 거라는 미신이 있어

 

사서는 모로 누운 문장들을 일으켜보려고 하고

반납 일자가 밀린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이마에 검은 덤불이 스친다구요

다리를 접질려 속옷이 다 젖으셨다구요

귓불과 혀에 돋은 검은 비늘들

 

작은 관처럼 양장본은 어두워지고

사서는 실에 기름칠을 한다

먼지를 털어낸다

굵은 실과 얇은 실을 고른다

 

타고 남은 심지 냄새 마른 풀 냄새

 

헐거워진 구멍을 메꾼다

손가락에 굳어 있는 본드를 앞니로 떼어낸다

 

찢긴 책은 아름답지

찢겨진 후에도 책으로 남아 있으려는 종이의 선택이

 

정각에 오세요 선생님

문장을 끌어안고 책등 위에서 뛰어내려보세요

글자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세요

 

박스 안에는 귤이 서서히 곰팡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흰 곰팡이 초록 곰팡이

 

반납 일자를 고치며 내일 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창가에 젖은 책들을 세워둔다

입을 벌리고 흰 뼈마디를 길게 늘이는 책들

두꺼운 책은 창가 가까이, 작고 얇은 책은 멀리 떨어져서

조금씩 말라간다

 

 

 

작당

 

 

 

적당한 펭귄을 찾아다녔다

가장 펭귄에 가까운 펭귄을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펭귄들이 몰려와 기웃거렸다

 

너의 한 뼘과 나의 한 뼘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할 때도

너는 꼬리에 노란 깃을 묻힌 펭귄이 좋겠다고 했고

나는 빙판 끝에서 주저하는 펭귄을 찍자고 했다

 

앞서는 너의 보폭을 따라잡으려고 했다 미끄러웠다

 

바닥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웅크려서 신발에 묻은 펭귄 똥을 눈에 문질렀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닦고 있게 된 걸까

 

빌려주지도 않은 접시를, 첫눈을 찾으러

내가 갔잖아

 

알을 깨고

네, 제가 바로 그 펭귄입니다

짐짓 설명하려는 펭귄

 

보온병에 국물을 따랐다

네가 밥을 먹을 줄 안다는 것이

내 입에 단 것이 네 입에도 달다는 것이 신기해

 

읽어보려고 애를 썼다

 

튀어 오르는 솟아나는

펭귄들은 모두

알 대신 돌을 품고 있었다

말할 것들과 믿어온 것들 모두

의심하면서

 

그저 건너볼 수밖에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을 무르고

 

너와 나는 눈을 감고 서로의 얼굴을 만져본다

볼록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너는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더듬어도 되어볼 수 없는

검고 미끄러운 것이었다

 

적당한 펭귄과 끝 간 데 없는 펭귄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말아보았다

 

 

 

 여세실 / 1997년 경기 안양 출생.  안양예고,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202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

 

=====================================================================================

 

| 심사평 |  박상수, 안미옥

 

 

   최종적으로 여세실의 「후숙」 외 9편을 당선작으로 골랐다. 여세실의 작품은 오랜 훈련을 거친 사람의 내공이 단연 돋보인다. 그럼에도 하나로 꿰어지는 치밀한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초점이 어긋난 것처럼 잠시 흔들리고 어떤 대목에서는 조금 다른 장면을 겹쳐놓은 것처럼 느슨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드는 건 일차적으로 여운을 길게 남기는 좋은 진술들 때문이었다. “불씨는 자기를 새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새라고 믿고 날아가”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찢긴 책은 아름답지/ 찢겨진 후에도 책으로 남아 있으려는 종이의 선택”과 같은 문장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은 이 문장들에 이미 녹아 있는, 절망 뒤에 오는 아픔까지를 다 제 것으로 감당하면서 ‘이후의 삶’을 이어가려는 어떤 ‘선량한 의지’ 때문이었다. 사실 이 의지는 그게 무슨 사물이든지 무조건 환한 것으로 떠받치는 시적 관행 속에서라면 거의 상투형으로 소비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여세실은 그것과 거리를 두고, “눈은 내리고 오래지 않아 더러워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를 눈이라고 불렀다”(「후숙」)라고 말하면서 눈이 더러워져 흉한 모습까지를 ‘눈’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해낼 줄 안다. 그것이 바로 후숙, 시간을 두고 더 익어가는 일, 나는 여기서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작품까지 거듭 읽어나가며 마침내 시인을 기꺼이 믿게 되었다. 죽어가면서도 방을 정화했던 나무의 분갈이를 해주면서 거기에 ‘이제와 미래’라고 이름 붙이는 행동이나, 곰팡이가 핀 귤을 떠올리며 찢긴 책을 수선하다가 ‘일주일 뒤에 실을 주문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의 의지는 언제든 자신을 과시하는 법 없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후의 삶’을 이어가려는 자세로 모인다. 이 사람은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여세실의 「후숙」 외 9편은 신뢰를 주는 시였다. 시에 대한 고민이 깊고, 오래 쓰고 견딘 시간이 시에서 느껴졌다. 자신의 언어를 성실하게 찾고, 쌓아가는 역량이 엿보였다.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과 한계 짓지 않는 방식의 시선은 대상 너머에까지 감각이 닿게 했고, 그렇게 쓰인 문장들엔 힘이 있었다. 비스듬히 어긋나면서 본질을 드러내는 풍경을 포착하는 면모가 보였고,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쓰겠다는 태도가 있었다. 그건 어떤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가 아직 쓰지 않은, 앞으로 쓰게 될 시가 몹시 궁금했다. 이런 마음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앞으로 더욱더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자유롭게 세계와 시를 겪어나가길 바란다.

 

                                                                                 〇

 

   김미리의 「파도」 외 9편의 작품은 미래도 과거도 부질없이 무너져가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인 ‘언니’와 화자가 서로를 의지해 이 세계의 폐허를 견디며, 때로는 자학적인 상처를 주고받고, 또한 간신히 존재하는 일을 그리고 있다.

   박도언의 「에어리 프린트」 외 9편은 단정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엿보이는 시였다. 군더더기가 없었고, 작고 희미한 것에 침잠할 때 세계의 내면을 드러내는 시편들이 매력적이었다. 이상할 수 있는 풍경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보는 화자를 통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설득력 있게 읽혔다.

   이은형의 「언젠가 본 너의 이야기」 외 9편의 작품은 문제적이고, 영리하고, 징후적이고, 메타적인 매력을 선보여서 인상적이었다. 이 응모자는 시 속 화자를 그야말로 ‘중2병 화자’로 설정해놓고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다.

   박주훈의 「블루스」 외 9편은 낙오자의 정서를 바탕으로 밑바닥 인생의 자조와 한탄과 연민과 묵직한 세계 인식을 거칠게 선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자의식과 자조적 진술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위태로우면서도 힘이 있는 에너지였다.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위태롭게 느껴졌다.

   김깃의 「진달래 장의사」 외 9편은 읽고 난 후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는 시였다. 그 울림과 여운이 오래 지속되었다. 일상의 지점에서 발화되는 담백한 진술이 읽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얼었던 것이 녹지 않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포착하는 힘, “모르는 식물의 이름을 확인하려 자꾸만 모르는 식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힘. “흰 것과 만나/ 흰 것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보내온 시들에 편차가 있어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위 심사평은 두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임.

 

 

                         ⸺월간 《현대문학》 202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