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도서관/신윤주

시치 2021. 1. 3. 16:48

 

도서관/신윤주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겨 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요. 하강하고 있어요. 저 멀리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여요. 마당에는 안개꽃이 흐르고요. 열린 창문으로 파도가 들이쳐요. 파란 잉크가 옷에 튀어요. 발목이 잠겨 첨벙거려요. 이만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끝으로 모래의 지문들을 털어내요.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한없이 부풀어 올라요.

 

▷1986년 제주 출생 ▷제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심사평]

 

한라일보 신춘문예 본심에 오른 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서정적인 작품들이 다수 있었고, 고유한 제주 체험에 기초해 창작한 작품들도 여러 편 있었다.

한 편의, 새로운 시의 탄생은 하나의, 초유의 관점의 탄생일 것이므로, 한 편 한 편에 과연 시적인, 유의미한, 최초의 발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생각의 단순한 열거에서 벗어나 그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상관하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폈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살구나무', '감자꽃', '그리고 '도서관'이었다. '살구나무'는 무위(無爲)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살구나무의 순연한 생명 운동을 번거로운 잡사(雜事)에 시달리는 사람의 형편에 대조해서 바라본 작품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감자꽃'은 제주 4·3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감자가 자라는 땅속 어둠의 공간을 피신한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공간이 "검은 봉지"의 공간으로 갑자기 전환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시 '도서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시는 해역(海域)을 책 혹은 도서관의 공간에 견준 작품이었다. 바다의 파도와 해초, 해안선 등을 한 권의 책의 표지와 책 속에 담긴 서사로 치환했다. 상승과 하강,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의 경계를 내내 활발하게 허무는 점이 신선했다. 첫머리에서 끝자락에 이르도록 산문시 시행을 끌고 가는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뿐만 아니라 풍경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그리고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편에서 유니크한 시적 화자를 만날 수 있었던 점도 새로운 신인의 출현을 한껏 기대하게 했다. 앞으로 서두르지 않고, 심지 굳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열어 나가길 바란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허영선 시인,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