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송찬호 동백시 모음(9편)

시치 2020. 1. 29. 13:52

송찬호-동백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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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동백 /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검은머리 동백

 

 

 

누가 검은머리 동백을 아시는지요

머리 우에 앉은뱅이 박새를 얹고 다니는 동백 말이지요

동백은 한번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지요 거친 땅을 돌아다니며,

떨어져 뒹구는 노래가 되지 못한 새들을

그 자리에 올려놓는 거지요

이따금 파도가 밀려와 붉게 붉게 그를 때리고 가곤 하지요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빨갛게 멍들었는지

거울도 안 보고 살아가는 검은머리 동백

  

 

       

동백 열차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 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 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 동백꽃 보러 간다

 

 

 

거긴 혁명가들이 우글우글 하다더군

오천 원짜리 음료수 티켓만 있으면

따뜻한 창가에 앉아

불타는 얼음 궁전을 볼 수 있다더군

거긴 백지만 한 장 있으면

연필 끝에서 연애가 생기고

아직도 시로 빵을 구울 수 있다더군

어느 유명한 사상가의 회고록도

거기도 집필됐다더군

고요한 하오에는 붉은 여우가

소리 없이 정원을 지난다더군

길의 방향은 다르지만, 폭주족들의

인생목표도 결국 거기라더군

 

그리고 거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장례의 풍습이 남아 있다더군

동남풍

바람의 밧줄에

모가지를 걸고는

목숨들이 송두리째

, 뚝 떨어져내린다더군

, 면회 간다

동백 교도소로

 

      

    

동백이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관음이라 불리는 어느 동백에 대한 회상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인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를 보아요

그 아뜩한 올가미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향일암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도

검푸른 잎사귀로

그 어린 꽃을 살짝 가려주네요

그러니 동백이 저리 붉은 거지요

그러니 동백을 짐승을 닮은

꽃이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목 부러진 동백

 

 

이제 나는 돌부처가 목 부러진 이유를 알겠다

부러져 발끝에 채이는

미소의 이유를 알겠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짐승들 또한 그렇다

그래, 너희들 그렇게 싸우는

분명한 선악의 경계가 있는 것이냐

인면(人面)과 수심(獸心)중 분명한 승자가 있는 것이냐

오늘은 아예

인면이나 수심의

어느 한쪽 얼굴이 아닌

두루뭉수리 인면수심의 얼굴로 돌아다녀야겠다

그러다 인면수심마저 내려놓고

불로와 불사마저 벗어버리고

떨어진 목 위에 동백이나 얹어놓아야겠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건 듯 바람들

너희도 목 부러지겠다

 

    

  

동백이 지고 있네

 

 

기어이기어이 동백이 지고 있네

싸리비를 들고

연신 마당에 나서지만

떨어져 누운 붉은빛이 이미

수백 근은 넘어 보이네

 

벗이여, 이 볕 좋은 날

약술을 마다하고

저리 붉은 입술도 치워버리고

어디서 글을 읽고 있는가

이른 아침부터

한 동이씩 꽃을 퍼다 버리는

 

이 빗자루 경전 좀 읽어보게  

 

 

 

동백 선생 

 

 

내가 남도로 선생을 찾아간 것은 어느덧

삼월도 다 지난 어느 햇살 맑은 봄날이었다

 

그 깊은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선생은 의서와

역서를 읽는 분이었다 어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뼈를 맞춰주거나 응혈을

풀어주기도 하고 몇몇 종자를 구해 와서는

절기에 따른 파종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선생은 해마다 돌배를 타고

혹독한 겨울 바다를 건너와 천기를 살피며

근심하다 봄빛이 완연해지면 떠나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해인가 난리가 났을 때는

탄식 끝에 배를 바다 밑에 끌어 묻고 꽃을 뿌려

손수 펼친 陳法 속에 한동안 은거하기도 했다

 

내가 가던 날, 아직 배는 문밖에 매어 있으되

오랫동안 선생의 기척은 없었다 드디어 조바심을

참지 못한 성미 못된 내 마음속 원숭이들이

가슴을 긁으며 가르릉거렸다 선생은 어디 계시는지

이제 정말 봄빛이 완연하다 나는 한동안 서성이다

인근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우선 눈에 띄는

소똥 묻은 돌멩이에 다가가 여쭸다

 

안에 동백 선생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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