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2019,대산문학상-사람 (외 2편)/오 은

시치 2019. 11. 12. 00:44


2019,대산문학상

사람 (2)/오 은

 

 

뒤가 급해 화장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안에 사람 있습니다.”

또렷한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볼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이 있었고 아침 햇살이 있었다

황무지가 있었고 뱃고동이 있었다

무인도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던 곳에 기척이 있었다

아무도 발 들이지 않았던 곳에 자취가 생겼다

 

발가벗은 아이가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기쁘다

부끄럽다

 

태어난 그대로라 아이는 기뻤다

아이를 만난 나는 부끄러웠다

볼일을 보지 않아서

실은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려서

 

밤하늘처럼

황무지처럼

무인도처럼

어느 순간 변해버려서

 

기쁨이 있었고 부끄러움이 있었다

온몸으로 기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아직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풍경화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정물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죽고 싶어요

사람이 말했다

죽기 싫어요

사람이 말했다

실은 모르겠어요

 

사람이라 말했고 사람이라 거짓말했다

 

믿음이 있었고 믿어주는 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속음이 있었고 속아주는 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척들이 있었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자취들이 있었다

 

밤하늘을 뒤덮는 아침 햇살처럼

황무지에 울려 퍼지는 뱃고동처럼

무인도를 수놓는 사람처럼

어색하고 껄끄러웠다

 

아이가 시원하게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니?

아이는 도리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누구지?

 

지갑이 제대로 있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불이 나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근사한 집을 짓거나

어딘가에 불쑥 나타날 때에도

아직 당신이 사람임을 증명할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볼일을 다본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물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풍경이 되었다

 

밤하늘이 아침 하늘이 되는 것처럼

황무지에 새싹이 돋는 것처럼

무인도에 온기가 도는 것처럼

꾸밈없고 자연스러웠다

 

기쁘다

부끄럽다

 

기뻐서 마침내 부끄러운 사람이 있었다

부끄러움을 알아서

겨우 기쁜 사람이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바깥에도 사람이 있었다

아직 화장실이었다

보는 일이 앞에 있었다

 

 


궁리하는 사람

 

 


이야기가 필요해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집에는 책이 있고

식탁 위에는

꽃병도 있는 이야기

 

정작 꽃병에 물이 없었다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지

숨기고 싶고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이야기

 

집 안에도, 책 속에도

식탁 위에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은 시들고 있었다

 

암만 씻어도

아무리 청소해도

제아무리 들여다봐도

 

표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를 떠올리다

꽃병에 물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꽃에 물을 주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

 

오고 가야

나누는 것이 되고

담론이 되어 밤을 밝히고

항간에 떠돌며 손상되기도 하다가

 

이야기의 끝에서 기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

 

밥때가 되면

식탁 위에서 다시 외로워지는 이야기

운때가 맞지 않아

집 안에 자취를 감추는 이야기

 

침묵하는 꽃을 핑계 삼아

또다시

이야기는 장황해지고

이야기는 쓸데없어지고

이야기는 황당무계해지고

이야기는 거짓말만 같아지고

 

꽃병에 물을 채우다

이야기를 꺼낸 사실을 잊고 말았다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집에는 책이 있고

꽃병에 물만 채우면

소문처럼 부풀어 오를 줄 알았던

이야기가

 

말문 밖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궁리하지 않으면

말하기 전에 벌써 곤궁해졌다




세 번 말하는 사람

 

 

  

   o는 꼭 세 번씩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속사포처럼 작게 세 번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크게 한 번 놀랐다 같은 말을 연속해서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혀가 짧아서, 속사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단어의 시작과 끝이 토마토나 아시아처럼 같은 음절이어서 어떤 말은 세 번 말해야 상대가 겨우 알아들었다 불발이 된 단어는 늘 부끄러웠다

 

   김치볶음밥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싶으신가요?

   피망, 피망, 피망

   말할 때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지 세 번째 피망은 피멍처럼 들리기도 했다 놀란 종업원이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덕분에 피망볶음밥에 가까운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한 번만 말하면 의심스러웠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상대가 말을 제대로 듣긴 했는지 간파할 수 없었다 파열음이나 마찰음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한 번 만에 의사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번을 말하면 상대가 의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꼭 두 번을 말한다고 했다 사기꾼들은 보통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두 번 말하지 투자하세요, 투자하세요 수익이 납니다, 수익이 납니다

 

   과감하게 투자하실 건가요?

   수염, 수염, 수염

   수익이 나는 걸 기다리느니 수염이 나는 게 빠르겠다고 답하려다 실패했다 웃음이 났는데 참다 보니 눈물이 났다 속사포의 방아쇠는 총알의 일부만 견인할 때가 많았다

 

   세 번씩 말하면 사람들이 집중했다 세 번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간절한가 봐, 강조하고 싶은가 봐, 각인시키기 위해서인가 봐 봐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잖아!

   세 번째 말할 때 입천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식욕이 돋았다 무조건반사처럼 천장에서 단비 같은 침이 쏟아졌다 o는 그것을 다시 식도 뒤로 꿀꺽 삼켰다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차장면, 자장면, 짜장면

 

   속사포에서 파찰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20199

                (2019년  대산문학상 제27회 수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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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SNS : http://twitter.com/flaneur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