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제1회 박상륭상-장현의 (시) 40편 中 10편

시치 2019. 11. 9. 00:25

제1회 박상륭상

 

수상자 : 장현

수상작 :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39

수상자 약력: 1994년 출생. 서울 거주.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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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편의 작품 중 10편을 선하여 소개합니다.







 


 플레어스커트

 

 

*

애인은 쪽지를 남기고 갔다

입학 축하해

방충망을 흔들며 직선으로 들어온 빛이 곡선을 터득하고 있다

 

삼월

유독 솟아오른 계단 앞에선 몸을 크게 접는다

따라 해본다

키가 작은 애인은 힘이 더 들 것이다

 

*

불면증에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다

시작하는 모든 겨울의 뺨에 아프지 않게 면죄부를 써 주고 싶다

 

조여 매는 회색 머플러

무너지는 광장

반대편엔

공중에 띄워진 거짓말

혀로 핥으면 달콤한 설탕이 묻겠지

깊이 잠들 수 있겠지

 

*

신발을 신고 바깥으로 나오면

떠오른다 부웅

꿈속 푸른 바다

 

아시다시피 바다에는 띄어쓰기가 없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이힐 뒤축을 구기는 여자도 없다

 

*


고양이와 나누는 대화

압정

바이섹슈얼 친구가 쓴 편지가 걸려 있다

 

나의 친애하는 이웃에게,

더 이상 친구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플레어스커트를 주문했다

애인에게 내일의 미련을 선물하고 싶다

 

*

바다 위

나와 고양이와 애인

천천히

녹는다

하얀 이가

썩는다

 

*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올 것이다

 




 칠월




 


신을 벗고 들어간 곳엔

사람보다 문이 먼저였다

열어야 할 문에서

다시 닫아야 할 문까지

문턱에 고인 꿉꿉한 공기는

이 계절에 잘 어울린다

배꼽처럼 일그러지는 손잡이

안은 아직 덜 굳었고

바깥은

지저분하지만

당신은 얼마간 머무를 것이다

그동안 썼던

계절이 없는 방을 찾아

도망쳐온 여자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방은 너무 좁고

나는 잘라놓은 과일 위로

다섯 갈래의 포크를 찍는다

천장에는

내가 원하는 형태의 여름

말린 꽃을 매달아두는

당신 마음 같은 것

이름 없는 풀 앞에서

옷을 한 번 정리한다

누가 내 머리를 밟고 문턱을 넘는다

떨어트린 열쇠는

이미 내게 여러 개 있었고

방 안에서 은빛 자물쇠로 몸이 묶인 여자들을 생각하면

이불 속에 당신을 혼자 두고

신을 신고 싶었다


 




마미손

 

 

내가 개수대에서 털 난 수세미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말했다 놔두어라

 

내가 고무장갑 속에 들어가려고 머리를 질끈 묶자 어머니는 뛰어오신다

 

어머니 왜 오셨어요

 

네가 거길 왜 들어가니

 

이제 밖으로 나오세요 그 안은

 

답답할 텐데요 물 새는 천장에서 혼자

 

아니다 여긴 원룸이 아니고 파이브 룸이야 길고 끝도 없어 네 방 내 방을 가져도 남는다 여기선

 

씻은 국자와 젖은 걸레는 뚝뚝 물을 떨어트리며 긴 머리의 여학생처럼 건조대에 걸려 있다

 

너는 왜 내 할 일을 뺏는 거냐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뒤를 돌아본다 어머니도 뒤를 돌아본다

 

저랑 밖으로 나가요

 

아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조금 빨갛고 금방 마른다 내가 선물했던 꽃들은 바싹 마른 채 긴 머리의 여학생처럼 벽에 매달려 있다

 

다섯 개의 방에서 다섯 개의 몸으로 매일 조금씩 늘어나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고무장갑이 왜 빨간색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만 좀 내려오시라니까요 그런데

어머니

 

그 많던 고무장갑은 다 어디로 갔나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




날개를 먹어버린 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새를 따라 움직인 것이 인간의 춤이라는 것이다

 

발레를 배웠다던 애인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애인은 우리가 처음 춤을 춘다고 했다 나도 애인과 추는 춤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이 손을 잡고 있다

 

애인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 나는 턱을 붙이며 끌어당긴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슬프다고 했는데 애인은 반듯한 원을 그리며 스텝을 밟는다 그래도 슬프다 했다

 

나는 그 손을 놓친다 애인은 끊어진 손으로도 미소를 짓는다 하얗게 보였는데 자꾸 하얘지다 보면

 

저러다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나 모르게 예쁜 사람이 되어 혼자와 춤을 연습한 것이 틀림없다 내 손에 남은 드레스 슬리브를 날개처럼 흔들었다 애인이 저리도 하얬나 투명했나, 나를 다 출 때까지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처음 춤을 춘다고 했고 애인도 나와 추는 춤은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구름다리에서 내가 속으로 했던 나쁜 말을 애인이 기억할까 봐 발을 빨리 굴렸다

 

지칠 때가 되었는데 계속 춤을 춘다 내게서 태어난 나쁜 말들은 날개 안에 숨기고 하얀 새 이야기를 쓰자 새가 태어나고 날고 마지막엔 땅에 내려와 인간에게 투명한 춤을 가르치는 이야기

 

날개와 새를 따로 적는다 흰과 춤을 붙여 쓴다 애인이 옆으로 온다 이야기가 아직도 슬퍼?

 

 

 

 

  내일의 미미

 

 

 

사랑이 많은 주인은 어젯밤 미미를 버렸다

 

미미는 짖었고 주인은 짖는 미미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 일로 미미는 다리를 절고 주인 없이 혼자 살아간다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

 

미미는 요리를 해 밥을 먹는다 속까지 따뜻해지는 계란말이와 호박볶음 양배추볶음을 즐겨 먹는다 눈이 다 녹으면 사람들은 책을 버렸는데 미미는 그 책들을 주워 읽었다 눈을 멈추고 눈을 감고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생각하곤 했다

 

주인은 미미와 닮은 미미와 산책한다 미미와 호텔에도 간다 미미를 꼭 껴안고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한다 주인과 미미는 기쁘고 사랑한다

 

미미는 책에서 죄와 벌  해와 밤  죽음 이라는 말을 배웠다 소리 내서 읽고 오래도록 머물렀다 쾅쾅 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주인을 닮은 주인들이 창에 눈을 붙이고 안을 살핀다 미미는 오늘 내다 버릴 쓰레기를 내일로 미룬다

 

어느 날 미미는 혼자 밤 산책을 나섰다 미미를 닮은 미미가 다리를 절며 미미를 지나친다 저기서 주인이 걸어온다 팔에는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를 닮은 미미가 꼭 안겨 있다 짖으며 주인을 핥는다

 

미미는 죄와 벌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신이 지은 죄가 뭘까 생각했다 미미는 죄와 벌이 자꾸 헷갈린다

 

 

 

채미희

 

 

 

눈으로 만든 여자가 극장으로 들어간다

착석

손목이 아파올 때까지 컵을 들고 있다

 

*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려

차를 뒤에서 민다

 

겨울 바다 앞에선 소리 지르지 않았다

파 직

딱딱한 바다는 바다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라고 말하는 인물

파 직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간다

(전화번호를 찾아 문자를 보내며 친구야, 라고 부르는 일을 고민하는 캐릭터)

헤어진 친구들아, 지금 와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니

 

저 자식은 왜 내 이름을 또박또박 성까지 부르지?

인물이 말하고

 

퀭하면서도 맑은 느낌의 눈동자는 유리알 같다

건조를 모르거나

물기가 없는 인물의 눈

 

반 아이들이 모두 창밖으로 얼굴을 뻗는다

누가 떨어졌데

치마 주머니에 몸을 넣고 가만히 교실 의자에 앉아

추락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의 귀

 

낮과 밤 사이에 있는 요금소

앞주머니

클로즈업

인물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정신이 집을 나가면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퍼즐 맞추기의 고착화

를 미지수나 변수가 아닌 다른 개념으로 10줄 이상 설명하시오 (, 임의 창조 금지-예컨대 예술)

이런 문제를 만난 것 같은 느낌

 

*

 

엔딩 크레딧

여자는 컵처럼 바닥이 보인다

 

비지엠이 없어서 배우들은 대사와 노래를 같이 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감독님 너무 빡세요,

여자는 웃는다

 

징그럽군,

반쯤 녹은 여자

뒤에는

창백한 얼굴의 관객을 보고

웃는 관객

웃는 관객을 보고

우는 관객

잠을 자는 관객은 눈사람처럼 조용하다

 

현대 예술은 혹시 불임이 아닐까[1]

 

거리마다

영화의 기대

관객의 증발

 

영화의 끝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눈으로 만든 여자가 극장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21세기일 것이다




누드 크로키

 

 

사물처럼

앉아 있다

너는 조금 늦을 것이다

나는 앉은 채로 조금 빠를 것이다

앉아 있기 때문에

 

의자에서 티브이까지의 거리

티브이에는

감옥에 간 여자들이 대화한다

밥을 잘 먹고

운동을 해

 

엄마처럼

 

사물처럼

앉아 있을 뿐

그 누구도 엄마로 태어나지 않고

나도 사물로 태어나지 않고

아이 낳은 것을 잊어버리고

의자를 잊어버리고

눈만

껌뻑 앉아 있기 때문에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게 인사할 뻔

 

방에는 한가득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나는 너를 낳은 걸 후회함

 

엄마처럼

 

너는 미안하다는 말만 똑같이 세 번째

방에 들어온 빛

정지하지 않을래?

의자에 함께 앉아

같이 위험해질까?

 

나는 사물처럼

이 방에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앉아 있다

뮈랭처럼

 

한 아이가 엄마를 위해

사물에 입을 그려주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유리병


바닥을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찾는 사람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확인하는 사람

 

쌓는 세계의 원주민

부수는 세계의 원주민

 

여기까지, 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헤어지고

집에 와서 장조림을 끓인다 조금만 상처가 생겨도

음식에 쓸 수 없는 메추리알

 

죄를 짓는 사람과

죄를 모르는 사람과

죄를 상상하는 사람은

어쩜 그리도 닮았을까

 

정오의 탁자

빛이 보여주는 물의 뼈

물은 볼 수 없는 빛의 표정



비- 사월


누가

네 소설엔 사건이 없어, 라고 해서

그 말을 내 세계이자 배경에게 전해주었다 걔는 퇴근해서 양말도 안 벗고 식탁에서 호박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물도 없이 야금야금

, 어떻게 된 거야

, 그날 네가 먼저 가서 이렇게 된 거 아니냐

기억해? 그날 기억하냐고

당연히 기억하지

네가 했던 말

 

이런 세계라면, 이제 그만 무너져도 되지 않을까,

세계 씨



 

너 데려다주고 나 혼자 집에 가다 그제야 발견했지

네가 던진 돌

누가 던져?

네가

그래서?

그래서? 네가 던진 돌에 구멍이 뚫렸잖냐 그래서 이게 계속 물이 새지 않겠냐


뭐가 아,



근데 그게 보였냐?

아무도 안 보는 그게

그리고 진짜

본 게 맞냐



, 됐다 됐어 됐다고

새끼야 지금 우리가 소설이다 사건이다 있냐 없냐 진짜다 아니다 내가 한 게 맞냐 아니냐, 이런 말 이런 거 누가 읽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지붕 있는 집이라면 누구라도 다 읽지 않을까 물이 새고 번개가 치니까 무서워서 뭐라도 읽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 세계가 다 이렇게 쩌억 벌어졌는데 왜 사이렌 들으면 그렇게들 지진 대피 훈련은 잘 하지 않았냐 우리 까르르르 엄청 웃고 떠들다가도 사이렌 들으면 또 까르르 까르르르 책상 아래로 숨어 지붕을 만들지 않았냐

, 너는 무슨 말을 사건처럼 하냐 그러니까 누구한테 그런 말이나 듣고 다니는 거 아니냐


?

,

세계 씨다

*

까르르

(지붕, 구멍, , 나 혼자 발견, 기억, 호박 고구마, 퇴근, 배경, 사건, 소설, 소설소설소설누가없다다 도망…)

까르르르



행복한 사전


미래는

같은 단어를 말하면

두 사람의 수명을

조금씩 깎는다

 

날카롭게

얇게

단어들을 사용했으나

미래에 의거하여 둘은 짧아졌다

 

날개 달린 벌레들은

원을 그리며 날았는데

털이 아름다운 짐승들은

파란 하늘 아래서

오직 몸으로

오직 몸으로 말했는데

 

둘은

하늘이 너무 파랗고 투명해도

눈에 살얼음이 낀 것처럼

입에 음식물이 가득 찬 것처럼

말을 할 수 없었다

구름의 그림자 안에서 거닐고 숨 쉬었다

 

미래는 사전적으로 멀었고

둘은 가까워졌다

 



[1]  사이먼 레이놀즈의 말.   不 아닐 불 稔 여물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