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안희연 시 보기(5편)

시치 2019. 7. 19. 20:16


안희연 시 보기(5편)


산책자/안희연-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백색 공간/안희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파트너/안희연-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 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 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몽유 산책/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소동/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 안희연 시인 약력  ]

안희연 

안희연 시인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